조순 전 부총리 “박 대통령 1년 안에 레임덕 올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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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 옳으니 무조건 따르라 하면 박 대통령 1년 안에 레임덕 올 수도”

예전에는 세상사가 답답하면 찾아갈 어르신이 참 많았다. 김수환 추기경, 성철 스님, 강원용 목사 등 종교계 지도자는 물론 정치원로나 학자들도 많았다. 요즘은 어르신을 찾기도 힘들지만, 아랫사람들조차 “이런 수구꼴통 노인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냐”거나 “그 영감은 뼛속까지 빨간 원조 좌파”라며 존경심은커녕 색깔논쟁을 벌여 난감하다.

그래도 아직 후배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언론에서도 ‘길을 묻는다’며 찾아가는 이가 조순 선생(86)이다. 경제학도의 필독서인 <경제학원론>의 저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한국은행 총재, 초대 민선 서울시장, 한나라당 총재 등 정·관·학계를 아우르는 이력도 화려하지만, 무엇보다 그 어느 자리에서도 학자다운 풍모를 잃지 않아서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했지만 정부 부처의 인선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어수선한 요즘, 피부도 마음도 도무지 봄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2월의 마지막 날에 서울 봉천동 조순 선생의 자택을 찾았다. 지난 연말에 낙상을 해서 팔과 다리가 불편하다면서도 모든 질문에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과 내용으로 답해주셨다.

[유인경이 만난 사람]조순 전 부총리 “박 대통령 1년 안에 레임덕 올 수도”

박근혜 대통령이 정계에 입문하는 데 기여했다면서요.
“제가 한나라당 총재 시절에 박근혜 대통령이 경북 달성군 국회의원으로 출마했으니 인연이라면 인연이죠. 당시 생각 이상으로 정치 센스도 뛰어났고 말하는 요령도 좋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제가 정계 진출을 권한 것도 아니고 그 후에는 전혀 만난 적이 없습니다.”

최근 대통령에게 바라는 것을 묻는 질문에 ‘많은 것을 버려 달라’고 요청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들 이런저런 것을 해달라고만 당부하는데요.
“대통령이란 자리는 영광스럽지만 매우 고독하고 희생이 필요한 자리입니다. 우리 국민도 대통령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대통령이 성공적으로 일을 추진하려면 고정관념과 실체가 없는 선입견을 버릴 것을 당부했습니다. 예를 들어 대기업이 잘 돼야 나라가 잘된다, 재벌을 개혁해야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다는 주장이죠. 특히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 때부터 너무나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에 얽매여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영광도, 잘못도 이젠 다 작별하고 새로운 박근혜 정부 시대로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물론 다른 나라도 과거 마이너스 유산을 버려야 합니다. 잘못된 유산을 잔뜩 갖고 있으면 전혀 새로운 발상이 되지 않아 새정치는 물론 경제부흥도 기대할 수 없으니까요.”

과거의 잘못된 유산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무엇인가요.
“첫째는 개발연대 유산입니다. 1960~70년대의 밀어붙이기식 불도저 성장은 안됩니다. 당시엔 그런 방식이 필요했고 성공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둘째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도 못했고 실질적으로는 붕괴되어 있는데도 폐기 선언을 할 용기가 없는 것 같습니다. 지도자들도 대안이 없으니 그렇겠지요.”

지난 대통령 선거 때는 각 당에서 경제민주화가 화두였습니다. 새누리당의 경우에도 김종인 전 장관 등이 강하게 경제민주화를 주장했고요. 경제학계의 원로로서 경제민주화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경제와 민주화란 말은 표현상 모순되는 용어입니다. 경제민주화가 시대의 화두가 된 것은 고용불안에 빈부격차가 극심해진 상황에서 정치민주화가 대체 무슨 소용인가라고 따져 묻기 때문입니다. 즉 경제민주화는 정치민주화의 실패를 뜻합니다. 정치가 성공하면 당연히 경제도 부흥해 경제민주화는 절로 이뤄집니다. 그런데 정치가 순기능을 못하니 엉뚱하게 경제에서 민주화를 찾는 셈이죠.”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를 강조합니다.
“아마도 다양한 분야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IT 분야의 활성 등에서 창조경제를 슬로건으로 내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창조란 지금까지 전혀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다시 보는 것, 혹은 그동안 무시하고 버렸던 것을 다시 살려내는 거예요. 그러려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첨단산업만이 아니라 1차 산업도 얼마든지 새로운 창조경제가 가능합니다. 무엇보다 교육을 강화해야죠. 그래서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역량과 자질이 중요합니다.”

모든 분야에서 인사가 만사라고 합니다. 지난 이명박 정부는 초기에 고소영(고대 소망교회 영남 출신) 정부란 지적을 받았는데 이번에 또 성시경(성균관대 고시 경기고) 내각이란 비난을 받습니다. 서울시장이나 한은 총재 등을 하면서 인재 등용에도 신경을 썼을텐데요.
“인재등용은 예술과 같습니다. 그만큼 조화롭고 균형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영조 임금이 존경받는 이유도 고른 인재를 등용한 탕평책을 폈기 때문이죠. 인재는 재능과 인품만으로 뽑아야 하지만, 학연과 지연 등을 따지는 이유는 너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면 성향과 목표도 같아져 발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창조경제를 강조한다면, 내각이나 청와대 인사 등등에서 새로운 인재를 발굴해야죠. 너무 아는 사람, 친한 사람이 아니라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사람, 유명하지 않은 사람 중에서도 골라내야 합니다. 진흙 속에서 보석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런데 왜 매번 이런 상황이 반복될까요.
“지도자들의 철학이 빈곤하기 때문이죠. 왜 지도자가 되었는가, 어떻게 나라를 운영해야 할까. 어떤 것이 국민들에게 이익이 될까를 고민하고 역사에서 답을 얻는 등 철학하고 깊게 사색하면 됩니다. 철학은 결국 세상을 보는 눈입니다. 철학이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것은 아니니 항상 지도자나 정치가 욕을 먹습니다만….”

지금도 CNN 뉴스를 매일 시청하고 파이낸셜타임스를 읽는다니 세계 경제 상황을 잘 알 겁니다. 세계의 경제위기는 언제까지 이어질 것으로 봅니까.
“참 답답합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성장이 ‘뉴노멀(new normal·시대가 바뀌면서 새롭게 떠오르는 기준)’인 시대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어려울 겁니다. 미국, 유럽, 일본은 돈만 풀고 있습니다. 돈 푸는 게 정답이라면 벌써 문제가 해결됐을 겁니다. 문제는 실물에 있습니다. 금융으론 아무리 해도 안 되고 거품만 만들 뿐입니다. 심하면 금융위기를 다시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구조적인 문제도 큽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미국 사회에 대해 ‘임플로전(implosion)’을 얘기했어요. 내부파열입니다. 조화가 잘 안 되는 거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가 서로 융합해서 협조하고 함께 해법을 찾아갈 수 있는 여지가 많이 줄었습니다. 감정적으로 대립하면서 구조적으로 합의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유인경이 만난 사람]조순 전 부총리 “박 대통령 1년 안에 레임덕 올 수도”

우리 경제 전망도 어둡다는데요.
“한국 경제가 처한 문제는 상당히 풀기 어렵습니다. ‘퀵 픽스(quick fix·당장 효력이 날 수 있는 수단)’가 없어요. 성장 잠재력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과거 오일쇼크나 외환위기(IMF) 때는 나름의 처방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경제의 잠재능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국론마저 분열되고 있어요. 중산층이 붕괴되고 청년실업자들의 불만이 가득합니다. 1%와 99%의 구도라고 하지만, 흔히 돈 많은 이들로 분류되는 1%조차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다들 상대적 박탈감과 불안에 시달리니 전국민이 불행하게 느끼는 겁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최근 지지율이 48%까지 내려갔습니다. 대통령 선거 득표율보다 낮습니다. 국민 절반이 지지하지 않는 상황에서 경제까지 어려운데 어떻게 국민을 설득하고 소통할 수 있을까요.
“국민에게 감동을 줘야 합니다. 국민은 감동을 필요로 합니다. 감동은 이벤트나 연출이 아니라 진심에서 나옵니다. 지금 세계 경제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나라의 실상은 어떤지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국민들에게 다같이 힘을 합해 나가자고 진심어린 목소리를 내면 우리 착한 국민들은 호응할 겁니다. 그런데 ‘내 생각이 옳으니 무조건 따르라’고 하면 언론이나 야당과의 밀월, 국민의 기대감도 무너지고 1년 안에 레임덕이 올 수도 있지요. 그건 박 대통령의 불행이 아니라 우리 국민의 불행입니다. 충리나 장관 등 다른 정치인들도 감동을 주는 정책을 개발하고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국민보다 정치인들의 양극화가 심각합니다. 얼마 전엔 정미홍 전 아나운서가 ‘좌익 시장은 물러나야 한다’는 말을 해서 고소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양극화, 혹은 편가르기 소질이 농후하고 그런 환경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해방 후에 좌우익이 나뉘었고 6·25전쟁 후에는 남과 북으로 분열됐죠. 겉으론 휴전 등으로 봉합된 것 같아도 안으로는 그런 감정이 남아 녹아 흐릅니다. 정치인들의 의식과 언행이 중요한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정치인들이 항상 상대방을 비난하고 공격하고 편가르기를 하니 국민들도 서로 편가르기를 합니다. 앞으로 통일을 하려면 우리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 그걸 강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국과 대만의 관계도 그렇고 통일 이후의 독일도 서로를 존중하고 한 민족이란 동질성을 강화했기에 서로 동반성장하는 겁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만, 역사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부끄러움이 아닌가 싶습니다. 과거 실패를 거울삼아 그걸 반복하지 않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부의 정책 중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무엇인가요.
“부동산 정책과 세종시입니다. 과거 우리 경제정책이나 역사를 보면 집과 땅 등 부동산은 항상 가격이 오른다는 믿음 때문에 온국민이 자산가치 보유의 수단으로 내집 마련과 땅투기에 몰입하다 현재 깡통아파트, 하우스푸어 등이 된 겁니다. 그것 역시 고속성장만 강조하는 ‘빨리빨리 성장’의 폐해죠. 또 얼마 전 신문을 보니까 ‘왜 세종시에 KTX가 안들어가나, 세종시에 KTX가 들어가면 누가 세종시에 살겠는가’란 기사가 실렸어요. 이런 문제만이 아니라 세종시는 앞으로 두고두고 정부의 딜레마가 될 것입니다. 한 번 정한 법과 원칙을 반드시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황에 따라 지켜서는 안될 약속도 있습니다. 행정수도는 정부 부처와 부처 직원이 직장을 옮기는 차원이 아닙니다. 정부 부처는 물론 KDI 등 기관도 그 좋은 장소와 환경을 두고 이전한다는데 나라 발전은 약속보다 합리성, 과학성이 더 중요합니다.”

존경받는 학자이자 정치인이었는데, 가장 자랑할 만한 업적은 무엇인가요. 이젠 자랑해도 될 연세인데요.
“자랑할 일은 없습니다. 다만 부정을 저지르거나 욕심부리지는 않았어요. 서울시장 시절에도 큰 건물을 짓거나 상징적인 시설물을 짓는 것보다는 서울시민대학 등을 열어 서울시민의 교양과 교육발전에 신경을 썼습니다. 삼풍백화점 사건이 터졌을 때도 완벽한 조사와 복구작업엔 최선을 다했지만 보상 등 돈 지출을 서울시민에게 짐 지울 수가 없어 김영삼 대통령을 세 번이나 독대해 정부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내 빚이 아니라 서울시 빚이니 생색을 낼 수도 있지만 서울시 예산을 한푼이라도 허투로 쓰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제가 부정하지 않고, 40년 가까이 봉천동 집에서만 살면서도 여태껏 이렇게 사는 것은 경제학원론 책이 잘 팔린 덕분입니다.”

넘어져 손목과 다리는 불편해도 혈관이나 내장 기관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조순 선생은 별명처럼 산신령 같은 신비한 풍모를 보였다. 방에 가득한 책들과 자료를 보면서 왜 피터 드러커나 스테판 악셀 등 학자들이 100수를 누리는지 알 것 같았다. 늘 세상사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니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어서가 아닐까. “마음을 비워야 새로운 세상이 들어온다”고 강조하는 조순 선생의 말을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이번 각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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