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헌 변호사 “대선 후 집단우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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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 집단우울증 시달리는 이들 많아, 이럴수록 유머가 필요”

“저는 지난 연말에 법무법인 ‘광장’을 떠나 집에서 칩거하고자 합니다. 앞으로도 변함없는 편달을 바라오며 새해 뜻하시는 일이 두루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유인경이 만난 사람]한승헌 변호사 “대선 후 집단우울증…”

연초에 한승헌 변호사에게서 이런 연하장이 왔다. 올해 한국나이로 팔순이니 직장을 떠나는 것이 의외는 아니지만 지난해 10월에 <유머수첩>이란 책을 펴내고 모교인 전북대에서는 물론 가천대에서 석좌교수로 직접 강의까지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신 분이 돌연 ‘칩거’라니…, 혹시 지지성명도 내고 고문으로 활동한 문재인 후보의 낙선 충격 탓은 아닐까.

48%의 국민들이 실망하고 ‘멘붕’이란 말을 쓰기도 하는 요즘, 박정희 대통령 당시에 가장 자주 교도소를 드나들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한승헌 변호사는 어떤 심정일까. 엄혹한 시기와 감옥에서도 항상 유머를 구사한 그에게서 2013년을 밝고 긍정적으로 맞는 비법을 전수받고 싶었다. 인터뷰는 칩거하는 집이 아닌, 법무법인 광장의 회의실에서 이뤄졌다.

왜 광장을 떠나셨습니까.
“변호사는 법적 정년 규정이 엄격하진 않지만, 나이든 선배가 자리를 비워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사원장을 그만두고 법무법인 광장에 와서 13년이란 세월을 보냈어요.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조언이나 자문도 해주긴 했지만 법정에 서거나 구치소 접견 등의 일을 하진 못했지요. 제 이름을 건 사무실은 사라졌어도 여전히 인연은 맺고 있습니다.”

왕성하게 활동하시다가 너무 한가한 시간을 보내시면 스트레스를 받는다던데요.
“전 조상 때부터 ‘한 가’여서 늘 한가했습니다. 또 스트레스의 달인이어서 스트레스 충격도 덜합니다. 광장에 있으면서도 사회복지공동위원회 회장,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위원장, 외대 재단이사장, 헌법재판소 자문위원 등의 일을 했고, 지난해까지 가천대학에서 저작권법을 다룬 ‘문화예술과 법’이란 과목을 직접 강의하고 학점도 줬어요. 아마 학점을 주는 최고령 교수였을 겁니다. 그런데 기말고사 시험에 한 학생이 시험지 여백에 ‘교수님의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란 글을 적었더군요. 건강 기원도 아니고 만수무강이라니 내가 얼마나 노인으로 보였나 싶어 충격을 받았어요. 그 충격으로 강의도 접었어요.(웃음) 아무튼 올 한 해는 대외활동을 극소화하고 주변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몰입도 중요하지만 해방이나 휴식도 필요하지요. 리뷰의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만수무강’이란 말의 충격만큼이나 이번 대선 결과에도 충격을 받으셨지요.
“저뿐만 아니라 이번 대선 후에 집단우울증에 시달린다는 이들도 많더군요. 선거 다음날, 주변 사람들과 전화를 주고 받으며 다들 ‘어떡하죠?’라기에 ‘할 수 없잖아요. 어떻게 해서든지 5년은 더 살고 봐야지’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아니 그때 가서도 실패하면요’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또 그랬죠. ‘그럼 그때부터 5년 더 살아봐야겠지’라고요. 아무튼 박근혜 당선인이 우리 노인들의 평균수명 연장에 크게 이바지한 셈입니다.”

그런데 선거 당시에 박정희 시대를 기억하면 반유신투쟁을 했다는 이들이나 동교동계 인물들이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것도 충격적이지 않았나요.
“충분히 그럴 만한 분들이라 크게 충격을 받진 않았습니다. 과거 민주화운동을 했거나 동교동계 적자임을 주장한 이들이지만 실상 몇 년 전에 한나라당에 공천신청해서 선거에 나갔다가 떨어지기도 하고 선진당도 가고 이미 민주당 내지 야권을 떠난 사람들이에요.”

이번 선거에 50대 90%가 투표에 참여하고 어르신들이 박근혜 후보의 당선에 앞장서서 자칫 세대갈등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일부이긴 하지만 노인들의 대중교통 무료승차도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고요.
“세상만사가 결과만 갖고 이유를 소급 분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야권이나 진보 성향의 국민들이 볼 땐 아쉬운 패배이지만, 제가 볼 땐 잘 싸운 선거였어요. 그런데 세대간 갈등은 물론 진 싸움에서도 서로 탓을 하고 성패를 논하더군요. 호남에서 새누리당이 두 자릿수가 나왔다. 영남에서 야권 득표율이 높았다 등의 지역분석은 의미가 없어요. 영남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잖아요. 인구 편차를 논하기 전에 수도권을 비롯한 전국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어야 했습니다. 아무튼 이제는 서로 상대에게 탓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위로하고 등을 두드려줘야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유머가 필요하지요.”

변호사님의 경우엔 감사원장 등의 경력이며 강단 있는 외모 등 부드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평소 유머러스한 말솜씨를 갖고 있는 것은 물론 유머 책만 3권이나 펴냈습니다.
“제가 원래 이중인격자입니다.(웃음) 사실 유머란 행복하고 만족스러울 때보다는 괴롭고 엄혹할 때 그걸 이겨내기 위한 수단으로 탄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004년에 산민객담(산민은 그의 아호) 시리즈로 <유머산책>, 2007년에 <유머기행>에 이어 지난해 말에 <유머수첩>을 냈어요. 제가 <정치재판의 현장> <분단시대의 법정> 등 전문서적도 많이 냈는데 정작 유머책이 더 인기예요. 특히 이번에 유머수첩은 MBC의 ‘PD 수첩’이 운명을 다하게 되었기에 제가 살짝 도용한 겁니다. 세상사람들이 엄숙하고 진지한 이야기보다는 유머러스한 해학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즐겁자고 쓴 책을 다들 좋아해주니 다행이죠. 직업이나 저술의 본류가 아닌 외도가 본도가 된 셈입니다만….”

[유인경이 만난 사람]한승헌 변호사 “대선 후 집단우울증…”

힘들고 어려울 때 유머가 더 많이 나온다면서요.
“유복하고 즐거운 상황보다 그 반대 토양에서 싹트는 유머가 더 멋지지요. 유머는 현실로부터의 해방감, 각박한 것에서 벗어나는 여유로움, 고통을 다독거리는 위로감과 진통제의 효과를 줍니다. 감옥살이를 하면서 저도 모르게 유머가 줄줄 나오더군요.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고 너무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에서 그나마 이겨내는 힘이 유머였지요. 감옥에서 일찍 석방되려면 국경일 특사가 그 방법이라 애국심도 없는 이들이 국경일만 기다립니다. 제 경우 날씨가 추워져 견디기 힘들어 ‘제발 성탄절 특사로 나가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정작 다음해 석가탄신일 특사로 나와 친구들에게 ‘네가 믿는 하나님은 널 안 빼주고 왜 부처님이 빼주셨냐’란 비아냥을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성탄절 무렵에 하나님이 좀 바빴냐. 그래서 친구인 부처님께 특별 부탁한 거다’라고 해서 종교화합도 시도했지요.”

평소 생활에서 유머 소재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게 어디 쉬운가요.
“유머란 단순히 웃기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관조하고 살짝 비틀거나 확 뒤집어서 교훈이나 즐거움을 주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흉내내거나 재탕하면 그저 싱거운 이야기일 뿐이지만 저는 체험유머란 자부심이 큽니다. 2006년엔가 <한승헌 변호사 변론사건 실록>이 범우사 창사 40주년 기념 출판으로 간행되어 KBS에서도 특집프로그램을 만든다며 서울구치소 앞에서 현장 촬영을 하기로 했어요. 서울구치소는 옮겨갔고 기념관처럼 되어 있어 입장료를 받더군요. 제가 ‘아니 구치소에서 입장료를 받아요? 예전엔 무료 입장에다 한 번 들어가면 나올 때까지 의식주를 국가에서 해결해주었는데 잠깐 들여다보고 나온다는데도 돈을 받다니 세상 참 나빠졌구만’이라고 하니까 다들 웃어요. 담당 직원도 따라 웃더니 그냥 들어가라고 하더군요. 특별히 봐주는 거냐니까, ‘아뇨.65세 이상은 무료거든요’라는 겁니다. 나이탓인지 제 건강상태를 묻는 지인들에게도 ‘고혈압, 당뇨, 협심증 등 온갖 성인병에 안 걸린 것을 보니 아직 미성년인 것 같다’고도 합니다. 감기가 걸렸을 때도 ‘내 감기는 주한미군이다, 한번 들어오더니 나갈 줄 모른다. 그래도 난 반미주의자는 아니다. 커피 주문할 때는 아메리카노만 시킨다’고도 하죠.”

우리나라 정치 수준이 낮은 데는 정치인들의 유머감각이 너무 없어서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아마도 유교사상에 너무 길들여져서 지나치게 엄숙주의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정치인들은 부드러운 유머보다 독설에 익숙하기도 하고요. 다들 너무 ‘차렷’ 자세로만 살아서 몸과 정신이 경직되어 있어요. 때론 ‘편히 쉬엇’도 필요하고 직구만이 아니라 변화구도 필요하지 않나요. 엉뚱한 유머는 오히려 안하느니만 못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전에 ‘박근혜씨가 부모님을 일찍 잃어서 ‘유머’ 감각이 없다’란 말을 했어요. 남을 비하하거나 약점을 들추는 것은 유머가 아닙니다. 미국 등 외국의 경우에는 유머 전문 스피치라이터가 대통령과 부인에게 유머 원고를 전달해 기자회견 등에서 잘 활용합니다.”

만나본 분 중 유머감각이 탁월한 정치인은 누구였나요.
“김대중 대통령이 뜻밖에 유머러스했어요. 평생 고문과 탄압에 시달려 굉장히 딱딱할 것 같지만 공·사석에서 유머를 잘 구사했습니다. 전두환 정권 때 그분이 미국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는데 그 비행기에 미국 언론인, 종교지도자 등 외국인들이 많이 동행했어요. 당시 정부에서 ‘DJ는 사대주의자’라고 비난하니 그분 말이 ‘내가 그 사람들을 따라가면 사대주의자이지만 그들이 나를 따라왔는데 무슨 사대주의자냐’고 맞받아쳤어요.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 비서실장이 당시 민주당 손학규 대표에게 취임인사차 찾아와 정부 요직 지명자들의 부동산투기, 표절, 탈세 등의 문제가 많지만 흠이 좀 있더라도 널리 덮어달라고 했어요. 손 대표가 ‘그 흠을 다 덮으려면 아주 넓은 담요가 여러 장 필요할텐데’라고 답했더군요. 인명진 한나라당 윤리위원장도 철새처럼 당적을 자주 옮긴 정치인들이 공천 신청을 하자 ‘사람에게 공천을 줘야지 왜 새에게 공천을 주냐’는 일침을 가한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검사 출신이기도 하고 사법제도개혁위원장도 지냈습니다. 정치검찰은 물론 뇌물검사, 성검사 등 말이 많은데 검찰개혁은 가능하다고 보나요.
“검찰이 명실상부하게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하려면 집권자와 검찰 총수의 양심과 의지가 가장 중요해요. 검찰의 중립성과 독립성을 위해 검찰총장 임기제를 두고 있지만 잘 지켜지지도 않고 있잖아요. 검찰 중립이 안되니까 공비처라고 고위공직자나 대통령 친인척을 수사하는 별도의 수사기관을 두자 하는데 그 기관이라고 해서 하루 아침에 공정무사한 검찰이 된다는 보장도 없고 옥상옥이 되기 쉽습니다. 대통령이 검찰 개혁의 의지가 있어야 하고, 청와대가 권력 정상부에서 간섭을 하지 말아야 진정한 개혁이 됩니다. 청와대나 권력 정상부에서 국가기관에 간섭을 많이 하는 건 두 가지예요. 대통령 자신이 그러니까 참모들이 쥐어짜는 게 있고, 정상의 한 분은 그렇게까지 생각을 않는데 주변의 인물들이 과잉충성이나 자기존재감을 높이기 위해서, 혹은 둘 다 복합적인 사항이지요. 지도자의 의지가 투철하고 주변이 깨끗하면 검찰개혁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지도자건 검찰이건 입신한 분들이 그 후엔 헌신해야 하는데 다들 입신양명에만 신경을 쓰니….”

이젠 정말 칩거하실 생각입니까.
“아주 ‘방콕’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석좌교수로 모교인 전북대학과 가천대학에 가끔 강의는 나가지만, 되도록 공적인 영역에서는 이름도 몸도 빼고 명실상부한 은퇴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지난 연말에 전북대학교에서 중앙도서관에 제가 기증한 책들을 모아 제 아호를 딴 ‘산민문고’를 만들었습니다. 또 지난해 12월 3일부터 연말까지 전북대 65주년 기념으로 제가 소장한 자료를 모아 소장자료 특별전을 열었는데 반응이 좋아 1월 말까지 연장했다고 하더군요. 1월 말까지는 제가 일본에 관련해 쓴 글을 모아 늦은 봄쯤에 일본 출판사에서 발간됩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유신의 추억’이란 전시회를 연다며 재판기록을 주었는데 전국 순회전시를 한다고도 하고요. 그래도 공적인 일들에선 물러나려 합니다. 제가 그동안 일복, 인복, 책복이 많아 평생 바쁘게 즐겁게 살았는데 일복은 줄이려고요.”

어이없는 언행으로 황당해서 웃게 만드는 정치인들, 얼굴은 솜사탕처럼 부드러운데 가슴은 벽돌처럼 딱딱한 사람들 사이에서 한승헌 변호사의 존재가 더욱 귀하기만 하다. 팔순의 한승헌 변호사를 만나고 돌아오는데 조인성이나 원빈을 만난 것보다 더 행복했다. 유머바이러스는 이처럼 중독성과 마취력이 강하다.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기자 doo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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