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실에 상상의 날개를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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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팩션(faction)이라는 말이 인기다. 물론 역사적 사실을 의미하는 팩트(fact)에 상상의 세계인 픽션(fiction)을 결합한 말이다. 예전에 실제 벌어졌던 사건에 극적 창의력을 더하는 부류의 문화적 산물이다. 세종대왕이 욕지거리를 자주 내뱉었다든지 신윤복은 사실 여자 화가였다는 파격적인 가정들이 손꼽아볼 수 있는 경우들이다. 그럴싸한 이야기가 듣는 이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고, 정말일까 싶은 상황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사학자들은 팩션이 역사를 왜곡하고 진실을 오도한다고 핏대를 올리기도 하지만, 사실 문화산업 속의 팩션은 단순한 과거나 역사의 재연이 아닌 현재의 이야기를 빗대어 표현하는 데 대부분 진짜 묘미를 담고 있다. 열린 마음으로 한 수 접고 개방된 마음으로 이야기를 즐기다보면 인간 상상력이 보여주는 끝 모를 기발함에 절로 감탄을 하기 일쑤다.

뮤지컬 <엘리자벳> | EMK 뮤지컬 컴퍼니 제공

뮤지컬 <엘리자벳> | EMK 뮤지컬 컴퍼니 제공

요즘 흥행 뮤지컬 속에서도 팩션은 인기 아이템이다. 요즘 한창 공연중인 ‘엘리자벳’도 대표적이다. 민중봉기가 거세던 유럽 근대 격변기에 오스트리아 황제였던 프란츠 요세프 1세의 부인이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비운의 역사적 인물이다. 황실 가문에서 태어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유년시절을 보냈던 그녀는 한때 유럽 사교계의 꽃이라 불릴 만큼 화려한 삶을 보냈다. 타고난 아름다움과 사교술, 매력적인 이미지는 단연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황실 내에서의 정치적 갈등, 고부간의 알력 등은 그녀로 하여금 자유를 꿈꾸게 했고, 결국 답답한 황실의 전통보다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는 여생을 보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녀의 말년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아들이었던 황세자 루돌프의 자살을 목격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으며, 결국 그녀 스스로도 무정부주의자로 알려진 괴한 루케니에 의해 암살을 당하고 만다. 영국 왕실의 비운의 왕세자비였던 다이애나를 떠올리게도 되는데, 흥미롭게도 두 여인은 각각의 나라에서 아직도 대중들의 사랑과 연민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존재로 남아있다. 아름다운 외모 뿐 아니라 기구한 삶의 궤적이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뮤지컬 ‘엘리자벳’의 팩션은 암살자 루케니의 동기를 추적하는 부분에서 가장 매력적으로 활용된다. 케네디를 저격한 오스월드의 의도와 배후가 오늘날까지 세상 사람들의 호기심거리가 되고 있는 것처럼, 뮤지컬 안에서는 루케니의 암살 동기에 대한 심문이 극의 처음과 끝을 장식한다. 팩션답게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원작자의 기발한 상상력이다. 극 안에서 루케니는 자신이 엘리자벳을 암살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늘 생각하고 있던 죽음(토드)에 대한 동경과 사랑을 그저 현실화시켜준 것이라 항변한다. 어린 시절 사고로 죽음을 가까이에서 보게 된 엘리자벳은 늘 죽음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 동경과 연민 속에서 살았고 그래서 결국 죽음과의 만남을 위해 자신으로 하여금 마지막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이 뮤지컬이 아시아 문화권 중에서 특히 일본에서 오랜 세월 큰 흥행을 기록했던 이유도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죽음의 미학은 일본 문화의 독특하고도 주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말 공연에서도 토드역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자타공인 가창력의 뮤지컬 배우인 류정한과 차분하고 매력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송창의, 그리고 ‘시아준수’로 유명한 김준수가 번갈아 무대에 나온다. 간혹 이 작품의 주인공이 엘리자벳이 아닌 토드였나 착각이 들 정도로 각각의 배우가 다른 색깔의 매력을 보여줘 흥미롭다.

공연장에서 일본 말을 자주 듣게 된다는 점도 이색적이다. 아무래도 이웃 나라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다 보니 요즘 한국 문화에 흥미를 지닌 일본 여성 관광객들의 눈과 발을 자연스레 유혹해서 생긴 현상 같다. 이쯤되면 뮤지컬도 관광자원으로 부를 만하지 않을까. 우리 뮤지컬계로서는 고무적인 모습 같아 반갑고 기쁘다. 한 순간의 바람이 아니라 한류의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공식으로 오래 계속될 수 있도록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원종원<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뮤지컬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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