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재불 한국작가의 작품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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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최초의 서양화 전시회를 연 화가 나혜석(1896~1946)이 1927년 파리를 다녀온 이후, 일군의 한국 화가들이 1950년대 다시 이곳을 찾았다. 오늘날 한국 현대화의 대가들로 꼽히는 김환기, 권옥연, 남관, 이성자, 손동진, 이세득이다. 서울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약 9000㎞. 이들이 이 먼 길을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14년간 파리에 머문 남관(1911~1990)의 말을 들어보자. “그것은 서양미술을 직접 보고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서양의 것을 단순히 카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인스피레이션의 원천으로 삼고 또 하나의 윤리적, 지적, 정신적 변혁의 계기로 삼는다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이세득, 파리 아틀리에의 작품 <념> 앞에서.

이세득, 파리 아틀리에의 작품 <념> 앞에서.

한국의 ‘에콜 드 파리’로 불리는 그들은 유럽의 서정적 추상운동을 직접 경험하면서 이를 토대로 한국적 주제와 전통성이 녹아든 독자적인 추상미술의 세계를 열었다. 원래 ‘에콜 드 파리’는 마크 샤갈, 파블로 피카소, 모딜리아니처럼 20세기 초 유럽에서 자연주의와 고전주의에 대항한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의 중심에 있던 예술가들을 총칭하는 말로 쓰였다. 

서울 충무로 신세계갤러리에서 3월 19일까지 열리는 ‘1958 에콜 드 파리’ 전시는 이들 6인의 1세대 재불(在佛) 한국 작가들이 공통으로 머물던 시기인 1958년을 전후로 당시의 작품과 자료들을 한데 모았다. 한국 현대미술을 정착시킨 대가들의 파리 시절 작품세계를 비교하며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로, 한국전쟁의 비극을 딛고 이들이 꿈꾼 새로운 이상 세계를 회화작품으로 접할 수 있다. 

권옥연(1923~2011)은 1956년 파리에 도착한 이후 화풍의 변화를 보였다. 평면적인 이미지로 된 풍경과 인물 작업에서 추상적인 실험작업으로 전환한다. 정형화된 추상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앙포르멜 미술의 영향을 받은 서정적 추상양식을 선보인다. 1960년 작품 <추상>에서 비정형의 형태와 두툼한 질감, 청회색의 절제된 색채 등에서 앙포르멜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에콜 드 파리’의 중심지였던 파리 몽파르나스에 화실을 마련한 남관도 앙포르멜 추상화를 그렸는데, 그의 파리 생활 초기작인 <시장>은 파리 생활의 고독과 외로움이 신비스런 형체로 표현되었다.

김환기(1913∼1974)는 파리에서 달, 백자, 산, 학, 매화 등 한국적 소재를 바탕으로 한 서정적 추상화를 그렸다. 파리 개인전에 출품된 <항아리> <영원의 노래> <산호선을 날으는 섬> 등은 회화로 표현된 ‘시’로 불릴 만큼 고도로 절제된 조형요소로 문학적인 리듬과 운율을 느끼게 한다. 그는 이후 1965년 51살의 나이에 현대미술의 중심지로 부상한 뉴욕에 건너가 서정성이 강한 독창적 추상양식인 점묘 시리즈를 발표하며 세계적인 추상화가로 인정을 받게 된다. 

김환기 <새> 1961, 캔버스에 유채, 60×90㎝

김환기 <새> 1961, 캔버스에 유채, 60×90㎝

손동진(80)은 파리에 도착해 오히려 서구 근대미술에 대한 일방적인 추종을 반성하고 한국적 전통과 고전의 가치를 재발견했다. 그는 신라금관과 탈춤, 석굴암 등 전통 소재를 서구적 표현양식을 사용해 새롭게 표현했다. 이세득(1921~2001)은 한국에서 체험하지 못한 새로운 그림세계를 접한 충격에 10개월간 붓을 들지 못했다. 그는 이후 “나만의 그림세계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그린 후 화랑을 돌아보다 거의 비슷한 그림들이 있으면 미련 없이 그 그림을 버려버렸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만의 그림세계 구축에 매진했다. 자연에서 출발한 그의 그림은 입체주의 회화의 오브제 파괴과정을 거치며 서정적 추상표현으로 발전한다. 밝은 색채의 구상화인 <하오의 테라스>에서 서정적 추상화인 <념>으로의 변화는 이 과정을 잘 보여준다. 

조형적 실험을 거듭한 한국의 ‘에콜 드 파리’ 거장들은 대체로 서양미술의 논리는 받아들이되 한국인이라는 태생적인 문화적 배경을 살리고자 했다. 서양미술과 동양미술의 융합을 시도한 이들 작가의 노력으로 한국 현대미술은 독자성을 갖출 수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들 작가의 작품세계를 현장감 있고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작가들과 관련된 각종 인쇄출판물, 언론기사, 사진자료도 전시된다.                                               


<주영재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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