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진의 대부’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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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求職’이라고 쓰인 흰 판을 허리에 고무줄로 매단 채 비스듬히 벽을 기대고 선 구직자. 그 뒤에는 밝은 표정으로 악수를 건네는 말쑥한 양복 차림의 신사들이 보인다. 한국전쟁 직후 재건을 위한 활기가 넘치는 가운데서도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무력감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진이다. 한국 리얼리즘 사진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사진작가 임응식(1912~2001)의 1953년 작품이다.

올해는 임응식이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작고한 지 10년째였던 지난해 시작된 ‘임응식-기록의 예술, 예술의 기록’전은 탄생 100주년을 맞은 올해에도 이어지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2월 12일까지 열린다. 전시는 임응식에 대한 추모전이지만 개별 작품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한국 사진사라는 큰 틀 안에서 그의 작품을 조명한다.

임응식, 나목

임응식, 나목

임응식은 생전에 ‘한국 사단(寫團)의 개척자’, ‘사진예술의 선각자’, ‘한국 현대사진의 선구자’, ‘사진계의 살아있는 역사’, ‘한국 사진의 대부’로 불렸다. 한국 사진의 발전을 위해 온몸을 다해 노력해온 그의 생에 대한 헌사이다.

임응식은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살롱사진’으로 불리던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사진을 작업했다. 화상을 부드럽게 표현하는 연초점 렌즈로 촬영하고 대담한 화면 구성, 광선의 강약에 따른 농담의 조화를 보여주는 풍경사진을 다수 제작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 공보원 소속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종군기자로 참여하면서 그의 작품세계는 급격한 변화를 보인다. 그는 곳곳에서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서울에 돌아와 처음 사흘 동안 아무것도 찍을 수 없었다. “아름다운 대상만을 아름답게 찍어대던 나의 카메라 버릇을 사흘 동안 극복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름다움만 추구하고 현실감각이 없는 ‘살롱사진’에 반기를 들고 ‘생활주의 사진’을 주창한다. 그는 “사진의 예술성은 현실의 속임 없는 재현인 만큼 훌륭한 보도적 스토리 사진만이 진정한 사진의 본도”라고 주장했다.

회화를 흉내낸 사진이 아닌 사진만이 표현할 수 있는 예술성을 실현하려 했다. 이때 찍은 <나목>은 그가 대표작으로 꼽았던 작품이다. “사진에는 작가의 사상과 이념이 응결되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을 잘 반영한다. 불타버린 나무 사이에 서 있는 어린 소년은 생명을 상징한다. ‘말라죽은 나무’를 뜻하는 ‘고목(枯木)’이 아닌 ‘잎이 지고 가지만 앙상히 남은 나무’라는 뜻의 ‘나목(裸木)’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다. 이 사진은 1955년 <미국사진연감>에 수록되기도 했다.

임응식

임응식

그는 1960년대 중반부터 건축잡지 <공간>에 전통 건축 사진을 실으면서 사진의 기록적 가치를 재발견한다. 그는 지금이 아니면 사진에 담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것들을 찾아 나선다.

임응식은 1950년 서울 수복 이후부터 타계한 해인 2001년까지 50년 넘게 명동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명동을 한국 사회 변화의 축소판으로 보고 역사적·문화사적 관점에서 명동의 변화상을 사진에 담았다. 그는 명동을 노파인더 기법으로 촬영했다. 파인더를 보지 않고 촬영해 명동을 지나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을 수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유족이 보관하던 필름을 인화한 사진 123점도 처음으로 공개된다.

전시에서는 소품전으로 동료와 제자들이 촬영한 그의 초상 사진과 카메라·스크랩북·강의안 등 다양한 유품도 함께 전시돼 작가의 삶과 작품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영재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 jyeong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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