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억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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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렌마트는 우리를 단죄하려는 재판관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가만 놓아두지 않는 양심이다.”

독일의 문학비평가 마르셀 라이히 라니키는 뒤렌마트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브레히트 이후 최고의 독일어권(스위스 출신) 극작가로 손꼽히는 뒤렌마트는 부조리 연극으로부터 출발해 과장과 풍자, 폭로 등의 방식으로 비뚤어진 사회와 인간을 고발하는 작품들을 주로 썼다.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유머러스한 그의 작품을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만나기 힘들었는데, 올 가을 그의 대표작 <노부인의 방문>이 두산아트센터 무대에 올랐다.

연극 <노부인의 방문> |두산아트센터 제공

연극 <노부인의 방문> |두산아트센터 제공

<노부인의 방문>은 어느 몰락한 작은 도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기차역에서 시작된다. 그들은 이 도시 출신으로 갑부가 되어 돌아온 차하나시안 부인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극도의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던 시민들은 그녀가 자신들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 그들 앞에 나타난 노부인 차하나시안은 이 도시에 1000억을 기부하겠다고 선언하는데, 단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젊었을 때 자신을 배신하고 거짓증언으로 마을에서 쫓겨나게 만들었던 옛 애인 알프레드를 죽여 그 시체를 내놓으라는 조건이다. 시민들은 ‘정의의 이름으로’ 이 제안을 거절하지만, 결국은 풍요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를 살해하는 데 집단적으로 가담하게 된다.

1000억과 옛 애인의 시체를 맞바꾸자고 하는 노부인의 제안은 그로테스크하기 그지없지만, 사실 그보다 더 그로테스크한 것은 이 제안을 받고 점차 변해가는 시민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정의의 이름으로’ 노부인의 제안을 거절하며, 동료인 알프레드를 지키겠다고 당당히 선언하지만, 어느새 알프레드가 어디로 도망가지는 않는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그가 스스로 죽어주기를 은근히 바란다. 그런가 하면 ‘약속된’ 1000억에 대한 기대감에 부푼 시민들은 생필품과 사치품 등을 끊임없이 사들이면서 알프레드를 죽음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다. 결국 그를 죽인 것은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이들 시민 모두인 것이다.

연극 <노부인의 방문> |두산아트센터 제공

연극 <노부인의 방문> |두산아트센터 제공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시민들이 알프레드를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가는 과정이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경제의 ‘후불식’ 소비패턴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아직 약속한 1000억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알프레드의 잡화점에 찾아와 이런저런 물건들을 끊임없이 사들인다. 그리고 대체 어떻게 값을 지불할 것이냐는 알프레드의 절규에 “달아놓으라”고 말한다. 시민들이 달아놓은 금액이 점점 커져갈수록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그들에게는 알프레드의 죽음이 더욱 절실하게 되고, 결국 이들의 소비욕망은 알프레드를 죽음으로 내모는 주된 동력이 된다. 이러한 시민들의 모습은 신용카드로 일단 소비욕망을 채운 뒤 그 돈을 갚기 위해 살아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이수인 연출은 원작의 강조와 축약, 반복을 통해 이 작품을 보다 압축된 형태로 무대 위에 올려놓았다. 모든 대사, 모든 장면을 다 보여주는 대신 특정한 대사와 장면을 임의로 선택하여 반복, 변주함으로써 그 상황이 갖는 다층적인 의미를 구현해내고자 한다. 예를 들면 극중 “표범이 도망쳤다!”고 외치며 사람들이 이를 잡으러 나서는 장면은 세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는 실제로 차하나시안 부인의 우리로부터 도망친 표범을 잡으러 가는 것이고, 이는 곧 젊은 시절 차하나시안 부인이 ‘표범’이란 애칭으로 불렀던 알프레드를 쫓는 죽음의 사냥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은 그들 마음 속, ‘검은 표범’과 같은 검은 욕망이 드디어 윤리와 도덕의 울타리를 뚫고 밖으로 뛰쳐나왔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경쾌하게 흘러가는 전반부에 비해 후반부가 좀 늘어지고 노련하지 못한 배우들의 연기가 극의 몰입도를 떨어뜨리는 면이 없지 않지만, 작품의 메시지를 간결하고 함축적으로 담아내고자 한 연출가의 의도가 느껴지는 무대다. 11월 12일까지, 두산아트센터.

김주연<연극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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