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 성북동을 떠나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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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성북동은 ‘한국 재벌가의 본산’으로 불린다. 내로라하는 갑부들, 특히 재벌가의 저택이 이 지역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성북동은 재벌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다. 성북동에 갑부들이 몰려 살게 된 배경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곳엔 조선시대 때 도성 수비를 담당하던 어영청의 주둔지가 있었다. 일제 시대에는 성북정으로 불리다가 해방 후 성북동이란 행정명이 붙었다.

서울 한남동 이건희 삼성회장의 자택. |박민규 기자

서울 한남동 이건희 삼성회장의 자택. |박민규 기자

이곳에 재벌가 사람들의 호화 저택이 들어선 것은 1960년대 중반 이후였다. 북쪽으로 북한산이 병풍처럼 서 있고, 서울 성곽이 부채꼴로 에워싼 성북동은 대부분 남향이어서 풍수적으로 명당으로 꼽혔다. 여기에 1968년 북악산길과 삼청터널이 개통되면서 도심과의 접근성이 높아져 부자들이 몰렸다고 전해진다.

1970년대 들어 성북동에는 삼성, 현대, LG 등 굴지의 재벌가 사람들이 줄지어 살았고, 주한외국대사의 관저들도 집중적으로 몰리면서 부자동네 명성을 쌓았다. 지금도 성북동 일대에는 유명 맛집이나 요정집이 유난히 많다.

하지만 요즘 들어 성북동을 떠나는 재벌가 사람들이 부쩍 많아지고 있어 눈길을 끈다. 재벌닷컴이 2005년부터 올해 3월까지 5년간 30대그룹 총수 일가족 391명을 대상으로 주소변경 내역을 조사한 결과 2005년 80명이던 성북동 거주자는 올해 69명으로 11명이나 줄었다. 여전히 서울에서 가장 많은 재벌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다른 동에 비해 이주 추세가 두드러졌다.

이곳을 떠난 재벌가 사람들이 새 둥지를 튼 곳은 서울의 신흥부촌인 강남구 청담동과 도곡동이다. 이 지역은 지난 5년 사이에 재벌가 사람들의 거주가 두 배로 늘어났다. 타워팰리스 등 대규모 호화 주거시설이 들어서면서 신흥부촌으로 부상한 도곡동은 2005년 12명에서 올해 23명으로 늘었고, 청담동은 5명이 늘어난 46명을 기록하면서 성북동, 한남동에 이어 세 번째로 재벌가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부상했다.

특히 청담동에는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과 딸 장선윤 블리스 대표,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 등 재벌가 딸들이 고급빌라나 아파트, 그리고 빌딩을 사들여 패션ㆍ외식사업을 하면서 ‘한국의 비버리힐즈’로 떠오르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조만간 청담동, 도곡동, 논현동을 중심으로 한 ‘강남 부촌’이 한국 재벌가의 본산이 될 날도 머지않았다.

최근 도곡동으로 이사를 간 재벌 3세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강북은 너무 시끄럽다”고 했다. 터가 좋아서도 아니고, 교통이 편해서도 아니고, 8학군 때문도 아닌 소음 때문이라는 말이 놀라웠다.

이유야 어쨌건 재벌가 사람들의 거주지가 바뀌는 것은 단순한 가십이 아니다. 그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감안하면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실제로 최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청담동에 땅을 사서 자택을 짓는다는 소식에 강남 일대 부동산이 들썩였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청담동과 압구정동 일대에 재벌가 딸들이 명품매장을 열었다는 소식에 인근 상권이 유명세를 타면서 골목 상가의 월세도 배나 올랐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나 재벌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워렌 버핏이 어디에 투자한다고 하면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 금융시장이 꿈틀댈 정도다. 그런 만큼 부자나 재벌가에겐 책임과 의무가 요구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의식이다. 하지만 한국의 상당수 부자나 재벌가는 그것이 2% 부족하다는 평가가 자주 나와 유감스럽다.

정선섭<재벌닷컴 대표> chaebul@chae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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