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온 ‘봄날’ 명연기의 설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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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길고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고, 알록달록 봄꽃들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시기가 왔다. 해마다 이맘때면 사람들은 곧 화사하게 피어날 봄꽃 생각에 이제나 저제나 마음 졸이며 길가를 유심히 살피게 된다. 매년 새로운 꽃이 피는 것도 아니고, 그동안 수십 번을 보고 또 보아온 풍경인데도 우리는 늘 봄꽃을 손꼽아 기다리고, 이미 알고 있는 그 모습에 새삼 감탄하곤 한다. 익숙한 풍경이지만 다시 봐도 새롭고 언제 만나도 반가운 마음, 그것이 봄꽃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심정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명배우의 무대를 기다리는 마음은 봄꽃을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다. 이미 그 배우가 얼마나 연기를 잘 하는지, 어떤 역할을 어떻게 소화하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그가 무대에 서는 그 순간이 한없이 기다려지니 말이다.

[문화내시경]다시 온 ‘봄날’ 명연기의 설렘

이강백 작, 이성열 연출의 <봄날>(3월 31일~4월 17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은 그렇게 ‘봄꽃 기다리듯’ 설레는 마음으로 배우를 기다리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미 2009년 서울연극제에서 같은 연출, 같은 배우의 무대를 충분히 보고 즐겼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무대에 오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극장으로 향하게 된 데에는 오현경의 아버지 역을 또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 1984년 초연에서 아버지 역을 맡았고, 지난 2009년 25년 만에 같은 역할로 무대에 선 오현경은 세월의 결이 담긴 원숙한 연기로 작품의 감동을 배가시켰다. 연극의 생명력이란 결국 배우에게 달려 있음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무대였다. 그 또렷한 기억이 2년이 지난 오늘, 또다시 <봄날>을 기다리게 만들었고 그는 이번에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봄날>은 삶과 죽음, 젊음과 늙음을 아우르는 인생의 순환을 시적으로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이강백의 우화적이고 함축적인 대사는 때로 말보다 긴 여운을 남기고, 커다란 무대 위에는 언덕길 아래 덩그러니 놓여진 초가집 하나가 은유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시적인 대사와 시적인 무대, 그 나머지를 채우는 것은 오로지 배우들의 연기뿐이다. 첫 등장에서부터 오현경은 무대를 꽉 채운다. 휘적휘적 걸어 내려오는 발걸음과 헛헛하게 내뱉는 대사만으로도 그는 ‘아버지’란 인물이 지닌 욕망과 허함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아들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에서도 그의 존재감은 또렷하게 부각된다. 덩치로 보면 두 배는 족히 될 장정들 사이에서 그는 조금도 위축되거나 왜소해 보이지 않는다. 작은 몸에서 뿜어나오는 에너지와 단호한 호통은 다 큰 아들 모두를 압도할 정도다.

오현경은 특히 화술과 발성에 있어 가장 모범적인 배우로 손꼽힌다. 억지로 큰 소리를 내지 않아도 그가 정확한 발음으로 내뱉는 대사들은 딱 들려야 할 크기로 관객의 귀에 꽂힌다. 쩌렁쩌렁 무대가 울리도록 소리를 질러대거나 웅얼웅얼 객석에 들리지도 않게 대사를 흘리는 배우들을 예사로 만나게 되는 우리 연극계에서 이렇게 또렷한 ‘무대 말’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다. 한편 떠나버린 아들들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을 간결하고도 절절하게 담아낸 그의 마지막 대사는 막이 내린 후에도 오랫동안 잔상처럼 여운을 남겼다. 세월과 연륜이 묻어나는 노배우만이 보여줄 수 있는 말의 깊이와 두께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연기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다른 배우들과 어우러지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명연기라 할 수 없다. 연기란 결코 혼자 완성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넉넉한 마음으로 동생들을 품어주는 큰 형(이대연 분)과 각자 개성을 뽐내면서도 한 덩어리로 똘똘 뭉쳐 노련한 앙상블을 보여준 다섯 형제들, 그리고 젊기에 누구보다 아픈 봄날을 맞이해야 했던 막내와 동녀(童女)에 이르기까지, <봄날>의 명연기를 완성한 것은 극단 ‘백수광부’ 배우 모두의 노력과 애정이었다. 각기 다른 색깔로 알록달록 피어나는 이들 배우가 있기에, 다시 찾아온 <봄날>은 올해도 봄꽃을 기다리듯 기분 좋은 설렘으로 다가온다.

글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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