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거부 ②해방 직후 최고갑부 박흥식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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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이후 등장한 거부(巨富)들은 서구식 자본주의가 도입되면서 설립한 기업의 성공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토착부호나 대지주 출신이 많았지만, 간혹 탁월한 경영능력으로 일약 ‘재벌’로 성공한 자수성가 기업인도 많았다. 구인회(LG),조홍제(효성),김연수(삼양사),김용완(경방),이원만(코오롱)은 대표적인 지방 대지주 가문 출신이었고, 이병철(삼성),이회림(OCI),이양구(동양),설경동(대한전선),장경호(동국제강)는 자수성가로 거부가 된 인물이었다. 

한국의 대표적 거부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한국의 대표적 거부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이들보다는 다소 늦지만 1950~60년대를 전후해 등장한 정주영(현대),김우중(대우),최종건(SK),김종희(한화)도 맨주먹으로 기업을 일궈 거부 대열에 오른 인물들이다.


지금은 잊혀진 재계의 별들
한국 재계 70년을 돌이켜보면 시기별로 수많은 거부들이 뜨고 졌다. 어느날 거부로 ‘스타’처럼 등장했다가 하루아침에 봄날 눈녹듯 사라져버린 인물도 많았다. 해방 직후 한국 최고 갑부로 불리던 박흥식(화신)을 비롯해 정재호(삼호), 이동준(개풍), 함창희(동립산업), 강석진(동명목재), 정규성(코스모스), 이준석(삼기물산), 김창원(신진자동차)은 지금은 잊혀진 거부들이다. 

이들 중 박흥식의 몰락은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였다. 평남 용강에서 태어난 박씨는 1926년 신문용지 수입업체인 선일지물, 화신백화점을 설립하면서 기업가로 변신해 막대한 부를 손에 쥐었다. 그는 당시 ‘금박명함’을 뿌려 일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화신은 해방 이후 일본 소니와 손잡고 전자업에 진출하면서 최정상에 올랐지만, 후발주자인 삼성과 LG의 연합군에 밀린 데다 막대한 투자를 감행한 섬유업이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끝내 몰락했다.

자유당의 2인자였던 이기붕의 후광을 업고 급성장했던 동립산업의 함창희는 부정축재자의 낙인과 장남의 연예인 스캔들로 침몰했고, 대구에서 면방업으로 거부가 됐던 삼호방직 정재호는 이병철의 제일모직과 맞먹었지만 10년을 못넘기고 무너졌다. 신진자동차 김창원은 해방 직후 대전이연이라는 피스톤링 제작회사를 세워 자동차 부품사업에 뛰어든 뒤 1964년 일본 도요타와 손을 잡고 자동차사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코로나, 새나라 등을 잇따라 선보인 그는 신용으로 막대한 금융지원을 받아 기계업, 철강업, 언론업, 건설업, 학원업으로 발을 뻗쳤지만 후발 기업인 현대와 기아의 등장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는 결국 삼성의 이병철을 찾아가 마지막 남은 회사인 신원개발을 넘긴 뒤 재계의 뒤편으로 쓸쓸히 퇴장했다.

이처럼 수많은 거부들의 몰락은 또다른 거부들이 탄생하는 밑거름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한국의 최고 거부에 올라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나 정몽구 현대차 회장은 냉혹한 기업전쟁에서 살아남은 승리자인 셈이다. 

앞으로 30년 뒤 한국 재계 100년을 넘길 시점에 누가 진정한 거부로 남아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과거 거부들의 흥망을 되짚어보면 시대의 흐름을 읽고, 한 발 앞서가는 선택을 한 인물들이 월계관의 주인공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정선섭<재벌닷컴 대표> chaebul@chae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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