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시린 무비컬 ‘빌리 엘리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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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

올 여름, 런던의 웨스트 엔드 극장가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무비컬들이다. 춤 선생 패트릭 스웨이지와 뽀글이 퍼머의 제니퍼 그레이가 달콤한 사랑을 펼쳤던 ‘더티 댄싱’, 금발 미녀의 하버드 법대 생활을 그린 ‘금발이 너무해’, 만화영화를 각색한 ‘라이언 킹’, 여장남자 가수의 이색적인 이야기를 그렸던 ‘프리실라’ 등이 각축을 벌이고 있다. 또 뮤지컬 ‘시스터 액트’에는 한시적으로 영화 주인공이었던 우피 골드버그가 직접 출연해 이목을 집중시키는가 하면, 오는 10월에 막을 올릴 ‘플래쉬 댄스’도 벌써부터 화제다. 가히 무비컬 전성시대다.

[문화내시경]가슴 시린 무비컬 ‘빌리 엘리어트’

하지만 근작 무비컬 중 가장 성공적인 사례를 손꼽으라면 역시 ‘빌리 엘리어트’만한 작품도 드물 것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것이 2000년이고, 무비컬이 등장한 것이 2005년의 일이니 꼭 5년 만에 콘텐츠가 다시 생명력을 얻게 된 셈이다. 재작년에는 미국에서 막을 올리며 토니상 주요 부문을 석권하더니, 올해부터는 우리말 무대가 시작되며 글로벌한 규모의 흥행몰이가 본격화할 추세다. 

사실 ‘빌리 엘리어트’는 화려한 뮤지컬이 아니다. 오히려 잔잔하고 다소 어두운 현실이 반영된 진지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한때 산업혁명을 주도하며 주요 에너지원으로 활용되던 석탄이 석유 등 대체 에너지에 밀려 뒤처지면서 나타나게 된 탄광촌 마을의 노사대립이 주요한 시대적 배경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철의 총리로 알려져 있는 마거릿 대처는 사실 영국 노동자들에겐 증오의 대상이다. 오른팔 격이었던 헤슬타인 장관과 함께 국유화된 탄광의 폐쇄를 저돌적으로 추진했기 때문이다. 극렬한 노사갈등으로 골치 아팠던 영국병을 치유하며 근대화를 이룩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늘 그렇듯 개발경제의 어두운 그림자는 노동자들의 생활을 더욱 궁핍하게 만들었다. 연탄이 석유와 도시가스로 대체되면서 겪어야 했던 우리 탄광 마을의 눈물 났던 사정들과도 크게 다를 바 없다.

[문화내시경]가슴 시린 무비컬 ‘빌리 엘리어트’

무비컬 ‘빌리 엘리어트’는 바로 그 아프고 가슴 시린 이야기를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눈으로 재구성해낸 작품이다. 알싸한 뒷맛의 비장미는 그래서 이 뮤지컬 감상의 묘미다. 이른바 사회적 리얼리즘의 예술적 구현인 셈이다. 비록 지어낸 이야기이긴 하지만 실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풍자의 매력을 담아냈다는 의미다. 빌리가 로열 발레 스쿨에 합격해 가족들이 환호를 지르는 그 순간, 사측의 승리로 끝나버린 오랜 파업이 절묘하게 교차되는 장면 같은 경우가 전형적인 사례다. 조명이 달린 탄부 모자를 쓰고 어두운 탄광으로 돌아가는 광부들의 모습과 새 출발을 위해 짐을 꾸려 떠나는 빌리의 모습이 교차될 때 묵직한 감동이 객석을 감싼다.  

비영어권에서 ‘빌리 엘리어트’가 그 나라 말로 번안돼 무대에 오르는 것은 우리나라가 최초다. 한국 공연가와 세계적인 수준의 시차가 조금 더 줄어든 것 같아 반갑다. 같은 영어를 쓰면서도 사회적 계급이 달라 소통되지 않는 사회적 모순이나 신분의 벽은 완벽하게 재연하지 못했지만, 사투리로 대체시켜 무대의 긴장을 이완시킨 노력에는 박수를 보낼 만하다. 특히 쉽지 않은 무대를 신통하게 메워가는 아이들의 춤과 연기에는 감동마저 느껴진다. 

뮤지컬의 압권은 편지가 나오는 두 개의 장면이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자세한 이야기는 전하지 못하지만, 손수건 없이 보기 힘들다는 말로 감동을 대신해본다. 반드시 보라는 권유는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내년 3월1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원종원<뮤지컬 평론가·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jwon@sch.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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