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그림이 모여 큰 그림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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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유 전>

김동유씨(45)는 ‘이중 초상화’로 유명해진 작가다. 150호짜리 대형 캔버스에 음영을 달리한 단색으로 덩샤오핑, 오드리 헵번, 리즈 테일러, 체 게바라, 엘리자베스 여왕 등 잘 알려진 정치인과 대중 스타의 초상을 그렸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 초상을 이루는 수백 개의 입자는 각각 마릴린 먼로, 그레고리 펙, 제임스 딘, 피델 카스트로, 다이애나 빈 등 작은 초상이다. 수많은 작은 그림들이 반복, 집적되면서 그것과는 다른 큰 초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코리안 팝’의 대표 주자인 김씨의 그림은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낙찰가 6억원을 기록했으며, 갤러리 거래 가격은 2억원 안팎이다. 그런데 이런 ‘이중 초상화’는 어떤 과정을 통해 탄생한 것일까.

세필로 이중 초상화를 그리고 있느 김동유 작가.

세필로 이중 초상화를 그리고 있느 김동유 작가.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에서 열리는 ‘김동유 전’은 잘나가는 상업화가 김동유씨의 작품 세계를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 작가로서의 궤적을 탐색한 전시다. 부제인 ‘지독한 그리기: figure 2 figure’는 그의 작업 과정을 요약한다. 미대생(목원대 회화과) 시절부터 구상 회화에 뜻을 두고 다양한 인물을 엄청나게 그렸으며,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로 변하는 이중성 역시 초기부터 견지해 왔다.

3개 층의 전시공간은 시간적 흐름에 따라 ‘구상연구’(1987~1998), ‘점 이미지’(1999~2004), ‘얼굴-오마주’(2005~2010)로 구성됐다. 3층부터 내려오면서 보면 시간 순서대로 볼 수 있고, 1층에서 시작하면 거슬러 올라가는데 아무래도 최근작부터 보는 게 좋다.

김씨의 이중 초상화는 인간의 신기루와 같은 꿈이나 헛된 세속적 욕망을 회화적 허구로 승화시킨다. 작가는 허구를 역사와 주체를 생산해 내는 동인으로 바라보고 이를 자신의 이중 초상화로 재현한다. 관객은 작은 마릴린 먼로를 바라보는데 이는 큰 덩샤오핑이 되고, 큰 리즈 테일러 속에는 수많은 제임스 딘이 들어 있다. 규칙과 불규칙, 반복과 잉여, 절묘한 완성으로서의 미완성 등이 김씨의 이중 이미지가 지향하는 목표다. 채 물감이 마르지 않은 최근작까지 망라된 이번 전시에서는 작은 그림을 모두 똑같이 그린 데에서 벗어나 작은 그림 자체도 계속 변화하면서 더욱 회화적 요소가 강해진 신작을 볼 수 있다. 예컨대 ‘해바라기&반 고흐’(앞이 큰 그림, 뒤가 작은 그림)에서는 다양한 연령대의 반 고흐 초상을 그렸고, ‘부처&정치인’은 다수의 정치인 초상이 모여서 부처를 이룬다.

[문화내시경]작은 그림이 모여 큰 그림이 되다

‘점 이미지’ 섹션은 이중 초상화의 전 단계에서 이뤄진 작업 시도를 보여 준다. 이 시기부터 작가는 작은 그림이 모여서 그와는 다른 큰 그림을 만들어 내는 기법을 선보인다. 특히 꿈과 허구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나비를 기본 요소로 채택해 ‘나비-보살’ ‘나비-불교’ ‘나비-이중섭’ ‘나비-유관순’ ‘나비-반 고흐’ 등을 그렸다. 점묘화처럼 그린 ‘대나무’ 시리즈도 있다.

초기 작품이 모여 있는 ‘구상연구’ 섹션으로 가면 유치하지만 작업의 단초를 제공하는 흥미로운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규칙적인 배열에 관심이 많던 작가는 계란판을 가져와 캔버스에 붙이고, 호랑이 얼굴에 여인의 얼굴을 겹쳐 놓기도 했다. 화폭을 자바라처럼 접어서 오른쪽에서 보면 대나무, 왼쪽에서 보면 호랑이가 나타난다. 박정희-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발행된 기념우표를 그린 그림에는 우리 대통령과 방한한 외국 원수의 초상이 나란히 놓여 이중 초상화의 맹아가 보인다.

충남 공주의 작가 작업실에서 오랜만에(어쩌면 처음으로) 외출한 옛날 작품들은 한 아이가 어떻게 어른으로 자랐는지를 보여 주는 빛 바랜 앨범처럼 전시장에 놓여 ‘지독한 그리기’의 역사를 증언한다. 4월 28일까지. (02)737-7650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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