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의 장사일거와 임중도원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비장한 각오로 맡은 ‘진보의 책무’

[신동준의 인물 비평]노회찬의 장사일거와 임중도원

‘박연차 리스트 수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수뢰를 둘러싼 ‘진실게임’ 공방으로 치달으면서 4·29 재·보선을 코앞에 둔 여야의 득실 계산이 분주하다. 열린우리당의 후신인 민주당은 성난 민심의 불길이 참여정부의 도덕성 문제로 연소(延燒)돼 회심의 ‘중간평가론’이 소실(燒失)되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모습이다. 한나라당도 ‘만사형통’의 이상득 의원과 대통령의 지우인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 등의 연루 의혹이 불거지면서 내심 당혹해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여야 모두 거액의 검은 돈을 덥석 받아 챙겼다는 점에서 볼 때 이번 재·보선은 정치권 전반에 대한 심판이 될 공산이 크다.

“진보는 말이 아닌 실천이 선행되어야”
과거 노 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을 ‘차떼기 정당’으로 몰아붙이며 자신들의 ‘슈킹(收金·의도적인 금전수취)’은 10분의 1도 안 된다는 식으로 스스로 합리화했다. 이번 사건은 ‘좀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는 모럴 해저드의 후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노 전 대통령은 ‘슈킹’의 정류장 역할을 한 친형을 두고 ‘시골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 운운하는 등 식언(食言)을 무시로 했다. 일각에서는 수천억 단위에 이른 이전 정권의 수뢰 사건을 들먹이며 소위 ‘좀도둑론’의 동정론을 펴고 있으나 설득력이 약하다. 최근 진보신당의 노회찬 대표는 ‘좀도둑론’을 이같이 설파(說破)했다.

“노 전 대통령이 만일 꼭 돈이 필요했다면 은행에서 당당하게 빌리고 이자를 내야 했던 게 아닌가. 전직 대통령으로서 한 점 의혹 없이 솔직히 털어놓는 게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최근 빚어진 민노총 간부의 ‘성추행 파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입만 열면 ‘서민’과 ‘노동자’를 들먹이는 진보 세력이 명실상부한 ‘진보’를 자처하려면 먼저 도덕적으로 ‘수구’보다 우위에 설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상황은 ‘진보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한 노 대표의 분석은 매섭다.

“진보의 위기는 기본적으로 진보운동을 주도해온 사람들의 편협한 인식과 부족한 능력, 시대착오적인 낡은 노선에서 비롯한 것이다. 진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말이 아닌 실천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가 당원들에게 ‘진보’의 정체성을 빼고는 모두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제로 민주신당은 민노총에 기대고 있는 민노당과 달리 더 낮은 곳의 비정규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 등의 서민을 대변하는 데 당력을 쏟아왔다. 최근 ‘귀족노조’의 비판을 받고 있는 민노총이 정치투쟁으로 일관하며 ‘성추행 파문’ 등을 일으킨 점에 비춰 시의적절한 행보가 아닐 수 없다.

3월 29일 서울 송파구민회관에서 열린 진보신당 전당대회에서 새 당 대표에 선출된 노회찬 대표에게 심상정 전 의원이 축하인사를 하고 있다. <김정근 기자>

3월 29일 서울 송파구민회관에서 열린 진보신당 전당대회에서 새 당 대표에 선출된 노회찬 대표에게 심상정 전 의원이 축하인사를 하고 있다. <김정근 기자>

원래 진보신당은 지난 대선 전후에 노도(怒濤)처럼 밀어닥친 ‘노무현 심판론’의 최대 피해자에 해당한다. 17대 총선 당시 ‘탄핵정국’에 편승해 일약 원내 10석의 제2 야당으로 부상했던 진보정치 세력은 지난해 18대 총선에서 민주당과 ‘한통속’으로 몰려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반 토막이 난 민노당은 그나마 체면을 유지했으나 진보신당은 단 1명도 원내로 진출시키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다. 그가 이번 재·보선에서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울산 북구에 전력을 경주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민노당과의 후보단일화 문제가 난항을 겪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진보신당의 현재 상황은 제갈량이 ‘출사표’에서 언급한 ‘존망지추(存亡之秋)’에 비유할 만하다. 그도 이를 잘 알고 있다. 대표 취임사에서 스스로 자신을 결전에 임하는 장수에 비유한 게 그 증거다.

“나는 다시 돌아올 기약도 없이 생환이 불확실한 전장으로 떠나는 장수의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다.”
전국시대 말기의 연나라 협객 형가(荊軻)가 부른 ‘역수가’를 방불하는 대목이다. 당시 진나라 군사가 연나라의 남쪽 경계를 흐르는 역수(易水·하북성 역현 남쪽 소재) 주변으로 진출하자 연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처지에 놓였다. 이는 18대 총선에서 참패한 진보신당의 신세와 사뭇 닮아 있다.

당시 마침 진나라에 인질로 있다가 도주해온 연나라 태자 단(丹)은 미구에 화가 닥칠 것을 크게 우려한 나머지 당대의 협객인 형가에게 진시황의 척살을 당부했다. 이는 지난달 말 당 대표 투표에서 당원들이 5인의 공동대표체제를 단독대표체제로 바꾼 뒤 98%의 경이적인 지지율로 그를 선출한 것에 비유할 만하다. <사기-자객열전>에 따르면 당시 태자 단을 비롯한 빈객들의 배웅을 받으며 역수가로 간 형가는 지우인 고점리의 축(筑) 연주에 맞춰 그 유명한 ‘역수가’를 불렀다.

바람은 소슬한데 역수는 차갑기만 하네 風蕭蕭兮 易水寒
장사 한 번 떠나니 다시 돌아오지 못 하리 壯士一去兮 不復還

사마천은 그가 부른 이 노래가 얼마나 비장했던지 곁에서 듣는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모두 하늘로 솟구쳤다고 기록해놓았다. 이후 ‘장사일거(壯士一去)’는 생환을 기약할 수 없는 전장으로 떠나는 장병을 뜻하는 고사성어가 되었다.

‘역수가’가 후대에 미친 영향은 심대했다. 대표적인 예로 현재까지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역사극인 <츄우신쿠라(忠臣藏)>의 소재가 된 소위 ‘아코번(赤穗藩)의 47의사(義士)’에 관한 일화를 들 수 있다. 에도(江戶) 막부의 5대 쇼군인 도쿠가와 쯔나요시(德川綱吉)가 재위하던 1702년 12월 15일 아침, 갓 잠에서 깨어난 에도 시민들은 전날 밤에 일어난 사건 소식을 접하고 대경실색했다. 아코번의 로오시(浪士·섬길 영주를 잃은 사무라이) 46명이 눈이 부슬부슬 내리는 한밤에 주군인 우에스기(上杉)의 원수인 키라 요시나카(吉良義央)의 저택으로 쳐들어가 그의 목을 벤 것이다. 이들의 협행(俠行)을 두고 세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때 쇼군의 정치고문인 무로 큐소(室鳩巢)가 이들을 형가에 비유한 시를 지어 이들의 사면을 강력 주장했다.

꽉 막힌 성문을 뚫고 들어가 형가를 무색케 만드니 關門突入蔑荊卿
역수의 찬바람 맞고 길 떠나는 장사의 심정이리라 易水風寒壯士情

그러나 조정의 허락도 없이 사사로이 영주의 목을 벤 이 사건은 사의(私義)와 공의(公義)의 충돌이라는 매우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이 문제로 고심할 때 ‘일본제왕학’의 비조인 오규 소라이가 절묘한 해법을 제시하고 나섰다.

“주군을 위해 원수를 갚은 것은 의롭다고 할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사적인 의리에 불과할 뿐이다. 사무라이의 예로서 참수(斬首) 대신 할복에 처하는 것이 가하다.”

내년 ‘경성대전’ 출전 각오 다져
사실 할복은 ‘사의’를 지킨 46의사의 명예를 살리면서 동시에 ‘공의’를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안에 해당했다. 이를 두고 ‘20세기 일본학계의 천황’으로 칭송된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일본정치사상사>에서 이같이 평해 놓았다.

“소라이는 동양 역사상 최초로 수제(修齊)를 앞세운 주자학의 ‘도덕주의’에 대해 치평(治平)으로 상징되는 ‘정치성의 우위’를 주장한 인물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존망지추’의 위기 상황에서 ‘장사일거’의 취임사를 한 그는 ‘수제’와 ‘치평’ 중 어디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일까.
흔히 위정자의 막중한 책무를 비유할 때 떠맡은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는 뜻의 ‘임중도원(任重道遠)’이라는 표현을 쓴다. <논어-태백>편의 해당 구절이다.

“사인(士人)은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임중도원’이기 때문이다.”
과거 성리학자들은 여기의 ‘임(任)’을 ‘덕업(德業)’, ‘도(道)’를 ‘수덕(修德)’으로 풀이했다. ‘치평’보다 ‘수제’에 무게를 둔 해석이다. 나름대로 타당하기는 하나 본래 취지는 ‘치평’에 있다.

현재 그가 떠맡은 책무는 진시황을 척살하거나 주군을 죽인 영주의 목을 베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 최근 그는 당원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내년의 ‘경성대전(京城大戰)’에 진보 세력의 대표주자로 출전할 각오를 밝힌 바 있다. 서울시장을 겨냥한 심상치 않은 질책이 이를 뒷받침한다.

“4500억 원을 들여 한강 노들섬에 오페라 하우스를 짓는다며 월급 70만 원의 산하 오페라합창단을 집단 해고하는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문화인가.”

‘임중도원’의 취지가 어디에 있는지 통찰한 언급이다. 그가 경성 입성에 성공할 수 있을지 여부는 ‘장사일거’의 취지를 ‘사의’가 아닌 ‘공의’로 승화시키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동준<21세기정경연구소장> xhindj@hanmail.net

신동준의 인물 비평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