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탓이오” 민주당 체질 개선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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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석의 죄기조서(罪己詔書)와 군자시중(君子時中)

[신동준의 인물 비평]“내 탓이오” 민주당 체질 개선 촉구

소위 ‘박연차 리스트’의 불똥이 산지사방으로 튀자 여야 모두 아연 긴장하는 분이기다. 그러나 겉모습만큼은 사뭇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공안탄압’ 운운하며 강력 반발하고 있는 민주당과 달리 한나라당은 수사 방향이 노무현 전 대통령 쪽으로 흐르는 양상을 보이자 내심 즐기는 듯한 모습마저 보이고 있다. 홍준표 원내대표가 “국회 활동을 핑계로 검찰 수사에 불응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방탄국회’에 미리 쐐기를 박고 나선 게 그 증거다.

정작 문제는 민생 관련 법안의 처리 여부가 극히 불투명한 데 있다. 여야 공히 우선처리를 공언하고 있으나 ‘박연차 리스트’에 이어 4·29재·보선까지 코앞으로 박두하고 있어 회기 내 처리를 장담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일각에서는 4월은 말할 것도 없고 5월 임시국회에서마저 미뤄질 공산이 크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그렇게 되면 ‘깽판국회’가 반 년 가까이 지속되는 셈이다. 여야 할 것 없이 대오각성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 아닐 수 없다.

칭송받는 영국 야당의 ‘메아쿨파’
최근 영국의 노동당과 보수당의 행보는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노동당의 브라운 총리는 지난해 말 금융위기가 터지자 재빨리 ‘친환경산업 성장’ 등의 대안을 제시해 국민들로부터 찬사를 받은 바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야당인 보수당의 캐머런 당수가 국민들 앞에 실수를 사과하고 나선 점이다. 그는 최근 뇌성마비로 요절한 어린 아들을 땅에 묻고 온 직후 한 의회연설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간 보수당도 경제 성장이 지속될 것으로 낙관해 기업과 은행의 부채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가는데도 사전경고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오늘의 경제 위기는 수십 년 동안 누적돼온 영국 경제의 기초체력 저하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며 번영을 구가했던 대처와 메이저의 보수당 정권에도 책임의 일단을 돌린 것이다. 이를 두고 외신들은 ‘메아쿨파(mea culpa·내 탓이오) 선언’으로 칭송했다. 일각에서 아들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비난이 나오기도 했으나 영국 국민들은 그에게 위로편지와 조화를 보내며 그의 결단을 높이 평가했다. 한 달여 전에 비해 지지율이 무려 17%포인트나 급상승해 60%에 달한 것으로 나타난 <더 타임스>의 여론조사 결과가 그 증거다. ‘메아쿨파’ 행보에 감복하는 것은 동서고금에 차이가 있을 리 없다.

동양도 ‘메아쿨파 선언’과 유사한 ‘죄기조서(罪己詔書)’와 ‘책회지교(責悔之敎)’의 전통이 있다. 과거의 잘못을 후회하며 자신에게 벌을 내린다는 뜻이다. 조선왕조는 중국과 달리 이를 발표하는 데 인색했다. 이는 하늘의 뜻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를 흉내내는 것이 불경스럽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태종은 비록 ‘책회지교’를 발표하지는 않았으나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고통을 받자 군신들이 보는 앞에서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태종실록> 15년(1415)의 해당 기록이다.

“가뭄이 계속되자 임금이 탄식하기를, ‘무슨 선하지 못한 일이 쌓여서 이런 재앙이 오는 것인가. 방문을 닫고 가만히 생각하니 살고 싶지가 않았다’며 눈물을 줄줄 흘리고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날마다 한 끼씩 들고 혹은 햇볕 가운데에 나가 앉다가 이내 이질에 걸려 심히 괴로워하다가 오래 뒤에 회복되었다.”

원래 군왕이 ‘죄기조서’를 발표하는 것은 자연재해조차 인화(人禍·인간이 만든 화난)로 인한 천견(天譴·하늘의 견책)으로 해석한 데 따른 것이다. ‘죄기조서’는 통상 과중한 부세(賦稅)로 백성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간신을 가까이 해 조정을 흐리게 하고, 무고한 백성을 함부로 죽이고, 유희에 빠져 정사를 멀리하는 등의 잘못을 범하지나 않았는지 자책하는 형식으로 꾸며졌다.

역사상 최초의 ‘죄기조서’를 지은 사람은 한무제다. 그는 소금과 철을 전매해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고, 위청과 곽거병 등을 파견해 흉노의 위협을 제거한 여세를 몰아 로마제국에 이르는 비단길을 개척하는 공을 세운 바 있다. 그러나 재위 후반에는 잦은 출정과 대규모 토목공사로 원성을 샀다. 결국 그는 전역(戰役) 중단과 민생 안정 등을 골자로 하는 ‘죄기조서’를 발표해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았다.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죄기조서’는 선황들의 죄를 뒤집어쓴 경우에 해당한다. 그는 중화의식에 얽매이지 않고 서양의 우수한 과학기술을 적극 수용한 황제다. 그가 즉위할 당시 명제국은 이미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시종 근검한 생활을 영위하며 선황들의 과오를 대신하는 ‘죄기조서’를 발표함으로써 백성들과 함께 다시 시작하겠다는 결의를 내비쳤다. 그 결과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경에 대포를 만드는 공장을 세워 마침내 성능이 뛰어난 대포를 1년에 20문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자성의 반란군이 북경을 함락시키자 이내 목을 매어 자결하고 말았다. 우매하고 방탕했던 선황들을 대신해 ‘죄기조서’를 발표하고 마침내 목숨을 끊은 셈이다.

우리 국민들은 충격적인 사건이 빚어질 때마다 대통령이 ‘부덕의 소치’ 운운하며 ‘책회지교’를 발표하는 모습을 무수히 보아왔다. 퇴임 이후 서로 손가락질하며 ‘투아쿨파(tua culpa·네 탓이오)’하는 볼썽사나운 모습도 수차례 목도했다. ‘깽판국회’의 공범인 여야의 공방도 이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 산하 민주정책연구원장으로 있는 김효석 의원이 최근 ‘메아쿨파’를 외치고 나선 것은 신선한 충격이다. 당이 환골탈태하기 전에는 재집권을 기약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미국서 박사학위 받은 민주당 정책통
“지금 10%대의 지지율이 굳어져가는 양상마저 보이고 있다. 정당도 시대정신에 맞게 진화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결코 시대를 이끌 수 없다.”

그는 부유층과 특권층까지 끌어안는 ‘모두를 위한 번영’을 필승의 기치로 내걸고 있다. 소위 ‘강남 때리기’에 열중했던 민주당으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배경 설명이다.

김효석 민주당 정책연구원장이 미국발 경제 위기에 대한 대응 방안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민규 기자>

김효석 민주당 정책연구원장이 미국발 경제 위기에 대한 대응 방안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민규 기자>

“민주당은 파이를 나눠먹는 데 관심이 많고, 한나라당은 파이를 키우는 데 관심이 많은 것으로 인식되면 이는 필패의 구도다. 민주당도 이젠 성장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 다만 성장만능주의의 한나라당과 달리 우리는 질 좋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

모두 함께 노력해 고도성장을 이룬 후 그 과실을 고루 나눠 갖는 새로운 성장 개념인 셈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중국의 공산당마저 대기업 CEO를 당원으로 맞아들이고 있는 상황에 비춰 만시지탄이 있다. 서울대 경영대를 거쳐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386의원들로 도색돼 있는 민주당 내에서 몇 안 되는 정책통에 해당한다. 강단에서 오랫동안 위기의 경영리더십을 가르친 전력이 이런 각성을 촉발시킨 것으로 보인다. 당의 향후 노선에 대한 언급이 이를 뒷받침한다.

“기존의 ‘민주평화개혁’ 구호만으로는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 정권을 잡으려면 중원(中原)을 장악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보혁 개념을 뛰어넘는 ‘신 중도개혁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그가 말한 ‘중원’은 극단적인 대결을 일삼고 있는 현재의 양당 구도에 실망한 수많은 무당파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신 중도개혁’ 역시 기존의 개혁 취지를 잃지 않는 가운데 중도에 뿌리를 내려 필승구도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나온 듯하다. 이는 <중용>에서 말하는 ‘군자시중(君子時中)’의 취지에 부합한다. 일찍이 공자는 군자와 소인의 비유를 통해 ‘중도’의 진정한 의미를 이같이 풀이한 바 있다.

현상 유지와 머뭇거림은 패망의 길
“군자의 ‘중용’은 군자의 모습을 취하는 까닭에 시중(時中·때에 맞음)하나, 소인의 ‘중용’은 소인의 모습을 취하는 까닭에 멋대로 한다.”

‘수시처중(隨時處中)’의 줄임말인 ‘시중’은 천변만화하는 외부의 변화에 응해 최상의 선택을 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의 ‘자강불식(自彊不息)’과 <대학>의 ‘수제치평(修齊治平)’과 맥을 같이 하는 말이다. 이를 두고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중용강의보>에서 이같이 설명했다.

“<중용> 전체가 비록 천명에 근거하고 있지만 그 도는 모두 인도(人道)이다.”
주희가 천도(天道)의 입장에서 <중용>을 해석한 것과 달리 통치는 오로지 인간의 문제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인간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낸 공자의 인문주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사실 ‘인도’를 ‘천도’에 종속시킬 경우 ‘민주평화개혁’ 등의 이념에 얽매여 정작 중요한 민생을 소홀히 할 소지가 크다. 조선조의 사대부들이 공허한 성리학 이론에 함몰돼 끝내 국가패망을 자초한 게 좋은 예다.

<주역>에도 ‘군자시중’과 유사한 언급이 나온다. 때와 장소에 따른 임기응변(任期應變)이 그것이다. <주역>은 구체적인 방안으로 크게 ‘자수(自修)’과 ‘쾌단(快斷)’을 들었다. ‘자수’는 불리한 시기를 만나면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학덕을 연마하고, ‘쾌단’은 유리한 시기를 만나면 속히 결단하여 전진하는 것을 뜻한다. ‘자수’ 및 ‘쾌단’과 반대되는 ‘인순(因循·현상 유지)’과 ‘유예(猶豫·머뭇거림)’는 패망의 길이다.

사실 민주당 수뇌부는 여권의 거듭된 실착에도 불구하고 계속 10%대의 붙박이 지지율에 머물고 있는 배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인순’과 ‘유예’에 머문 후과이다. 천지만물은 끝없이 변전하는 까닭에 앞으로 다가올 변화에 대비해 ‘자수’와 ‘쾌단’의 행보를 멈춰서는 안 된다.

민심무상(民心無常)은 천지만물의 변전을 반영한 것이다. 집권은 민심의 향배에 따라 결정되는 까닭에 위정자가 ‘민심무상’을 좇아 스스로 발분하지 않는 한 이를 성사시키기가 쉽지 않다. 그 요체가 바로 ‘군자시중’이다. 혹여 ‘인순’과 ‘유예’에 머물지라도 한나라당이 ‘노무현 심판론’에 편승해 너끈히 집권한 것처럼 장차 반사이익을 챙길 수 있다고 기대한다면 이는 착각이다. 국민들이 또 다시 유사한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기 때문이다.

신동준<21세기정경연구소장> xhind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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