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균 열린우리당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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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시켜주면 어떤 일이든 잘 합니다”

‘난세 돌파’로 정치력 입증한 ‘복장’… 미소 뒤의 개혁성향 언제쯤 빛볼까

[유인경이만난사람]정세균 열린우리당 의장

세상에서 가장 요란한 모 초등학교. 같은반 학생들끼리도 서로 잘났다고 소리지르고, 옆반 아이들과도 툭하면 싸우고 성적은 점점 떨어져 학교는 물론 동네에서도 한숨을 내쉬는 ‘꼴통’ 학급. 담임을 맡은 선생님마다 반 아이들 성적이 뚝뚝 떨어지거나 각종 대회에 나가 줄줄이 낙선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 교장선생님까지 ‘인연을 끊자’는 듯 냉정해지자 조숙한(?) 표정의 반장이 담임대행을 맡게 됐다. 그게 겨우 두 달 전 일이다.

차분하고 늘 방긋방긋 웃는 얼굴의 담임대행은 풀죽은 학생들을 다독거리고, 반 분위기가 안 좋다고 투덜거리거나 교장 흉보는 학생들에게는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군기를 잡기도 하고 “우리가 처음에 한 반을 만들었을 때의 마음을 생각해보라”며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들과 한마음이 되어 그동안 통 풀지 못했던 과제물을 척척 해결하자 교장선생님은 “이제야 학급이 잘 돌아가고 학생들도 내 말뜻을 알아듣는 것 같다”며 흡족해했다. 반면 성적이 올라가고 상을 휩쓸던 옆반 담임은 학생회 안건 처리에 불만을 품고 아이들을 이끌고 엄동설한에 야외학습을 나가고, 반장은 자기가 무력해 그런 일이 일어났다며 반장자리를 내놓았다. 꼴통반 학생들은 2월에 새 담임이 오신다는데도 “그냥 담임대행이 쭉 학급을 맡았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한단다.

시사패러디 같은 비유이지만 정세균 열린우리당 의장은 이 학교의 담임대행 같다.

국회 내 최고의 ‘땅(?)부자’

최근 대한민국에서 가장 추락한 인물이 황우석 박사라면 가장 돋보인 인물 중 한 명은 정세균 의장이다. 사학법 개정 등 정국을 주도하면서 ‘난세를 돌파한 리더십‘을 보여줘 정치역량을 과시했다. 동료들에 대한 칭찬에는 인색한 정치인들조차 “정세균 의장이 이렇게 당과 정국을 멋지게 요리할 줄 몰랐다”며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정작 본인은 주변사람들에게 “워낙 최악의 비상상태에선 주변에서 힘을 몰아주게 마련”이라며 “나는 복과 운이 따르는 복장(福將), 운장(運將)”이라고 했단다. 매우 겸손한 표현인 듯하지만 지장(智將), 용장(勇將), 덕장(德將)을 능가하는 것이 복을 타고난 복장이니 최고수란 자신감이기도 하다.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지지도는 바닥을 쳤고 “이대로 가면 재집권 희망없다”(임종석) “야당을 못할 이유가 없다”(유시민) 등 자조 섞인 말이 나올 만큼 열린우리당은 위기였다. 그런데 정 의장 비상체제에 들어선 후 난항이 예상됐던 쌀협상비준동의안이 통과되고 행정복합도시특별법에 대한 헌재의 합헌 판결까지 났고 16대 국회 이래 지지부진 끌어오던 대표적 개혁입법 처리를 완수했으니 스스로 ‘복장’이라고 주장할 만하다.

[유인경이만난사람]정세균 열린우리당 의장

게다가 그는 여의도 국회에서 제일 커다란 영토(?)도 장악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원내 대표와 당의장을 동시에 맡고 있어 당의장실, 원내 대표실을 혼자 독차지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사용하던 뜻깊은 자리에서 속으로 ‘정말 복이 많다’고 되뇌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것 같다.

정세균 의장은 3선의원이긴 하지만 계보를 거느린 보스 스타일도 아니고, 유난히 대통령과의 돈독한 친분을 과시하는 것도 아니다. 국회 단상에서 몸싸움을 벌이거나 독특한 이벤트로 눈길을 끈 적도 없다. 굳이 특징을 꼽는다면 3년 연속 정치부 기자들이 선정해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가 주는 ‘가장 신사적인 의원’에 뽑혀 백봉신사상을 받은 것 정도다. 군기반장 역할을 하면서도 별명이 ‘포스코 정치인’이란다. ‘소리없이 세상을 바꾼다’는 포스코의 광고 카피를 정 의장의 조용한 당운영에 비유해 붙여준 것.

“우리당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죠? 이젠 저만 아니라 당원 모두 자신감이 좀 생긴 것 같습니다. 처음에야 규율과 질서가 필요해 듣기 싫은 소리도 했는데 정면에서 반박하지 않고 수용하는 분위기여서 힘을 얻었습니다.

일단은 ‘내 탓이오’로 시작하는 게 옳습니다. 우리당이 국민지지도가 떨어졌고 욕을 먹게된 이유는 모두 우리 탓이라고 인정하자고 했지요. 요즘 여론조사가 얼마나 과학적 기법으로 하는데 그걸 무시합니까. 그 다음에 국민들이 뭘 원하는지 파악하고, 우리가 개선할 점을 찾아 노력했습니다. 금산법의 경우에도 온 국민의 관심사이니 집권여당으로 우리당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 당론 채택을 하자고 했지요.”

주변에선 그가 동료들로부터 사랑받는 비결로 ‘수평적 리더십‘을 꼽는다. 당 의장, 원내 대표란 무게감으로 누르거나 무조건 가르치려 들지 않고 눈높이를 맞춰 상대방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주고, 대화에 참여시켜 결국 설득해 동의를 얻어낸다는 것이다. 그 살벌한 정치판에서 방긋방긋 웃으면서 ‘지도력’을 인정받다니 진정한 고수가 아닌가. 지나가는 행인의 코트를 벗기는 것은 매서운 바람이 아니라 따스한 햇볕이란 걸 그는 몸으로 보여준다.

그의 또 다른 별명은 ‘미스터 스마일’이다. 목젖이 보일 만큼 크게 입을 벌려 소리지르거나 격앙된 표정의 정치인에 익숙해서인지 이렇게 곱게, 자연스럽게 웃는 모습이 너무 신기해 ‘언제부터 그렇게 웃었냐’는 한심한 질문을 했다.

[유인경이만난사람]정세균 열린우리당 의장

“백만불짜리 미소지요.(의문문이 아니라 확신에 찬 단언이다) 제 고향이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입니다. 운장산 밑자락, 사방이 산이고 고개 들면 하늘만 보이는 깊고깊은 산골에서 산토끼와 뛰놀면서 자랐어요. 제 미소는 꽃, 나무, 개울, 구름, 산토끼 등 자연과 친하면서 몸에 밴 무공해 미소랍니다.

처음 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때, 정치인은 좀 무게도 있고 근엄해야 할 것 같아서 선거용 포스터 사진을 찍을 때 엄숙한 표정을 지었어요. 그랬더니 벽에 붙은 포스터 사진과 저를 비교하던 유권자들이 ‘실물이 더 나은데 왜 저런 사진을 썼냐’고 하더군요. 16대 때는 근엄한 모습, 웃는 모습으로 각각 찍었는데 다들 웃는 사진을 선택하더군요. 웃항상 웃고 또 웃는 게 어울린다고 미스터 스마일라는 별명도 붙여주고요. 그동안은 하도 우리당 분위기가 좋지 않아 제대로 웃지도 못했는데 이제야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고 웃을 수 있어 다행입니다.”

토끼와 뛰놀던 순박한 소년이 어떻게 정치인이 되었을까. 그는 ‘주변에 워낙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 그들을 잘 살게 해주는 정치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인권변호사가 되어 정치에 입문할 계획으로 고대 법대에 진학했지만 유신헌법으로는 고시공부를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무역회사에 입사했단다.

재벌과 정치판에서 지켜낸 ‘청렴’

쌍용그룹 상무로 퇴직하기까지 18년 동안 재벌그룹에서 근무했던 그는 15대 국회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불합리와 부패’의 대표적인 상징인 ‘재벌’과 ‘정치판’에서 30년 가까이 생활했으면서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성실성과 청렴성’이다.
1997년, 정치권이 한보의 검은 돈으로 쑥대밭이 되어가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한보돈을 거절한 정치인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한겨레신문은 ‘떳떳한 정세균은 기뻐라’란 제목의 기사에서 “정치 입문 때부터 대가성이 없더라도 음성적인 돈은 받지 않겠다고 한 결심을 실천했을 뿐”이라는 그의 말과 함께 “정 의원의 집에는 지역구민들과 일반시민들의 격려전화가 끊이지 않아 비맞은 중 꼴인 다른 정치권과는 대조를 이뤘다”는 내용을 전했다. 아마도 그가 두메산골에서 바라본 푸른 하늘, 들이쉰 맑은 공기, 산토끼의 눈빛이 그에게 청정한 마음과 정신이란 예방주사를 놓아준 듯하다. 생활신조도 성실과 겸양이란다.

정치 입문 후 그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불리며 주요직책을 도맡았다. 민주당 기회조정위원장 정책위원장을 비롯, 국가비전 21본부장, 노사정위원회 상무위원장, 노무현 후보 경제특보 등을 거쳐 현재는 당 의장과 원내대표를 독식(?)하고 있지만 그의 실력과 정치력에 시비를 거는 이들은 드물다.

원내대표도, 당 의장도 무혈입성했다. 원내대표는 단독출마했고 당 의장 역시 만장일치로 추대되었다. ‘새우 싸움에 터진 고래등을 조용하게 잘 치유했다’(열린우리당 한광원 의원의 표현)는 찬사를 받으며 두 달 동안의 당 의장 역할을 멋지게 소화해냈다.

물론 얼굴은 미소짓고 있지만 몸과 마음은 바빴단다. 하루 3, 4시간만 자면서 계속 당원들이나 관계자들을 만나 듣고, 대화하고, 설득하고, 동의를 얻어 어려운 난제들을 풀어갔다. 의원총회에 성실하게 출석한 의원들에게는 개근상 격인 ‘깜짝상’을 수여하며 감사와 격려도 잊지 않아 당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상대 당에 대한 미소작전도 잃지 않았다. 12월 30일 원내대표직을 사임한 한나라당 강재섭 의원에게는 “저보다 정치 선배로 후배들에게 귀감을 보여준 훌륭한 정치인”이라고 추켜세우고 임태희 수석부대표에게는 “신망있고 애국심 갖춘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한나라당 의원”이라고 극찬했다. 물론 그래 놓고도 사학법 개정 후 국회를 떠난 한나라당에 “부부가 싸워도 식구들 밥상은 차려놓고 싸워야 하는데 정치를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라고 호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고 실력을 인정받는 정 의장도 주변의 평가에 대해 억울해하거나 오해받는 점이 있을까. 그렇다고 했다.

“제가 상당히 개혁적인 사람인데 그렇게 안 봐줘서 섭섭합니다. 항상 변화를 추구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모험심도 있고 늘 바꿔보고 연구하거든요. 출근할 때도 이 길로 가봤다가 다른 길로 가봤다가 길도 바꿔보고, 식당에 가서도 항상 새로운 메뉴에 도전해보고…. 그런데 저를 우유부단하거나 심지어 아주 보수성향으로 보는 이들이 많더군요. 늘 웃고 있어서 그런지 아무리 ‘쎄게’ 말해도 꿈쩍도 않는 이들도 많고요. 허허.”

그렇다면 남들이 모르는 약점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비밀이에요, 그걸 왜 알려줘요”라고 했다. 우문현답이다. 하도 해맑게 미소짓고 있어서 그가 정치인이란 걸 깜빡 잊었다.

지난 연말을 멋지게 장식했지만 정세균 의장의 새해는 매우 복잡할 것 같다. 원내대표 임기종료일인 1월 24일까지 단 하루도 더 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초선의원들이 모임을 갖고 ‘원내대표 선거를 전대 이후로 하고 정 의장이 그때까지 원내대표를 맡아달라’고 건의했다. 다시 대표로 추대하겠다는 뜻이지만 본인은 ‘임기를 지키겠다’는 입장이다.

또 지방선거에서 전북지사로 나가냐는 질문에는 ‘절대 안 나간다’고 못을 박으면서도 재경 관련 장관이나 경제부총리 등의 입각설에 대해서는 잔잔한 미소로 이렇게 말했다.

“지방선거는 자의로 출마를 결정하는 것이지만 피선택 대상인 장관은 제 의지로 되는 게 아니죠. 저는 원래 김칫국부터 마시는 스타일은 아니고, 어떤 자리를 얻으려고 애쓰지도 않았지만 일단 시켜주면 어떤 일이든 잘 합니다.”

겸손하게 웃으면서 절대 자기자랑은 잊지 않는 정세균 의장. 열린우리당의 상처를 평화롭게 치유한 실력으로 허덕이는 우리 경제도 잘 해결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그는 스스로 ‘복장’이라고 주장하니 어느 자리에 있건 그의 복이라도 좀 분양해주었으면 좋겠다.

<글/유인경 편집장 alice@kyunghyang.com >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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