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으로 할 말은 하고 살아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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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에 고위 행정관료로 명성… 퇴직 후엔 가업 이어받아 장수기업 투명경영

[유인경이만난사람]“어른으로 할 말은 하고 살아야지요”

하지만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84)은 요즘 도처에서 “한 말씀만 해달라”는 요청이 끊이지 않아 “제발 말 좀 시키지 말라”고 애원할 정도다. 상장회사협의회 회장을 비롯, 30여개 단체를 이끄는 박 회장은 최근에 경영자총연합회(이하 경총) 세미나에서 ‘식초 예찬론’을 펼쳐 이젠 식초건강법까지 전하느라 바쁘다. 세미나에서 ‘내 나이가 84세지만 48세라는 기분으로 살고 있으며 술도 잘 마시고 아무리 바빠도 피곤을 느끼지 않고 검은머리를 유지하는 비결이 매일 식초를 먹기 때문’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경총에서 부탁한 주제는 ‘투명 경영’이었어요. 몇번이나 거절했는데도 샘표가 역사가 제일 오랜 브랜드고 비자금도 한푼 없는 없는 회사니 내가 꼭 말해야 한다고 해서 참석했죠. 주어진 80분동안 경영이야기만 하면 지루할 것 같아 나중에 식초이야기를 덧붙였데 완전히 주객이 전도되어서 ‘투명경영’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안 나오고 완전히 식초판이 됐어요”

최근 피부과에서 실시한 피부조직·탄력도·위치 테스트에서도 피부연령이 50대 후반으로 나온 박회장은 외모는 물론 목소리, 자세, 대화법까지 전혀 팔순 노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3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하며 솔직히 그저 듣고 받아 적는 것만으로도 식초뿌린 푸성귀처럼 시들시들해졌는데 매일 식초를 마신다는 박회장은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하고서도 조금도 지친 기색이 아니었다.

[유인경이만난사람]“어른으로 할 말은 하고 살아야지요”

원조 ‘행정의 달인’ 민속촌 건설 주역

“보고는 몰라요, 들어서도 몰라요. 맛을 보고 맛을 아는 샘표 간장. 빛깔을 보세요, 향긋한 냄새 입맛을 사로잡는 샘표 간장~”

중년층 이상은 누구나 흥얼거릴 만큼 귀에 익은 샘표 CM송. 샘표식품은 1946년, 광복 이듬해 일본인이 경영하던 삼시장유양조장을 창업주 박규회 회장이 인수해 지금의 대한극장 맞은편인 중구 충무로 79번지에 문을 연 장류(醬類) 전문기업이다. 함경도가 고향인 박씨 일가는 광복과 함께 남하, 당시 식산은행(현 산업은행)에 다니던 박승복 회장의 퇴직금이 선친이 양조장을 인수한 밑천이었다.

25년간 하루 3번씩 그 시디신 식초를 달게 마셨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박회장은 매우 특이한 경력의 경영인이다. 올해 한국경영인협회가 선정하는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 상을 수상할만큼 대표적인 경영인이지만 그의 과거사는 무척 복잡하다.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원으로 출발, 민간인으로는 최초로 정부에 징발되어(?) 재무부(현재 재정경제부) 총무과장으로 재직하다 4·19 때 은행으로 돌아왔다. 은행총재를 꿈꾸었지만 1965년에 다시 재무부 기획관리실장으로 옮겼고 정일권 총리의 거듭된 권유로 총리실 정무비서관(1급)으로 일했다. 1976년 아버지가 작고하면서 가업을 잇기 위해 그만두기까지 정일권 총리와 4년 반, 백두진 총리와 6개월, 김종필 총리와 5년 등 무려 10년 동안 3명의 총리를 모셨다. 국정전반을 총괄하는 행정조정실장으로 탁월한 업무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후배들로부터 ‘행정의 달인’이란 평가를 받았다. 요즘 대권후보로 뜨는 고건 전 총리보다 먼저 ‘행정의 달인’이 됐던 셈이다.

“행정업무는 각 부처가 연관이 있어 자기 부처 이익만 강조하다보면 서로 충돌하기가 쉽죠. 행정조정실장이란 자리가 모든 부처에서 일어나는 일을 조정하는 일이어서 의견을 수렴하고 결론을 내려 지시전달할 때 질서정연하게, 차례차례, 합리적으로 해결했더니 그런 평가를 했나봅니다. 금융인, 경영인 등을 두루 경험했지만 관료 생활이 제일 어려웠어요. 총리실에서 일할 때는 1월 1일, 단 하루만 쉬었고 김종필총리 시절엔 새벽 6시부터 자정까지 일해서 하루에 4시간 정도밖에 못잤습니다. 요즘 외국관광객이 몰리고 드라마 세트로 이용되는 용인민속촌도 김 전 총리의 아이디어예요”

강남개발을 시작하며 김종필 총리는 민속촌을 구상했단다. 외국관광객이 와도 제대로 보여줄 것이 없으니 한국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여줄 역사의 현장을 ‘마을’로 만들자는 것. 너무 멀면 안 되니 서울 근교에 1만평 정도 땅을 마련,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자고 했단다. 땅을 마련하자 청와대 비서실장이던 이후락씨가 찾아와 자기가 주관하겠다고 나서서 맡겼다. 청와대에서 직접 챙긴다니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그러다 이씨가 청와대를 그만두자 그동안 참고 있던 건설부를 비롯, 소방서·군청·경찰 등 도처에서 들고 일어났다. 당시 건축법으로는 초가를 지을 수 없어 다 헐어야 했고 주차장을 짓기 위한 시멘트 역시 운반 도중 사라지는 경우가 많아 불난 호떡집처럼 난리였다. 결국 ‘민속촌은 국가에 이익이 되고 중요한 관광자원이 될 것이니 계획대로 추진하기로 설득하고 관계기관이 ‘국무총리의 지시 각서’를 받아 민속촌이 무사히 탄생했다. 그곳에서만 만들어 팔던 막걸리 역시 그가 술도가 허가를 내줘 가능했던 일이다.

또 당시에 관용차량에는 ‘관’이란 글자가 적힌 자동차 번호판을 붙이고 다녔는데 권력층은 별도의 자가용 위장번호판을 갖고 바꿔 달고 다니기도 했다. 그래서 신문에 ‘관용차량이 술집에 주차’ 등의 기사가 자주 실려 그가 국무총리에게 보고드리고 어느날 갑자기 일시에 폐지해 무적차량을 숱하게 적발했다. 그 무렵엔 서울시도 총리 감독하에 있어 서울시 예산심의도 했는데 서울시장이 대통령에게 ‘감독이 너무 엄해 일하기 힘들다’고 고자질(?)할 정도였단다.

최근 재건축 등으로 값이 폭등한 강남 반포주공아파트는 분양 당시엔 너무 안 팔려서 전세라도 끌어들여야 했다. 그는 주공 부사장 부탁으로 3채나 전세를 얻었고 다른 국장급 공무원들 역시 억지로 구입해서 살 만큼 인기가 없었단다. 멀쩡히 잘 살던 집은 동생에게 주고 직접 그 아파트에 살면서 도로나 파출소와 학교 등 주민에게 필요한 공공시설을 설치케했는데 1년 후 전세기간이 끝났다고 나가라기에 할 수 없이 구입했다. 곧 환경이 좋아져 42평형이 760만원이던 아파트값이 폭등, 그걸 팔아 성북동에 주택을 지었다. 지금 같으면 부동산투기로 구설수에 올랐을 텐데 그때는 무사했을까.

“당연히 투서가 들어갔죠. 관리들은 의혹도 받고 시샘도 받으니까요. 그럴 줄 알고 처음 구매 사유부터 완벽히 계약서와 영수증 등을 첨부해서 제출했지요. 공무원은 항상 깨끗하고 당당해야 해요. 공무원 시절엔 아버지가 집사람에게 생활비를 따로 주셨어요. 아들이 청백리로 살기를 바라시는 마음에 절대 돈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주신 거죠. 선친께 청백리 정신과 근검절약의 생활태도를 배웠습니다”

항상 헌 달력 뒷면에 메모를 하던 선친을 따라 박회장은 지금도 달력 뒷면과 지난해 일지의 뒷장, 이면지 등을 활용한다. 장남인 박진선 사장(56)에게도 자신이 타던 1996년형 자동차를 물려줘 무려 40만㎞를 타고서야 얼마전에 바꿨다. 간장공장집답게 정말 짜다.

[유인경이만난사람]“어른으로 할 말은 하고 살아야지요”

TV광고에 최초로 등장한 CEO

박승복 회장은 남들이 은퇴할 55세에 샘표식품에 입사했다. 은행원과 관료출신인 그가 간장, 된장에 대해 뭘 알까 우려도 많았지만 그는 서울 창동에 있는 1만5000평 크기의 공장을 구석구석 다니면서 현장을 파악하고 장맛도 익혔다. 1985년 일부 영세업체가 불량원료를 사용해 ‘간장파동’이 터졌을 때 그는 CEO로서는 최초로 TV광고에 출연, “우리 공장에 한번 와보세요. 샘표간장은 아무 문제가 없으니 안심하고 드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공장견학은 샘표의 가장 중요한 행사로 자리잡았다.

그 역시 다른 길을 걸었지만 아들 박진선 사장, 맏손자인 용학 씨도 마찬가지다. 박사장은 서울공대 전자공학과 출신으로 스탠포드에서 석사,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따고 철학교수로 있다가 1988년, 기획실장으로 샘표 직원이 됐다. 전산화작업 및 한국 장류와 소스의 세계화가 그가 추진하는 일들. 맏손자 용학 씨(25)도 컴퓨터공학을 전공후 현재 미국에 유학중이다. 젊은 시절,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세상을 읽는 눈을 키운 후에 본인이 원하면 가업을 잇게 할 뿐 강요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샘표식품은 1946년 창업 후 2004년까지 만든 간장은 1ℓ들이 용기 기준으로 15억병. 올림픽 규격의 수영장 750개를 채울 수 있는 분량이다. 한국인 1명이 먹는 간장이 1년에 1ℓ들이 1병반인데 한국인 2명 중 1명은 샘표 간장을 먹을 만큼 샘처럼 끝없이 간장과 우리 고유의 장류를 만들어왔다. 지난 59년간 ‘무차입 무적자 무분규’ 등 3무실적이 이 회사의 자랑이다.

젊을 땐 고위관료로, 나이들어서는 선친에게 물려받은 탄탄한 기업의 회장으로, 또 말년엔 존경받는 경영인으로 건강하게 지내는 박승복 회장. 또 상장협회회장이나 총리실 직원들의 모임인 국총회 등 맡은 자리마다 재선, 삼선 등 장기집권을 하는데도 종신제를 하라고 권할 만큼 신망도 두텁다. 무엇보다 84세에도 40대처럼 건강하고 바쁘니 축복받은 삶이 아닌가.

“아유, 내가 죽을고비를 6,7번이나 넘긴 사람이요. 1938년에 일본 수학여행갔을 때 기차에 미처 타기 전에 문이 닫혀 질질 끌려가다 죽을 뻔했던 것을 비롯해 38선을 3번 넘나들면서 가족을 데려오느라 고생했고, 타고 있던 버스가 전복하거나 미군 트럭에 치여 다리뼈가 부서지는 등 사고가 참 많았어요. 또 6형제 중 장남인데 제대로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내 월급으로 가족들이 먹고 살았고 서울에 와서는 17번이나 이사를 했지요. ‘구루마’에 짐을 실어 아버지가 끌고 내가 밀고… 그때나 지금이나 마음가짐은 똑같아요. 항상 욕심을 버리고 성실하게 살자는 겁니다.”

박회장은 동년배 어른들에게도 ‘할 말은 하고 살자’고 강조한다. 어른으로, 인생선배로 아랫사람들의 잘못도 지적하고 교훈도 주자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자기 가족들에게부터 할 말을 하기로 했단다. 그래서 자신의 지난 삶을 담은 회고록도 쓸 생각이다. 아들인 박사장이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아버지의 삶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고 해서 용기를 냈단다.

인터뷰 내내 박승복 회장은 아주 해맑고 즐거운 표정으로 방실방실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건강과 행복한 삶의 비결은 간장도, 식초도 아닌 그 달디단 미소 덕분인 것 같다.

박회장 건강의 비결은 식초

박승복 회장은 매일 3번, 식후에 식초를 물에 타서 마신다. 맥주컵 3분의 1 정도를 식초로 채운 뒤 물을 타서 마시면 피로가 풀리고 과음 뒤에도 정신이 맑아진단다. 84세의 고령에도 와인 반병 정도는 거뜬히 마시고 30개 관련단체에서 왕성하게 일하는 건강비결이 ‘식초‘ 덕분이라는 것. 식초는 사과식초 등 발효식초가 좋고 섞는 물이 시원하면 신맛이 덜하며 토마토주스에 타 마시면 마시기 쉽다는 것이 그의 체험담이다.
박회장이 식초예찬론자가 된 것은 1980년. 일본에 출장갔을 때 일본인 친구가 ‘아무리 술을 마셔도 식초를 먹으면 숙취도 없고 고혈압·치매도 예방해준다’며 식초가 만병통치약이라고 권해서다.

평소 술을 좋아해 만성위염 등 술병에 시달려 이 내과 저 병원 등을 순례하던 그는 귀국해서 식초를 마셔봤다. 한두 달은 도저히 먹기 힘들어 먹다말다 했고, 쉬다가 다시 도전해 3개월 만에 효과를 봤다. 퇴근 무렵의 피곤함이 없어지고 몸이 산뜻해졌다. 헹구는 물에 식초를 섞어 세수했더니 피부도 매끈해지더란다.

인류 최초의 조미료인 식초를 약처럼 복용하는 이가 늘고 있다. 미국 장수지역인 버몬트에선 식초에 꿀을 타 마시기도 하고, 일본에서는 소금 대신에 식초로 간을 한다. 식초는 90%가 물이지만 구연산 성분이 몸에 쌓인 피로물질인 젖산을 분해해 피로를 풀어준다.

또 강력한 살균작용으로 헬리코박터 등 위 건강에 해로운 세균을 죽이고, 포만감이 증가되어 다이어트 효과도 뛰어나다는 것이 전문가들 분석이다.

그러나 보통 식초의 초산 농도는 5~6%로 위가 약한 이가 그냥 마시면 위벽이 상하므로 반드시 물에 타서 마셔야 한다. 최근에는 샘표가 아닌 청정원, 해표 등에서 ‘마시는 식초‘를 시판, 식초붐과 함께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글/유인경 편집장 alice@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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