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해야 할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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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노란봉투법(노조법 제2·3조 개정안), 국민연금 개혁 등을 촉구하는 시민들이 차린 농성장 / 박하얀 기자

지난 5월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노란봉투법(노조법 제2·3조 개정안), 국민연금 개혁 등을 촉구하는 시민들이 차린 농성장 / 박하얀 기자

결혼을 앞둔 애인과 살림을 꾸린 지인이 탁상시계를 하나 샀다. 사고 보니 실제 시간과 따로 노는, 어딘지 엉성한 시계였다. 애인은 사도 왜 이런 걸 샀냐고 면박을 줬다고 한다. 당시 화원을 운영하는 이들에게는 비수기가 지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려 최저가 제품을 온라인으로 구매한 것이라고 지인은 털어놨다. 마음이 상한 그는 얼마 뒤 울고 있는 애인의 뒷모습을 봤다. 그 모습이 가여웠다고 했다. 불쌍해서 사랑하고 사랑하니까 불쌍하다고, ‘가련한 마음’에 대해 지인은 말했다.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건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귀해진 시대라는 생각이 부쩍 든다. 타인이 처한 상황을 접하고 동정심만을 느끼고는 자신과는 철저히 분리하는 ‘타자화’가 비판받아 왔다면, 이제는 이런 마음을 갖는 것마저 기대하기 어려운 때가 온 것 같다. 특히 민의를 대변해야 하는 정치인에게 더욱더 그러하다.

21대 국회는 1만6000건이 넘는 민생법안이 폐기된 채 문을 닫았다. 17년간 이어온 논의 끝에 좌초된 연금개혁안을 비롯해 구하라법, 모성보호 3법 등이 폐기된 주요 법안으로 거론된다. 이 밖에도 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법안들이 윤석열 대통령의 책임 회피, 여야 의원의 정쟁 속에 발이 묶였다. 헌법재판소가 위헌 또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하며 개정을 요구한 법 35건(지난 5월 1일 기준)도 처리되지 않았다. 헌재가 2019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형법상 낙태죄의 경우 개정 시한을 3년 반 가까이 넘겼다.

사안이 한창 언론의 주목을 받거나, 적정 규모의 인력이 조직돼 있어 정당과의 대화 창구를 모색할 여지가 있다면 그나마 ‘주요 법안’으로 다뤄지곤 하지만, 법안의 당사자인 시민 대다수는 자신들의 목소리가 입법부에 가닿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과로사 예방법, 스토킹처벌법 개정안, 장애인평생교육법, 외국인 아동의 출생등록에 관한 법률안 등 노동자·여성·장애인·이주민 같은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딛고 마련된 법안이 얼마나 많은가. 관련 법안은 소수자들의 희생이 있고 나서야 발의되는 경우가 상당한데 국회 논의 과정에서 이들은 또 한 번 소외된다.

여야는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다. 민생법안이 줄줄이 폐기된 직접적 원인으로는 여당이 채 상병 특검법 방패막이로 상임위원회를 보이콧한 행태가 지목된다. 여야가 사실상 합의했거나 이견을 보이지 않은 법안들까지도 상임위가 열리지 않으면서 폐기됐다. 하지만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이 불거지기 전에도 국회의 시간은 있었다. 21대 국회에서는 총 2만5849건의 법률안이 발의됐지만, 법안 처리율은 36.6%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이른바 홍보용으로 법안을 발의해 놓고 처리되도록 조정에 힘쓰지 않는 의원은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국민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나마 복원됐으면 한다. 법안 하나하나에 서린 국민의 아픔을 직시했으면 한다. 심화한 여소야대 국면에서 갈등이 있다면 회피하지 않고 협의를 통해 풀어가는 모습을 정치인들이 보여주기를 바란다. 민주주의의 길은 대통령, 강성 당원들에 있기보다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여느 얼굴들에 있을 것이다.

<박하얀 기자 whit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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