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만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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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1872년, 캔버스에 유채,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요람’(1872년, 캔버스에 유채,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이제 한국에서는 도심이나 주택가에서도 아이들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정부는 인구 절벽을 해소하기 위해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육아 휴직을 손쉽게 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많은 출산 장려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현금 1억원을 주는 회사도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를 낳지 않는다. 저출생은 사회 문제를 넘어 한국이라는 나라의 존폐의 갈림길에 세워놓고 있다. 1억원에 잠시 흔들려 아이를 낳아 볼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아이를 낳는 순간 남성보다 여성이 육아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보니 긴 인생에서 돈보다는 일상의 자유를 더 꿈꾸게 된다.

전통적으로 육아는 여성의 몫이었다. 아이를 낳는 순간 사회는 한 인간으로서의 인생보다는 어머니의 책임과 의무만 강조한다. 특히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에게 육아는 최악의 환경이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이를 조부모나 어린이집·유치원에 맡기는 것, 먹이고 입히고 교육하는 것 등을 알아서 해야만 한다. 사회나 가정이나 여성에게 모성애만 강조하는 것이다.

베르트 모리조(1841~1895)의 ‘요람’(1872) 역시 여성의 모성애를 강조하고 있는 작품이다.

한 여성이 한 손으로 커튼 가장자리를 만지며 요람에서 잠들어 있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여성은 검은색 줄무늬와 레이스로 장식된 옷을 입고 있고 목에는 초커 목걸이를 하고 있다.

레이스 장식이 있는 드레스는 그가 부르주아 여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초커 목걸이는 19세기에 유행했던 아이템이다. 그림 속 여성이 유행에 민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요람과 가리개 커튼은 고급 취향의 육아용품으로 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낸다.

여성의 뒤에 커튼이 반쯤 걷혀져 있는데, 이는 밖에서 활동하고 싶어하는 여성의 마음을 암시한다. 이 여성은 모리조의 언니 에드마 퐁티용이다. 에드마는 화가였는데 인상주의 화가 마네의 친구인 해군 장교와 결혼하면서 화가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가정과 육아에 전념한다. 요람에 누워 있는 아이는 6개월 된 둘째 딸 블랑쉬다.

에드마 뒤에 젖혀진 커튼은 독립적으로 화가의 길을 걸었던 그의 과거를 암시하는 장치로 동생 모리조는 결혼해 가정에 전념할 수밖에 없는 언니의 삶을 안타까워했다. 에드마와 달리 모리조는 화가로서 경력을 쌓았고, 예술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그의 일을 지지한 마네의 동생 외젠과 결혼해 가정과 일 모두 성공한다.

모리조는 1874년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가한 유일한 여성으로 ‘요람’을 비롯해 총 아홉 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중 ‘요람’은 당시 비평가들로부터 가장 많은 호평을 받았다.

이 작품에서 요람을 가리고 있는 얇은 커튼은 외부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려는 장치이자 아기를 향한 어머니의 강한 모성애를 의미한다.

출산하는 순간 애국자의 길을 걷게 된다고 사회는 말을 한다. 하지만 여성들은 애국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육아에서 남편은 그다지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다. 애국자가 되기보다는 그저 ‘나’이고 싶은 것이다.

<박희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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