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정상과 증상…상처 직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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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이상한 나라의, 사라>·<살아남은 자를 수선하기>,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아빠>·<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아빠> / 다아트 제공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아빠> / 다아트 제공

연극 <이상한 나라의, 사라>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유경오

연극 <이상한 나라의, 사라>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유경오

‘병은 소문내라’는 말이 있다. 치료법을 찾는 과정을 통해 같은 처지의 환우들과 동병상련을 나누기 위해서다. 치료는 병을 직시하고 통증과 진지하게 마주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정상’과 ‘증상’ 사이, ‘낙인’과 ‘표식’ 사이에서 방황한다. 증상을 인정하지 않고 환자라는 낙인을 두려워하며 작은 병을 큰 병으로 키우는 경우는 흔하다. 특히 마음과 뇌에 문제가 생기면 전문 병원을 찾는 것부터 큰 장벽이다.

조현병 엄마를 돌봐야 하는 고등학생 사라의 고백과 방황을 담은 연극 <이상한 나라의, 사라>(원인진 작·최치언 연출)는 수많은 질문으로 시작된다. 조현병은 유전인가요? 치료하면 나아지나요? 완치도 가능한가요? 언뜻 보면 우문(愚問) 같지만 ‘병을 소문내지 않기로 한’ 대다수가 겪는 두려움의 실체다. <이상한 나라의, 사라>는 영상 이미지를 곁들인 렉처 퍼포먼스(Lecture Performance·강연 형식의 공연)를 통해 속 시원한 현답(賢答)을 내놓는다. 조현병 스펙트럼은 유전이라 확정할 수 없다. 환자 친족과 일반인 발병률은 비슷하다. 작품에서는 “사과가 반이나 남았네? 반밖에 안 남았네!”의 문제라고 비유한다. 치료하면 정상적인 생활도 가능하다. 혈압이나 당뇨처럼 관리가 중요하다는 것에 방점이 있으며, 이 ‘관리’는 전적으로 환자 가족의 몫이다.

뮤지컬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 / 공연제작소 작작 제공

뮤지컬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 / 공연제작소 작작 제공

뇌과학적·심리학적 접근이 필요한 우울증과 경계성 인격장애도 마찬가지다. 뮤지컬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조윤지 작·연출, 김승민 작곡)는 이를 ‘간증쇼(병을 이겨낸 경험을 증언하듯 설명하고 시연하는 토크쇼)’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풀어냈다. 청소년 사라가 조현병 엄마 돌봄 노동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과는 반대로 작품 속 환자 키키는 방치된다. 통증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하니 병은 날로 증폭된다. 정신병원에 6개월 입원하고 12가지 약을 먹어도 키키의 엄마는 감기 같은 거라고 축소한다. 스스로 병원을 찾아다니며 ‘경계성 인격 장애’ 진단을 받은 키키는 그동안 시달린 불안정, 섹스 과다, 난폭운전, 자해 등이 병임을 확인하고 나서야 편안해진다. 키키가 설명하는 경계성 인격장애는 “정서적인 피부가 모두 벗겨져 화염방사기가 불을 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작품 속 앙상블들은 “아 따거 따거”를 반복하며 키키의 통증을 안무와 넘버로 감각화 한다. 관객들도 함께하는 통증 체험 구간이다.

작품은 변증법적 치료에 임하는 키키의 변화에 주목한다.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는 키키의 심신 상태는 넘버들에 담겼다. 악화 과정에서는 분노에 휩싸인 속사포 같은 랩으로, 호전될 때는 주위를 배려하고 이성을 유지하려는 명징함으로 표현된다. 연애를 시작하고 취직해 장기근속하며 일상을 유지하는 키키는 자해 충동이 일 때마다 얼음을 움켜쥔다. 무해한 통증으로 다스리는 대안적 치료 방법이다. 실제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인 키라 밴 겔더의 자전적 소설 <키라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를 원안으로 조윤지 연출이 개인적 경험을 녹여낸 작품이다.

마무리는 키키의 병을 인정한 엄마와의 관계 개선이다. 한판 거하게 싸우고 서로의 문제를 인정하며 화해하는 이 장면은 다른 손님들이 여러 팀 있는 레스토랑 장면으로 연출됐다. 키키와 엄마(혹은 아빠)의 언쟁에도 불구하고 옆 테이블 손님은 계속 코믹한 동작으로 웃음을 유발한다. 관객이 지나치게 신파에 빠져들지 않도록 분산시키는 연극적 연출이다. 환자와 가족의 고통과 슬픔이 기반인 소재인 만큼 감정 몰입을 조절하고 객관화하도록 끌어올리는 연출은 관련 작품들에서 필수다.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 프로젝트그룹일다 KIM ILDA 제공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 프로젝트그룹일다 KIM ILDA 제공

시한부 말기 암 아버지를 돌보는 작가 딸의 이야기를 다룬 <이상한 나라의 아빠>(강보영 작·이석준 연출·이주희 작곡) 역시 신파를 경계한다. 루이스 캐럴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모티브로 주인공인 아빠와 딸 외에 도도새, 체셔 고양이, 시계 토끼 등이 등장해 지리멸렬한 가족 간병 노동에 판타지를 더했다. 대화 하나 없던 가부장적 아버지의 시한부 삶을 딸이기에 돌봐야 하는 설정은 답답하기 그지없다. 간병하느라 꿈을 실현할 기회까지 갈아 넣은 딸의 고뇌는 암세포가 뇌로 전이돼 19세로 돌아간 아버지를 마주하면서 판타지로 거듭난다. 시인이 꿈이었던 청년 시절 아버지를 이해하면서 딸은 새로운 작품의 영감을 얻어 아버지의 청년 시절을 작품 속에 담아낸다. 시한부 아버지를 잃은 슬픔보다 아버지의 꿈을 이해하고 발견한 기쁨에 주목한 작품이다.

슬픔을 승화하는 통증은 어떤 병증보다 아프다.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임수현 번역·민새롬 연출)는 친구들과 서핑하고 돌아오다 교통사고로 뇌사 상태가 된 19세 시몽의 장기기증 24시간을 다룬다. 경중을 두지 않고 20명 가까운 등장인물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일종의 군상극(群像劇·ensemble cast)이다. 마일리스 드 케랑갈의 동명 소설을 1인극으로 각색했다. 뇌사에 이른 19세 청년 시몽의 역동하는 심장과 공여받는 50대 환자의 꺼져가는 심장, 아들의 체온을 느끼며 장기기증을 결정해야 했던 시몽 부모의 오열과 장기기증 코디네이터의 객관적이고 정중한 태도, 장기 적출하는 의사, 심장 이식하는 의사, 시몽의 친구들과 연인 등 100분 동안 펼쳐지는 수많은 관계자의 숨 가쁜 24시간을 1명의 배우가 표현하려면 어느 한 캐릭터의 감정에 길게 머물 수 없다.

관객은 분절적인 감정의 호흡을 감각으로 치환한다. 이 작품의 오프닝은 긴 암전 속 거대한 심장 박동 사운드와 공연장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파도 이미지다. 서퍼인 시몽이 탔을지도 모르는 파도 영상은 심장으로 대변되는 거대한 생명 에너지다. 아들의 뇌사를 인정하고 장기이식에 동의하는 부모의 아픔보다 거대하게 밀려오고 밀려 나가는 생명 에너지의 숭고함에 관객들은 말문이 막힌다.

오프닝과 엔딩의 긴 암전 속 온몸이 울리는듯한 심장 박동 소리는 관객들 스스로가 얼마나 귀한, 에너지 넘치는 심장 그 자체인지 자각하게 이끈다. 잔잔한 통증과 아픔, 병을 대하는 각자의 편협한 가치관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서로의 상처와 통증, 서로 다른 ‘표식’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존중하는 것은 척박한 현대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다. 최근 다양한 미학적 실험을 통해 본격적인 마음 치유와 치료를 제안하는 무대극이 줄을 잇는 이유다. 뮤지컬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는 2월 25일까지, 연극 <이상한 나라의, 사라>와 뮤지컬 <이상한 나라의 아빠>는 3월 3일까지.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3월 10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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