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이웃집 토토로>·뮤지컬 <겨울왕국>
“연극 <이웃집 토토로>(이하 토토로)와 뮤지컬 <겨울왕국>이 너무너무 궁금해요.” 언제부터인가 중2 아이가 노래를 했다. 수많은 명작 라이선스 무대극이 한국에 상연됐지만, 두 작품은 언제 들어올지 소식이 없다. ‘연뮤덕(연극과 뮤지컬을 매일 관람하다시피 하는 마니아)’ 아이와 전쟁을 멈추기 위해 매일 함께 공연 보기를 택한 필자도 궁금한 공연이다. 사춘기 절정 소녀와 갱년기 막바지 ‘다시 소녀’인 필자의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와 함께 세계 공연계의 양대 산맥인 런던 웨스트엔드는 무대극 마니아들의 성지로 불린다. 세계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뮤지컬 <레미제라블>·<마틸다>·<라이온 킹>·<위키드>·<백 투 더 퓨처>·<해밀턴>, 연극 <해리포터, 저주받은 아이> 등은 수십 년에서 5년 이상 웨스트엔드 장기 상연에도 항상 매진이었다. 연극 <토토로>와 뮤지컬 <겨울왕국>은 최신 공연이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원하는 날짜가 전석 매진이었다. 공연장 홈페이지와 몇몇 티켓 예매처에 매일 들어가 손에 땀을 쥐는 기다림 끝에 겨우 관람할 수 있었다.
<토토로>는 전쟁 이후 1950년대 초 시골로 이사 온 네 살 메이와 열두 살 사츠키가 바쁜 아빠와 아픈 엄마 대신에 숲의 정령 토토로와 교감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1988년 개봉된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표작으로 연극은 애니메이션을 거의 그대로 재현한다. 제목 ‘Totoro’에 검댕이 인형들이 눈을 깜빡이며 드나드는 무대 오프닝부터 똑같다. 애니메이션 마니아들이 다수인 듯한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가 잇따를 만하다. 막이 열리니 애니메이션과 비슷한 이삿짐 트럭이 등장인물들을 꽉 끼게 태우고 등장해 웃음이 피어 나온다.
재기발랄한 연극적 재현에 배꼽 잡고 웃으며 극에 빠져드는데 조금씩 의아해진다. 그림자 조종자들이 점점 많아질 즈음이다. 카제고 인형조종자(Kazego Puppeteer·이하 조종자)로 명명되는 이들은 수많은 세트와 인형을 조종한다. 극 초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오래된 시골집에 서식하는 검댕이들과 메이의 만남이다. 벽 틈에서 무럭무럭 등장하다가 메이에게 들켜 하늘로 날아올라 가는 수많은 검댕이는 검은 옷과 망사를 뒤집어쓴 조종자들이 조작하는 작은 인형들이다. 장이 바뀔 때마다 오래된 시골집은 조종자들에 의해 레고처럼 변신한다. 병원이나 학교, 혹은 토토로가 드나드는 숲속 아지트로도 변신한다.
거대한 토토로와 미니어처 토토로들, 마당에 풀어져 있는 가축들도 조종자들 몫이다. 거대하고 포근한 초대형 토토로 인형 위에 메이가 올라가 통통거리며 노는 명장면은 조종자들이 거대한 토토로 인형을 여러 부위로 나눠 조합한 결과다. 버스 정류장에서 잠든 메이를 업고 우산을 든 사츠키 옆에 나뭇잎 우산을 들고 나란히 서 있는 토토로 역시 그러하다. 연극 <토토로>의 진정한 주인공 토토로는 장면에 맞는 크기별로 여러 버전이 구비돼 있다. 작게는 3~4명, 많게는 20명이 훌쩍 넘는 인형 조종자들에 의해 살아 움직인다. 이들은 극 중 자연의 일부와 지형물이 되기도 한다. 2막에서 오이와 토마토를 따는 장면이나 실종된 메이를 찾기 위해 논밭과 저수지를 탐색하는 장면도 농작물과 나무, 물로 변신한 인형 조종자들의 활약이다. 디지털 특수효과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아날로그 방식의 자연 친화적인 <토토로> 세계관을 실천하는 정령들이라고 해석할 만하다.
무대는 10여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자리한 숲속 2층과 무대 전체를 오르내리며 노래하는 가수, 아래층에 있는 주요 출연진과 출연자보다 많은 조종자로 일사불란하다. 조종자들이 토토로를 움직이고 있음이 보이지만 관객들은 개의치 않는다. 토토로가 메이와 사츠키를 싣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장면은 미니어처 풍선 인형으로 대체됐음에도 유치하다고 실망하지 않는다. 35년이 넘게 세계에 퍼진 단단한 마니아층과 히사이시조의 음악이 생명력을 불어넣은 웅장한 라이브 연주 속 무대는 토토로 그 자체였다.
인형의 정교함, 조작의 유연함과 함께 조종자들 스스로 이야기 안에 스며들기 시작하자 관객들이 느끼는 어색함도 사라진다. 그림자 같은 조종자들은 이제 자의식을 갖고 자기들끼리 티격태격한다. 관객들의 웃음 포인트가 메이와 사츠키, 토토로의 사랑스러움에서 조종자들의 움직임으로 옮겨가는 순간이다. 연극 <토토로>가 애니메이션 <토토로>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체성을 갖는 지점이기도 하다.
엘사와 안나의 자아찾기를 다룬 디즈니 애니메이션 원작 뮤지컬 <겨울왕국>에도 인형 조종자가 등장한다. 바로 울라프다. 뮤지컬 <라이온 킹>처럼 인형 탈을 쓰거나 연극적으로 재해석한 한 배우가 연기할 거라 상상했는데 의외로 울라프는 인형 그 자체로 등장한다. 연극 <토토로>처럼 조종자와 함께 등장하는 고전적인 인형극 방식이다. 만년설로 만들어진 울라프는 안나의 친구가 되어 작품 전체에 활기를 넣어주는 감초 역할을 한다. 눈사람이니 불 옆에 있으면 녹아내리기도 하고 눈·코·입이 뒤바뀌기도 한다. <겨울왕국>의 세계관을 전달하고 관객들이 추위를 감각하게 돕는 상징적인 존재다.
울라프의 조종자는 <토토로>처럼 인형 조종만 하는 것이 아니다. 노래하고 춤을 추는 배우가 조종까지 하는 어려운 역할이니 난해한 장면은 기교가 필요하다. 대사와 노래, 연기하는 장면에서는 울라프와 조종자 배우가 짝으로 나온다. 울라프가 분해되는 장면에서는 검은 막이 중간에 등장하면서 울라프 조각들이 얹힌다. 울라프와 관련해 뮤지컬 <겨울왕국>은 마술쇼 같은 한편의 고전 인형극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엘사가 흑화하면서 변신하는 애니메이션의 명장면은 뮤지컬 <겨울왕국>에서도 하이라이트다. 무대 아래와 양옆에서 얼음이 솟아오르며 엘사 의상이 잠자리 날개 같은 섬세한 여왕 드레스로 순식간에 바뀐다. 탄성을 자아내는 것은 비주얼 특수효과와 무대예술의 힘이다. 마음을 움직이는 명장면은 새로이 각성한 엘사와 이를 응원하는 안나의 연대 장면으로 20여명 앙상블이 모두 등장한다.
유명 애니메이션 원작 무대극을 찾는 관객으로서 가장 궁금한 것은 인간이 아닌 캐릭터들이 어떻게 구현되는가이다. 연극 <토토로>와 뮤지컬 <겨울왕국>은 이 가장 중요하고 예민한 지점을 인형극으로 풀었다. 인형극은 재미없다고 기억하는 중2 ‘연뮤덕’ 아이는 메이와 사츠키, 안나와 엘사로 분한 배우들의 열연 이상으로 토토로와 올라프에 생명을 불어넣은 조종자들의 열연에 감탄한다.
이런 시도들은 영상예술과 특수효과로 점철된 한국 공연예술을 돌아보게 한다. 세계적인 공연 제작사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토토로)와 디즈니(겨울왕국)가 수년간 기획해 내놓은 최신 작품들에 아날로그를 극대화한 인형극을 응용한 부분이 의미심장하게 와닿는다. 영국 런던 바비칸 극장에서 <토토로>는 올해 3월 23일, 로열 드루리 레인 극장서 <겨울왕국>은 올해 9월 8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