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지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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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식 ‘토론의 즐거움’ 대표

정주식 ‘토론의 즐거움’ 대표

2월 초 제3지대 4개 세력의 통합으로 개혁신당이 창당됐다. 잡음이 이어지며 일부 세력이 이탈했지만, 각종 논란으로 차지한 보도량만 본다면 이미 양당제를 무너뜨린 것 같다. 참여자 각각의 색깔은 다르지만 양당 정치의 폐해를 끝내겠다는 대의명분만큼은 일치한다. 이들은 국민의힘·민주당의 적대정치와 진영주의를 한목소리로 규탄한다. 두 기성 정당의 몰상식한 정치행태를 생각할 때 힘이 실리는 주장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거대 양당을 향한 이들의 비판이 양당 정치체제 자체가 아닌 양당이 보여준 ‘태도’에 머문다는 점이다. 이 당이 앞으로 누구를 위한 정치를 펼 것인지, 양당의 정치철학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들을 수가 없으며, 양당의 분할을 보장하는 선거제도에 대해서도 별 불만이 없다. 구체적 정책으로 들어가면 더욱 아리송하다. 저 당 안에는 윤석열 정부의 노동정책을 비판했던 노동운동가도 있고, 반대편에서 재벌의 이익을 대변해온 사람도 있다. 장애인 지하철 집회를 비난했던 사람도 있고, 지지했던 사람도 있다. 개혁보수를 하겠다는 사람도 있고, 새로운 진보를 하겠다는 사람도 있으며 자유주의를 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개혁신당은 곤란한 질문에 답하는 대신 양당의 행태를 비난하며 ‘태도’로 승부하겠다고 한다. 한마디로 이들이 표방하는 것은 ‘품성정당’이다. 이 당 정치인들이 양당 정치인들보다 얼마나 나은 품성을 보여줬는지도 의문스럽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정당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더욱 의심스럽다. “봉합된 우정보다는 드러난 적대가 낫다”는 니체의 말은 이런 경우를 가리킨다.

개혁보수, 진보, 자유주의… 제각각인 이들이 양당정치를 끝내겠다는 이유로 제3지대에 모였다. 밖으로는 한동훈·이재명과 싸우고 안으로는 자기들끼리 싸운다. 한국에서 제3지대 정치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애초에 ‘그런 지대’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모를 때는 계속 말을 하는 것이 좋다. 어쨌거나 양당 정치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거듭 호소한다. 맞는 말이지만 아무 말도 아니다.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 말을 한다. 밖으로는 한동훈·이재명과 싸우고 안으로는 자기들끼리 싸운다. 각종 논란은 안전한 피난처다. 말을 멈추면 들어야 하고, 들으면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두려운 질문들을 피할 수 있고, 내용 없음을 감출 수 있으며 무엇보다 끊임없이 말을 하다 보면 자신의 문제를 잊는다는 장점이 있다. 이 당의 최대의 위기는 모든 소모적 분란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그러면 자신들이 진짜 해야 할 말을 요구받을 테니까.

한국에서 제3지대 정치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애초에 ‘그런 지대’가 없기 때문이다. 정치사에 등장했던 제3지대 정당들은 기존 체제에 저항하는 세력이라기보다는 양당의 불만 세력들이 만든 파생정당의 성격이 짙었다. 이번 총선에 등장한 제3지대 세력 역시 사람들의 격분을 공회전시키는 데서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새로울 게 없다. 서로를 알리바이 삼는 양당과 달리 양당을 알리바이 삼는다는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한국 정치에서 의미 있는 제3지대는 양당 체제 바깥에 있다. 기후, 젠더, 돌봄, 평등… 그곳에 아직 낡은 정치가 포괄하지 못한 정치의 지평이 있다. 진정한 의미의 제3지대는 아직 열리지 않았다.

<정주식 ‘토론의 즐거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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