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영조는 “개가 왜 짖냐”…정조는 잠자리서도 ‘탕탕평평평평탕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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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량의 ‘삽살개’ 그림에 쓴 영조의 어제시. 짖는 입과 혀의 모양 그리고 옆으로 누운 귀, 바짝 곤두선 털, 치켜든 꼬리… 삽살개가 눈앞에서 사납게 짖어대는 듯하다. 이 어제시는 사납게 짖는 삽살개가 제 본분을 잊고 자기 당의 이익만을 위해 떠드는 붕당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개인소장·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김두량의 ‘삽살개’ 그림에 쓴 영조의 어제시. 짖는 입과 혀의 모양 그리고 옆으로 누운 귀, 바짝 곤두선 털, 치켜든 꼬리… 삽살개가 눈앞에서 사납게 짖어대는 듯하다. 이 어제시는 사납게 짖는 삽살개가 제 본분을 잊고 자기 당의 이익만을 위해 떠드는 붕당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개인소장·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탕탕평평…’. 국립중앙박물관이 영조 즉위 300주년을 맞아 개최 중인 특별전의 제목이 좀 ‘쨍’ 합니다.

영조(재위 1724~1776)와 정조(재위 1776~1800)가 ‘탕탕’하고 ‘평평’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펼친 ‘탕평’과 관련된 특별전입니다. 영·정조가 탕평책을 쓰면서 글과 그림을 통해 소통했던 방식을 한번 들여다보자는 것이라 합니다.

이 특별전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삽살개’가 등장하는 특별전 포스터가 그것입니다.

또 하나는 특별전 제목인 ‘탕탕평평’인데요. 이 대목에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탕탕평평’도 모자라 ‘탕탕평평평평탕탕(蕩蕩平平平平蕩蕩)’이라고 새긴 정조의 장서인(규장각 소장)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어느 개가 짖어!”

‘삽살개’ 그림을 살펴볼까요. 영조가 화원 김두량(1696~1763)의 ‘삽살개’ 그림에 직접 ‘어제시’를 남겼습니다.

“밤에 사립문을 지키는 게 네 소임인데(柴門夜直 是爾之任) 어찌 대낮에 길에서 이렇게 짖고 있느냐(如何途上 晝亦若此).” 과연 화면 가득 그려진 삽살개가 고개를 치켜들고 이빨을 드러낸 채 사납게 짖고 있습니다.

삽살개는 원래 주인을 지키고 온갖 삿된 존재를 물리치는 충견으로 알려졌죠.

그러나 그런 삽살개가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위협한다면 그 개는 주인을 무는 맹견일 따름입니다.

화가 김두량도 대단한 분이죠. ‘삽살개’뿐 아니라 김두량의 ‘사계산수도’에도 영조의 어제글(‘김두량도 본’)이 보입니다.

영조가 ‘남리’라는 호를 하사할 만큼 총애했던 화가였습니다. 그런 영조가 김두량에게 “사납게 짖는 삽살개를 그리라”는 명을 내리고 본분을 모르고 설쳐대는 무리를 꾸짖는 어제시를 남겼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개 그림은 어떨까요. 김두량의 다른 개그림인 ‘흑구도’는 두 마리 다 아주 노곤한 모습으로 평화롭게 앉아 있습니다. 이암(1499~?)의 ‘모견도’ 등 다른 작가들의 그림에서도 ‘삽살개’처럼 사납게 짖는 그림은 없습니다.

■침전 이름도 ‘탕탕평평실’

이제 정조의 ‘탕탕평평평평탕탕’ 장서인을 보죠. 워낙 책벌레였던 정조였으니 소장본에 갖가지 장서인을 찍었습니다.

‘탕평’은 “붕당과 편파가 없으면 왕도(王道)가 탕탕하고, 평평하다”는 <서경>(‘주서·홍범’)에서 유래됐다. ‘탕평’의 핵심조건은 ‘임금이 표준을 세워 탕평을 이루는 황극탕평’이다. ‘마치 북극성(임금)을 여러 별이 옹위해 공평함을 이룬다’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자료

‘탕평’은 “붕당과 편파가 없으면 왕도(王道)가 탕탕하고, 평평하다”는 <서경>(‘주서·홍범’)에서 유래됐다. ‘탕평’의 핵심조건은 ‘임금이 표준을 세워 탕평을 이루는 황극탕평’이다. ‘마치 북극성(임금)을 여러 별이 옹위해 공평함을 이룬다’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자료

그중 ‘뜻을 크게 갖고 정진하라’는 뜻인 ‘홍재(弘齋)’가 눈에 띄고요. ‘…만기(萬機)…’라는 장서인도 유독 많아요.

예부터 “천자(군주)는 하루에 만 가지 일을 처리한다”고 해서 ‘일일만기(一日萬機)’(<서경> ‘고요모’)라 했습니다.

‘만기친람’이 여기서 유래됐죠. ‘탕평’ 관련 장서인 중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 있어요.

‘세상에 다양한 물(만천)이 있지만 달(군주)은 그 형태에 따라 똑같이 비춘다’는 뜻인데요. 세상의 주인인 군주는 백성의 다양한 능력을 골고루 활용하는 존재라는 뜻이죠.

하지만 모든 장서인 중 ‘백미’는 ‘탕탕평평평평탕탕(蕩蕩平平平平蕩蕩)’입니다. 얼핏 보면 아무리 봐도 ‘탕평평탕’으로만 보이죠. 그러나 ‘탕’ 자 밑에 ‘〃’, ‘평’ 자 밑에 ‘〃’ 자를 보십시오. 그게 반복부호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탕탕평평평평탕탕’이 됩니다. 정조 임금이 얼마나 ‘탕평’에 목이 말라 있었으면 그렇게 ‘탕탕평평평평탕탕’을 반복했을까요.

정조는 당신의 침전 이름도 ‘탕탕평평실’로 지었습니다.

“나는 …침전에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편액을 달고 ‘정구팔황(庭衢八荒) 호월일가(胡越一家)’ 글자를 크게 써서 창문 위에다 걸어 두었다. 아침저녁 눈여겨보면서 끝없는 교훈으로 삼아오고 있다.”(<정조실록> 1792년 11월 6일)

‘정구팔황 호월일가’는 ‘변방도, 오랑캐도 앞뜨락이나 한 집안처럼 여긴다’는 뜻입니다. ‘지역이나 당색에 따른 차별은 절대 없다’는 다짐을 잠자리에서까지 되새긴 겁니다.

■조제를 하듯 탕평

‘탕탕평평’은 “붕당과 편파가 없으면 왕도(王道)가 탕탕하고, 평평하다”는 <서경>(‘주서·홍범’)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2024년 3월 10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탕탕평평’ 특별전. 영·정조가 탕평책을 쓰면서 글과 그림을 통해 소통했던 방식을 들여다보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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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0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탕탕평평’ 특별전. 영·정조가 탕평책을 쓰면서 글과 그림을 통해 소통했던 방식을 들여다보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 ‘탕탕평평’의 핵심조건이 있습니다. ‘황극(皇極), 즉 임금(황·皇)이 지극한 표준(극·極)을 세워 탕평을 이룬다’는 겁니다. 조선의 탕평책 이념은 소론의 영수였던 박세채(1631~1695)가 구체화했습니다.

“…마치 북극성(임금)을 여러 별이 옹위하는 것처럼 서민부터 군자에 이르기까지 치우치거나 공정하지 못할 근심이 없게 됩니다.”(<숙종실록> 1683년 2월 4일)

박세채가 씨앗을 뿌려 영·정조 때 실행된 탕평책은 ‘북극성과 뭇별’의 관계처럼 임금이 표준을 세워 이뤄가는 이른바 ‘황극 탕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당파가 정권을 잡았을 때 다른 정파의 ‘쓸 만한 인물은 기용한다’는 ‘조제론’이 황극탕평의 요체라 할 수 있습니다. 약을 짓는 이치와 같은 겁니다. 물론 약의 처방은 군주의 몫인 겁니다. 어떤 당파가 정권을 잡으면 반대당이 깡그리 일소되는 ‘환국’과는 다른 입장이죠. ‘승자독식’과 ‘패자일소’의 구태에서 벗어나야 망국적인 당파싸움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임금이 중심이 돼 화해와 공존, 경쟁을 펼치는 정치’를 추구한 겁니다.

■경종의 석연치 않은 죽음에 연루?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난 영조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올랐죠.

당시 소론은 경종(재위 1720~1724)의 편에 서 있었고요. 노론은 경종을 압박해 그들이 지지한 연잉군(영조)를 왕세제로 올렸습니다. 그런데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승하하는 과정에서 왕세제가 연루된 ‘시해음모설’과 ‘독살설’이 그럴싸하게 퍼집니다. 즉 왕세제(영조)가 경종의 와병 중에 상극의 음식인 게장과 생감을 올렸고, 막판에는 의사의 처방없이는 절대 같이 먹어서는 안 될 인삼과 부자를 드시도록 고집했다는 겁니다. 그것도 어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1724년 8월 21·24일)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영조는 인원왕후(숙종의 계비·1687~1757)와 왕세제에 우호적이었던 소론 온건파의 도움으로 겨우 왕위에 오르죠(1724). 하지만 마지막 고비가 남아 있었습니다. 영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은 이인좌(1695~1728) 등이 반란을 일으킵니다(1728). 이 반란은 소론 온건파 오명항(1673~1728) 등의 활약으로 천신만고 끝에 진압됩니다.

■“난 게장을 올리지 않았어”

이후 영조는 상처 입은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고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감란록>을 편찬했는데요.

영조는 서문에서 “반란의 뿌리는 붕당에 있다”고 못 박았습니다. 소론이 경종을, 노론이 왕세제(영조 자신)를 밀었기 때문에 죽기살기식 싸움이 벌어졌다고 본 겁니다<영조실록> 1729년 8월 18일자).

영조는 또 <어제대훈>에서 “효종-현종-숙종의 혈통을 잇는 이는 경종과 과인(영조)뿐이며, 신축년(1721) 경종의 명에 의해 왕세자가 된 것”이라고 굳이 밝힙니다. 경종독살설 관련, 최대 의혹사건인 ‘게장 사건’ 등을 해명하는 <천의소감>도 펴냈습니다. “황형(경종)께서 드신 게장은 (과인이 아니라) 수라간에서 올린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이후 영조는 본격적으로 ‘황극탕평(皇極蕩平)’을 추진하는데요. 1742년 성균관에 세운 ‘탕평비’에 ‘탕평의 의지’가 담겨 있답니다.

영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만약 당을 섬기는 마음이 있다면 과거장에 들어오지 마라”고 훈계했습니다. 그러면서 “두루 사귀고 치우치지 않음은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 치우치고 두루 사귀지 않음은 소인의 사사로운 생각”이라고 했죠.

정조의 ‘탕탕평평평평탕탕’ 장서인. 얼핏 보면 ‘탕평평탕’ 글자만 새겨져 있는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탕’ 자 밑에 ‘〃’, ‘평’ 자 밑에 ‘〃(땡땡)’ 부호가 보인다. 반복부호이다. 그러니 이 ‘탕평평탕’ 장서인은 ‘탕탕평평평평탕탕’을 새겨넣은 것이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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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탕탕평평평평탕탕’ 장서인. 얼핏 보면 ‘탕평평탕’ 글자만 새겨져 있는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탕’ 자 밑에 ‘〃’, ‘평’ 자 밑에 ‘〃(땡땡)’ 부호가 보인다. 반복부호이다. 그러니 이 ‘탕평평탕’ 장서인은 ‘탕탕평평평평탕탕’을 새겨넣은 것이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자료

■인사위원회에 참석한 정조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어땠을까요. 정조는 임금이 세운 큰 의리에 각 정파가 참여하는 이른바 ‘의리 탕평’을 주창했습니다. 학문이 신하들보다 뛰어난 정조는 ‘군사(君師·만백성의 어버이이자 신하들의 아버지)’를 자처했죠. 그랬기에 임금이 주도하는 ‘의리탕평’을 주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인사행정도 온전히 왕에게 넘어갑니다.

영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만약 당을 섬기는 마음이 있다면 과거장에 들어오지 마라”고 명했다.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영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만약 당을 섬기는 마음이 있다면 과거장에 들어오지 마라”고 명했다.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1785년(정조 9) 12월 창덕궁 중희당에서 열린 ‘친림 도목정사’(승진·좌천·보직이동 등을 결정하는 인사위원회)를 그린 ‘을사친정계병’을 볼까요. ‘인사위(도목정사)’에 참석한 정조가 인사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어좌 앞에 ‘3배수 후보자 명단(망단자)’이 보이고요. 임명장에 찍을 옥새가 전각 밖 붉은 탁자 위에 놓여 있습니다.

특히 규장각 관원의 위상이 눈에 띕니다. 규장각 관원이 승지들과 함께 내시와 사관 다음에 앉아 있습니다. 인사행정 담당인 이조와 병조 당상은 툇마루에, 이조와 병조 낭관은 전각 밖에 있는데 말이죠. 정조가 규장각 관원 등 측근 세력을 기반으로 왕권 강화를 모색한 겁니다.

■생각 없는 늙은이 같으니…

정조가 신하들과 격의 없이 주고받은 편지가 눈길을 끕니다.

특히 재상인 심환지(1730~1802)에게 보내는 ‘비밀편지’가 흥미로운데요. 이중 정조가 심환지에게 “사직상소를 올리라”고 사주하는 편지가 있어요. “경의 본직은 함께 물러난다는 의리로 사퇴 명분을 삼는 게 좋겠다. 내일 안으로 사직하고 임금의 답을 기다려라….”(1798년 1월 11일 밤)

정조의 사주에 따라 이틀 뒤(13일) 심환지가 사직상소를 올립니다. 그러자 정조는 짐짓 “함께 물러나겠다고 경이 고집하는데 옳지는 않지만 허락하겠다”면서 홀랑 사표를 수리해버립니다. 또 1798년 4월 6일 편지에서는 “…계속 궁궐에 들어오라는 금의 명을 어기도록 하라. 사직상소는 초고를 지은 뒤 반드시 보여주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결국 심환지는 임금의 명에 따라 4번이나 “궁궐에 들어오라”는 명을 어겼고요. 미리 사직상소의 초고까지 본 정조는 편지의 각본대로 심환지를 해임했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정조는 ‘비밀편지’에서 육두문자에 가까운 거친 언사로 심환지를 다그치는데요.

“나는 경(심환지)을 이처럼 격의 없이 여기는데 경은 갈수록 입을 조심하지 않는다. ‘이 떡이나 먹고 말 좀 전하지 마라’는 속담을 명심하라. 매양 입을 조심하지 않으니 경은 ‘생각 없는 늙은이(無算之수)’라 하겠다.”(1797년 4월 10일)

이밖에 “과연 어떤 놈들이기에 감히 주둥아리를 놀리는가(乃敢鼓吻耶)”라든지, “그 자는 참으로 후레자식이라 하겠다(可謂眞胡種子)”는 등의 욕설을 내뱉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엔 왜 그리 당명이 많은가”

근본적인 의문이 생깁니다. 이와 같은 영·정조의 탕평책으로 조선이 확 바뀌었을까요.

영조는 ‘이인좌의 난(1728)’을 진압한 뒤 펴낸 <감란록>에서  “반란의 뿌리가 바로 당쟁”이라고 규정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영조는 ‘이인좌의 난(1728)’을 진압한 뒤 펴낸 <감란록>에서 “반란의 뿌리가 바로 당쟁”이라고 규정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772년이면 영조가 즉위한 지 48년이 지난 때였는데요. 그런데 영조는 당파를 개탄하는 포고문을 발표합니다(8월 11일).

“아! 50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은 탕평인데… 우리나라의 당명은 어찌 그리 많은가? 처음에는 동서가 있었고, 다음엔 대북·소북이 있었으며, 또 남서가 있었는데, 그것도 부족해서 다시 노론·소론이라 하고, 지금은 청(淸)·명(名)이라 한다.”

영·정조의 탕평책이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이 아니고요. 강력한 왕권으로 정파 간의 극렬한 다툼을 억누른 것에 불과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고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왕권이 약화하자 곧 세도정치라는 더욱 파행적인 정치 형태를 낳게 됐다는 겁니다.

■“뜻은 이뤄진다”

‘탕탕평평’을 그러나 너무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김두량의 또 다른 개 그림인 ‘검은 개(흑구도)’. 풀밭에 쪼그리고 앉아 뒷다리로 가려운 몸통을 긁고 있는 검은 개의 노회한 표정과 동작이 자연스럽고도 생동감 있게 묘사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두량의 또 다른 개 그림인 ‘검은 개(흑구도)’. 풀밭에 쪼그리고 앉아 뒷다리로 가려운 몸통을 긁고 있는 검은 개의 노회한 표정과 동작이 자연스럽고도 생동감 있게 묘사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왕권 강화든 뭐든 백성들의 삶에 보탬이 되면 그것은 업적이 아닙니까. 탕평으로 붕당의 갈등을 줄인 영조는 백성의 삶을 보듬는 정책을 펼쳤죠. 그분의 가장 큰 업적은 균역법과 준천(준설)이었습니다. 즉 1752년(영조 28) 양인(16~60세)이 군 복무 대신 해마다 부담해야 할 세금을 포 2필에서 1필로 감해주는 균역법을 전격 시행했습니다. 짓눌린 백성들의 어깨를 한결 덜어준 겁니다. 또한 준천, 즉 하천 정비작업도 펼쳤습니다(1760).

균역청의 업무지침을 수록한 <균역청사목>. 영조의 가장 큰 치적은 균역법이었다. 1751년 9월 시행된 균역법에 따라 양인이 군 복무 대신 해마다 부담해야 할 세금이 포 2필에서 1필로 줄어들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균역청의 업무지침을 수록한 <균역청사목>. 영조의 가장 큰 치적은 균역법이었다. 1751년 9월 시행된 균역법에 따라 양인이 군 복무 대신 해마다 부담해야 할 세금이 포 2필에서 1필로 줄어들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약간의 비만 와도 범람하기 일쑤였던 서울의 하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죠. 여러 차례 현장에 나가 작업자들을 독려한 영조는 공역이 마무리된 후 <준천첩>을 만들어 신하들에게 배포했습니다. 이 첩에는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뤄진다(有志竟成)’라는 고사가 담겨 있습니다. ‘꿈은 이뤄진다’는 2002년 한일월드컵 축구 구호가 연상되죠.

영조가 <서경>과 <시경>의 구절을 인용해 쓰고 그린 바위그림이 심금을 울립니다. “한쪽으로 치우쳐 백성을 돌보지 못하면 안 되네(維石巖巖).”, “백성의 험함을 돌아보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네(顧畏民巖).”

영·정조의 ‘탕탕평평’이 백성을 향한 마음씨의 발로였다는 사실만큼은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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