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오피스 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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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내 샤워의 준비물은 미국 드라마 <오피스>다. 나는 매일 샤워를 할 때마다 미국 드라마 <오피스>를 본다. 그것은 거의 정해진 의식 행위에 가깝다. 휴대전화를 쥐고, 화장실에 간다. <오피스>를 틀고, 샤워기를 튼다. 어느 날은 무작정 샤워기를 틀고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생각했다. 뭔가 아닌데, 이게 샤워가 아닌데. 잠시 후에 답을 찾았다. <오피스>가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바디 워시는 없어도 되지만, 칫솔질쯤 하루 걸러도 되지만, <오피스>는 그렇지 않다. 몇 시즌의 몇 화가 됐든지, 마이클의 씩씩한 목청이 들려오지 않으면 샤워는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뭔가 단단히 고장 난 샤워를 한 지가 벌써 몇 년이 흘렀다.

<오피스>는 2005년부터 2013년까지 방영한 미국의 대하(?) 시트콤으로, 미국의 스크랜턴이라는 소도시의 작은 제지회사 직원들의 일상을 담은 코미디 드라마다. 나는 샤워를 하는 4년 이상의 시간 동안, 그러니까 1,000일 이상 그 드라마를 반복 주행하고 있다. 옷이라면 해졌을 것이고, 길이라면 닳았을 것이다. 대사를 외는 건 재작년쯤 끝냈고, 이제는 다음 대사가 나오기도 전에 내가 먼저 말한다. 그래서 어쩐지 드라마 속 캐릭터들이 내 말을 복창하는 것처럼 들리는 모양새가 돼버린다. 처음 몇 번 동안은 전혀 웃기지 않았던 농담이 한 스무 번쯤 돌려보았을 때는 완벽히 내 어딘가에 적중해 허리가 휘도록 웃으며 머리를 감은 일도 있다. 목소리만 들어도 누가 말하는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가장 사랑하는 친구에게 듣고 싶었던 바로 그 말을 딱 필요한 때에 듣는 것처럼, 나에게 꼭 알맞게 안착한다. 우리끼리 준비한 무대가 매일같이 열리는 느낌이다. 하여튼지 간에 매일매일 보아도 질리지를 않는 것이었다.

다른 날과 다를 것 없는, 아주 평범한 날이었다. 저녁이었고, 나는 언제나처럼 샤워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그 순간 조금은 적막하다고 생각했고, 손가락을 몇 번 움직여 <오피스>를 틀었다. 그렇게 된 거다. 이제 나의 샤워실 안에는 시야는 확보되면서 물은 튀지 않는 적절한 공간에 전용 휴대전화 거치대까지 놓여 있다. 혹시라도 여행을 가거나 친구네 집에서 묵게 되는 날에도 마찬가지다. 창문 난간에든 휴지 걸이 위에든 올려놓고 <오피스>를 틀었다. 처음엔 단순히 좋아서 그런 줄 알았다. 그냥 재밌어서 시작된 작은 습관이지 싶었다. 그런데 해가 거듭될수록, 에피소드가 200개가 넘는 <오피스>의 대사를 달달 외우게 될수록 어쩐지 심오한 고민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오피스>가 없다면 더는 샤워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샤워에 있어 나에게 물보다 더 근원적인 요소는 <오피스>가 아닐까? <오피스> 샤워를 이토록 무의식적이고 절대적으로 고집하는 것은 나의 무의식과 어린 시절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지는 않을까? 어쩌면 나는 의지할 만한 사람이나 관계를 찾지 못해 이런 영상물에 지나친 의존을 하는 것은 아닐까? 프로이트나 칼 융이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않을까?

다른 걸 틀어보려는 시도를 안 해본 것도 아니다. 즐겨 보았던 드라마나 영화로 슬쩍 바꿔보기도 했다. 그러나 곧 스르르 <오피스>로 되돌아갔다. 그것들은 너무 시선을 끌거나, 너무 재미가 없었다. 그 밸런스가 조금만 흐트러져도 샤워를 할 수 없거나, 시청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조금 대체할 수 있었던 것은 애니 <아따 맘마>였다. <오피스>가 샤워를 책임졌다면 <아따 맘마>는 일과를 책임졌다. 거실에서 하루 종일 끊기지 않고 <아따 맘마>가 재생됐다. 언뜻 보면 하루 종일 혼자서 밥을 해 먹고 글을 쓰고 할 일들을 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사실은 혼자서 트로트를 뽑는 뽀글뽀글한 머리의 일본인 엄마에게서 밥을 얻어먹고 미국에 있는 제지회사에 출근하는 것이 나의 일과였던 셈이다. 그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메리고라운드, 영원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매 회차를 거듭하며 이야기는 나아가고 있지만, 삶의 하루하루처럼 반복되고 있기도 하다. 어디선가 그 세계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나를 그 사람들의 일부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그러니까 <오피스>의 일부. 그곳의 그 평범한 직원들의 일원 말이다. 몇 년간 샤워 시간마다 <오피스>를 보며, 나는 그들이 스치듯 보여주는 표정, 가장 익숙한 시선, 대사의 음절 사이사이까지 스며들고 말았다. 이제는 길게 걸쳐진 그 시간의 어디에 놓여도 그 공간을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단순히 영상이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친숙한 공간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매일 샤워를 하러 드나드는 화장실보다 더 익숙하고 따뜻한 공간이.

친구들은 종종 “다솔아, 왜 난데없이 영어 대사를 외쳐?” 하고 물었다. 내가 <오피스>에서 자주 들은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에서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피스>는 거의 10년에 걸쳐 촬영된 드라마였고, 나는 실제로 그들과 10년은 알고 지낸 기분이었다. 이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얘기냐면, 정작 <오피스>를 제작한 제작진과 배우들은 나 같은 사람을 예상 시청자로 두지도 않았다. 2000년대에 제작된 미국 시트콤을 2023년에 한국에 사는 20대 여성 아시아인이 볼 거라고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으리란 말이다. 심지어 무려 4년에 걸쳐 매일 샤워할 때마다 제멋대로 그 사무실로 출퇴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을 것이다.

얼마 전에 환경과 관련된 행사에 참여하게 됐는데, 거기에 함께 참여한 한 기업이 제지회사여서 나는 혼자서 아무 이유도 없이 깊은 유대감을 느끼고 말았다. 처음으로 진짜 제지회사 직원들을 마주한 나는 혼자서 너무나 설레버리고 말았던 것이다(<오피스>는 제지회사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시트콤이지만 종이와는 사실상 전혀 관련이 없다!). 방심했다가는 ‘제가 동종업계에서 일을 했었어서요’라고 말할 뻔했다! 나는 그들의 행동과 매무새를 주의 깊게 관찰하며 누가 마이클이고 누가 드와이트이고 짐이고 팸인지 맞춰보느라 심하게 신이 난 상태였다. 잠시 후에야 내가 조금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지금 내 안광이 어떨까! 어쩜, 그들 눈에는 수상하리만치 빛나고 있을 거야!

※이번 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를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양다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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