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RNA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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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일(현지시간) 2023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커털린 커리코(왼쪽) 박사와 드루 와이스먼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교수가 수상자 선정 소감을 말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10월 2일(현지시간) 2023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커털린 커리코(왼쪽) 박사와 드루 와이스먼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교수가 수상자 선정 소감을 말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DNA와 RNA는 모두 핵산으로 분류되는 생체 분자다. 세상에 먼저 생겨난 핵산은 RNA였다. 대부분의 진화이론가는 지구에 최초로 생겨난 생명체는 RNA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 ‘RNA 세계 가설’에 따르면, 지구 초기에는 RNA가 단백질과 함께 생명체의 기본 구성 요소였으며, RNA는 단백질을 합성해 스스로 복제하고 진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RNA의 기능이 점차 DNA와 단백질로 분화돼 오늘날과 같은 DNA-RNA-단백질 세계가 탄생하게 됐다. RNA가 단백질 합성, 유전정보 저장 및 전달, 자기 복제 등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예측의 근거다.

다윈은 유전적 대물림의 방식과 유전물질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종의 기원>을 집필했다. 완벽주의자이자 소심했던 다윈이 자신의 이론에 유전의 원리가 얼마나 절실한지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은 그가 ‘게뮬’이라는 황당한 유전자 이론을 만들고, 다양한 가축이 육종에 의해 빠르게 인위선택된다는 점에 큰 관심을 보였다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유전적 대물림의 기제와 유전물질의 존재는 다윈 이후 100여 년 동안 생물학자들의 초유의 관심사가 됐으며, 잘 알려져 있듯이 수도사 멘델과 초파리 유전학자 모건, 그리고 왓슨과 크릭으로 이어지는 생물학사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그렇게 우리는 DNA라는 이중나선구조 유전물질의 존재를 알게 됐고, 언젠가부터 DNA는 생물학의 가장 유명한 물질로 각인됐다.

DNA와 RNA, 금수저와 흙수저

RNA는 진화의 과정에서 DNA라는 새로운 종류의 핵산에 유전정보의 저장과 전달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모두 넘겨주었다. 지구상에서 바이러스를 제외하면, RNA를 유전물질로 사용하는 생명체는 없다. 도킨스의 말처럼 생명체의 유일한 목적이 자신의 유전자를 더 많이 복제하는 것뿐이라면, RNA는 생명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DNA에 양도하고 고난의 길을 자초한 셈이다. 세포 내에서 RNA가 하는 역할을 살펴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첫째, RNA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단백질을 합성하는 것이다. 단백질이 없으면 생명도 없다. 둘째, RNA는 세포의 성장 및 분화, 대사 과정 등을 조절하는 조율사 역할을 한다. 마이크로RNA가 대표적인 예다. 셋째, RNA는 단백질처럼 효소 및 세포 내 구조물로도 기능한다. 리보자임이나 리보솜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유전정보의 저장과 전달이라는 단 한 가지 기능만 가진 채, 스스로는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는 DNA와 달리 RNA는 우리 몸의 생존과 발달에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중요한 분자다.

한 사람에 대한 평판이 그의 실력만으로 평가되는 사회가 공정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특히 한국에서 한 개인이 보유한 부모, 학벌, 돈, 지위 등의 사회적 자본이 얼마나 평판에 영향을 미치는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단어는 DNA와 RNA의 관계에 정확히 대비된다.

생명이 살아 숨쉴 수 있는 이유는 RNA와 단백질이 열심히 일하기 때문이다. DNA가 없으면 RNA도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반론할 수 있다. 아니다. 우리 몸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자랑하는 적혈구에는 세포핵이 없다. 당연히 DNA도 없다. 적혈구는 미리 만들어둔 전령RNA와 리보솜만으로 산소전달에 필요한 헤모글로빈을 만들어내며,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다 죽는다. DNA 없는 생명은 가능하지만, RNA 없는 생명은 불가능하다.

DNA는 발생이 진행되는 초기의 순간에 생식세포를 분리해 미리 자리를 잡고, 유전정보의 대물림을 위한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생명체의 모든 활동으로부터 보호받는다. DNA는 금수저다. 그러나 RNA와 단백질이라는 흙수저가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금수저다.

mRNA 백신 개발의 잔혹사

2023년 노벨생리의학상은 mRNA 백신 개발의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 커털린 커리코와 드루 와이스먼 두 명에게 돌아갔다. 이 둘은 mRNA를 구성하는 핵산 중 한 가지인 유리딘을 유사유리딘으로 치환하면, 우리 몸의 면역계가 외부에서 주입된 mRNA를 외부물질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고, 바로 이 발견 덕분에 mRNA 백신 기술이 가능해졌다.

커털린 커리코 박사는 헝가리 이민자 출신으로 미국의 과학계에서 온갖 수모와 멸시를 당하며 mRNA 연구에 매달린 전형적인 흙수저 출신 과학자로 유명하다. 커리코의 연구는 그가 소속돼 있던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철저히 무시당했다. 대학은 봉급을 삭감하고 강등시켰으며, 심지어 노벨상의 단초가 된 그의 특허를 헐값에 다른 회사에 팔아넘겼다. 커리코의 연구주제는 단 한 번도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논문은 학술지 ‘네이처’와 ‘사이언스’에서 무참히 게재거부를 당했으며, 논문 출판 이후 이 둘이 세운 회사는 번번이 투자를 거부당해 문을 닫아야 했다. 하지만 토론토-하버드-스탠퍼드 대학을 두루 거친 금수저 과학자 데릭 로시는 자신의 연구가 아닌 커리코와 와이스먼의 논문을 바탕으로 두둑한 지원을 받아 모더나를 창업해 돈방석에 앉았다. 과학계라고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과학계 또한 처참할 정도로 불공평하다.

최근 RNA에 관한 책을 집필하면서, 이 책을 “이름이 기억되지 못한 모든 과학자에게” 바친다고 썼다. mRNA 백신의 개발사 속에는 인류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수많은 흙수저 과학자들로부터 얼마나 큰 도움을 받았는지에 대한 교훈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mRNA 백신 개발의 역사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두가 DNA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DNA의 유전정보를 단백질로 번역하는 과정을 연구했던 소수의 과학자가 전령RNA의 존재를 발견했다. 이후 모두가 DNA의 정보가 어떻게 RNA로 전사되는지에만 관심을 가졌을 때, RNA의 정보가 단백질로 번역되는 과정에 관심을 가졌던 소수의 과학자가 mRNA 백신의 단초가 될 발견을 쌓아나갔다. mRNA 백신 개발의 역사는 과학계의 주류가 무시했고, 사회가 기억조차 하지 않았던 흙수저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성공의 신화다. 그들이 없었다면 인류는 여전히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한국 저녁뉴스의 말미에는 항상 스포츠 스타와 연예인의 인터뷰가 나온다. 노벨상이 발표되는 10월에도 뉴스는 여전히 아시안게임의 스타 이야기로 도배되고 있다. 그런 사회에선 노벨상이 나올 수 없다. 이름을 남기지 못한 보통 과학자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회엔 희망이 없다.

<김우재 낯선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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