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과학 없이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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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의 과학자 이미지/픽사베이

실험실의 과학자 이미지/픽사베이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객관적인 틀에서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우리는 14.26기가파섹, 즉 465광년의 관측 가능한 우주의 한 은하계 속에 존재하는 태양계의 행성, 지구에 살고 있다. 지구는 지금으로부터 약 45억 년 전에 태양계의 일원으로 탄생했다. 최초의 지구는 핵, 맨틀, 지각으로 나뉘는 과정에서 최초의 해양과 대기를 형성했다. 지구상에 최초의 생명이 출현한 것은 약 30억 년 전쯤으로 추측되는데, 그 최초 생명의 형태는 RNA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을 구성하는 물질 중에서 유전과 생명활동 모두를 수행할 수 있는 분자는 RNA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빅뱅에서 인간까지, 인간이 그나마 우리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불과 몇백 년 전 인류의 역사에 등장한 근대과학 덕분이다. 우주의 역사는 물리학과 천문학이, 물질의 역사는 화학이, 지구의 역사는 지질학이, 생명의 역사는 생물학이 각각 인간의 위치를 알려주는 교사의 역할을 해왔다. 우리를 둘러싼 자연의 비밀이 풀릴 때마다 인류는 분명히 진보했고 위대해졌지만, 그 발견에 대해 과학자들이 항상 존중받아온 건 아니다. 종교와 정치와 인간의 독단은 과학자들이 발견해온 진실을 때론 무시했고, 때론 부정했으며, 심지어 과학 그 자체를 부정하는 기괴함을 보이기도 했다.

물고기는 존재한다

우연히 한국의 과학 베스트셀러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 한 챕터를 읽지 못하고 덮어버린 그 책은 과학책으로 분류되기에는 지나치게 문학적이었다. 과학사를 문학으로 접근하는 일이 무슨 엄청난 죄악은 아닐 것이다. 과학은 그러나 문학과 다르다. 과학의 역사를 감각적이고 문학적으로 접근해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일에 딴지를 걸 생각은 없다. 하지만 과학의 역사가 그런 감각적 접근만으로 평가되기에는 지난 몇 세기 동안 과학자들이 의사나 변호사가 사회에서 받는 대접보다 형편없는 보상을 받으며 만들어낸 그 발견들이 너무 슬프다. 과학은 문학이 아니다.

과학이 문학과 같은 지식체계라고 주장하던 일군의 학자들이 있었다. 상대주의적 과학관을 대변하던 그들은 과학사와 과학적 발견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일련의 오류들을 끄집어내 과학도 문학과 비슷한 상대주의적 지식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1990년대 서양지식계를 흔들어 놓았던 과학의 상대성에 대한 이 논쟁을 ‘과학전쟁’이라고 부른다. 그 전쟁은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지만, 과학전쟁을 촉발했던 과학사회학의 지위는 이제 보잘것없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과학철학도 과학사도, 토머스 쿤이 여전히 베스트셀러라는 정도의 영광 이외에는 그다지 진지한 학문적 성과 없이 유행에 밀려 노쇠했다.

여전히 우리에게 mRNA 백신을 선물하고, 암치료제와 비만치료제를 선물하는 학문은 과학이다. 진보하는 학문은 과학뿐이다. 그러나 과학의 세례를 받은 현대문명에서 소위 인간적인 학문을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과학을 절대권력으로 둔갑시키고 공격하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다. 여전히 그들은 과학이 만들어낸 각종 장치가 인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계속해서 진보하는 과학이 언젠가는 인류를 멸종시킬 것이라고 여긴다. 대중매체와 각종 미디어를 장악한 그들의 언설에 대중은 쉽게 현혹된다. 그들에게 아무리 과학을 쉽게 설명해 준다 해도 그들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다. 심지어 과학을 쉽게 설명하겠다고 나선 과학의 전도사들조차 이미 그들처럼 과학의 진보에 대한 비관론자가 돼 있거나, 그 인간적이라는 학문에 경도돼 과학을 그저 장사꾼처럼 팔아먹기에 바쁘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교양서의 베스트셀러 목록에서조차 과학자들이 쓴 책보다 소위 인간적인 학문을 하는 이들의 책들이 득세하는 광경을 감내해야 한다. 과학을 쉽게 설명하겠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과학을 사랑하지 않고, 과학자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요리평론가가 요리를 할 줄 모르고, 영화평론가가 영화를 만들어본 적 없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과학 또한 오염됐다. 우리가 대중매체에서 접하는 과학에 대한 이야기 대부분은 쓰레기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을 버린 과학전도사들

대중이 사랑하는 과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대중매체에 자주 나와 우주와 자연과 인간을 이야기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이 사회는 과학자라는 존재로부터 그 이미지를 부여받는데, 그들은 대체로 과학밖에 모르고, 순진하고, 착하고, 열정적인 사람들이다. 대중매체의 과학자들은 사회를 결코 비판하지 않으며, 오로지 아름답고 낭만적인 자연에 대한 이야기에만 집중한다. 온갖 썩어빠진 사회의 모습에 지친 대중은 그런 과학자의 모습에서 위안을 받는 듯하다. 그렇게 대중매체의 과학자들은 스타가 되고 돈을 번다. 한국에서 유명한 과학자들은 대부분 연구보다는 대중매체에서의 활동 때문에 유명해진다.

과학계라고 연예계처럼 스타를 가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미국에 칼 세이건이 있었고, 영국에는 리처드 도킨스가 있었으니, 한국도 그런 과학자를 가지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그런 과학자들이 과학자의 롤모델이 되는 건 한국 과학계에 별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과학자 중 누군가는 열심히 연구해 한국인들의 소원인 노벨과학상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대중매체에 나오는 과학자 대부분은 연구할 시간이 없거나, 너무 뛰어나 연구를 다하고 투잡을 뛰는 것일 텐데, 아무리 잘 봐줘도 그들 중에 노벨상 탈 만한 연구를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만약 정말 언젠가 한국에 노벨과학상을 안겨줄 연구를 하는 과학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대중에 알려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과학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대중과학자가 아니라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연구하는 과학자를 응원할 방법을 찾는 게 좋다. 그게 진짜 한국의 과학을 응원하는 길이다.

얼마 전에 대통령은 한국 연구개발비의 상당 부분이 카르텔에 의해 운영되며, 따라서 연구개발비를 대폭 삭감하겠다고 발표했다. 거의 한두 달 동안 과학기술계는 패닉상태를 겪었는데, 과학계의 소위 어른이라는 사람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대통령이 정확히 지적했듯이, 그들이 카르텔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학을 너무 사랑해 대중매체에 과학자로 소개되는 그 스타 과학자 누구도, 대통령이 과학을 죽이는 그 순간에 과학을 지키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중이 사랑하는 과학자는 한국의 과학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그들에게 지갑을 연다. 이런 사회에서 과학이란 사치다. 과학은 죽었다.

<김우재 낯선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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