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식어버린 ‘생일밥’…‘머리 센 소년들’은 괭이바다가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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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형무소터임을 알리는 안내판 /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마산형무소터임을 알리는 안내판 /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그때는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땐데, 언젠가는 (아버지가) 돌아올 끼다, 생일날 되거든 밥이라도 한 그릇 떠놓고 기다려보자…. 그렇게 ‘살아 있다’ 하는 희망만 가지고 살다가….”(경남 창녕군 보도연맹 학살사건 유족 노원렬 인터뷰, 유튜브 <다큐몹> 2023. 6. 8.)

정성껏 지은 생일밥 한 그릇이 다 식어가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해, 그다음 해도 마찬가지였다. 주인 없는 생일밥을 한쪽에 챙겨두고, 가족들은 텅 빈 그리움만 수저로 떠올렸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도 소용없었다. 할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제 생일밥이 아니라 제삿밥을 올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는 차마 아무도 꺼내지 못했다.

1950년 여름. 노원렬은 열세 살, 아버지는 서른 살이었다. 이들이 살던 곳은 경남 창녕군 고암면 우천리. 아버지가 논에서 구슬땀을 쏟고 있을 때, 아버지를 찾아온 남자들이 있었다.

알고 지내던 순경과 형사들이 데려간 뒤

“아버지는 면사무소에서 일하다가 6·25사변 나기 전에 그만두고 농사를 지었죠. 면 직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지서 순경들도 잘 알고 형사들도 친분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논에서 일하는데 형사 세 사람이 찾아와서 ‘경찰서에 좀 갈 일이 있다’ 했답니다. 다 아는 사람들이니까 의심도 없이 가신 거죠. 그런데 돌아오지도 못하고, 끝이라, 그게.”(앞 인터뷰)

아버지를 잡아간 이유는 나중에야 알았다. 국민보도연맹.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여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받아들인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은 법률에 근거한 단체는 아니지만, 당시 내무부 장관이 총재를 맡는 등 정부가 주도한 관변단체였다. 가입 대상은 ‘좌익 전향자’라 했지만, 실제로는 공비들에게 밥을 해줬다고 해서, 과거 징역을 산 적이 있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도장 한번 잘못 찍어서 가입된 사람도 많았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보도연맹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들이 적군에 동조해 후방을 교란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 때문. ‘국민으로 받아들이겠다’던 보도연맹원 명단은, 오히려 국민과 ‘비국민’을 구분하는 살생부(殺生簿)가 돼버리고 말았다.

가족들은 아버지가 왜 잡혀갔는지 아무 이유도 듣지 못했다. 경찰서에 있다고는 하지만 면회조차 할 수 없었다. 열흘 남짓 시간이 흐르고, 할아버지 앞으로 쪽지 하나가 왔다.

“아버지가 쪽지를 보냈다 카는 거라. 내용이 ‘아버지(노원렬에게는 할아버지), 돈을 좀 써서 나를 나가게 해주세요’ 그런 연락이 왔대. 그런데 쪽지는 받았는데, 돈을 어디로 줘야 하는지 통로를 알아야 할 거 아이가? 면회도 안 시켜주는데…. 그래서 또 하루하루 흘러가 버려서 돈을 못 부쳤다 이러더라꼬, 우리 할아버지가. 그게 너무 원통한 기라.”(앞 인터뷰)

창녕경찰서에 구금된 사람 중 일부는 창녕읍 송현동 솔터마을 뒷산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많은 수는 그에 앞서 군용트럭에 실려 마산형무소로 이송됐다. 이들은 마산형무소에서 ‘괭이바다’(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원전마을과 거제시 장목면 칠천도 사이의 바다)로 다시 한 번 옮겨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장(水葬)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매년 생일밥을 떠놓고 기다렸지만, 노원렬의 아버지가 돌아오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마산형무소 재소자와 인근 지역에서 잡혀온 보도연맹원들이 마산지구CIC(첩보부대), 마산지구헌병대, 마산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괭이바다에서 희생됐다.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최소 717명의 희생자를 확인했다.

학살에는 LST, ‘전차양륙함’까지 동원됐다. 당시 목격자의 진술이 책 <토호세력의 뿌리-마산현대사를 통해 본 지역사회의 지배구조>(김주완, 불휘, 2006)에 실려 있다.

“GMC 트럭이 줄줄이 해안가로 들어왔다. 평소처럼 동양주류 건물 벽에 피란민들이 죽 기댄 채 누워 있었는데 헌병들이 이들을 일으켜 쫓아버렸다. 트럭이 열몇 대는 족히 돼 보였다. (…) 상륙함(LST) 두 척이 왔다. 1개 연대병력이 탈 정도로 큰 배였다. 트럭에서 내린 사람들은 곧장 LST에 옮겨 탔다. 나중에 들으니 괭이바다에서 총살 수장했다고 했다.”(2009년 진실화해위원회 <부산·경남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 조사보고서> 재인용)

괭이바다 아래 그대로 잠든 사람들

일부 시신들은 파도를 타고 바닷가로 떠밀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이름도 고향도 알 수 없는 그들을 수습해 바다 가까운 땅에 묻어줬다. 시신들이 멀리 쓰시마섬(대마도)까지 떠내려갔다는 증언도 있었다. 대부분은 괭이바다 아래에 그대로 가라앉아 잠들었다.

717명이라는 희생자 수는 1960년 10월 23일 마산매일신문에 실린 피학살자 282명의 명단과 마산형무소 관련 자료를 종합한 것. 하지만 1960년 피학살자 명단은 불과 일주일간 유족들의 신고를 받아 만든 것임을 생각하면, 실제 희생 규모는 그보다 훨씬 클 것이다.

“산 사람을 갖다가 바로 물에 집어넣는 이것은 짐승들이 하는 짓입니다, 짐승들이. 인간으로서 왜 사람을 물에 잡아넣습니까?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갖다가 보도연맹 가입시키고 수장시키는 그것은 야만인입니다, 야만인. 정부가 절대적으로 책임져야 합니다.”(거제시민간인학살유족회 서철암 인터뷰, 영화 <레드툼>, 구자환 감독, 2013년)

진실화해위원회는 ‘괭이바다’ 학살을 비롯한 부산·경남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가 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을 집단살해하고 (…)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군법회의를 통해 사형시킨 범죄행위”로 봤다.

그리고 “비록 전시였다고는 하나, 국가가 좌익사범이라는 이유로 수감된 재소자들을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처형한 행위는 정치적 살해”라고 그 불법성을 분명히 밝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우리 아버지 이름을 부르면서 ‘와 이리 안 돌아오노… 자식을 못 보고 내가 죽는갑다’ 하셨던 말씀이 가슴에 남고…. (아버지가 잡혀가신 뒤에) 어머니가 한평생 홀로 지내면서 고생하신 게, 그런 게 가슴에 남아가지고….”(노원렬, 앞 인터뷰)

‘이제야 생일밥 대신 제삿밥을 올립니다’

이제야 아들은 아버지의 생일밥 대신 제삿밥을 지어 올린다. 돌아가신 날짜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음력 9월 9일, 무주고혼이나 객사혼령을 모신다는 구구절에 제사를 모신다.

지난 6월 10일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창원위령탑’(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가포동 산73번지) 앞에서 합동추모제가 열렸다. 소년들의 몸은 73년 세월만큼 늙어버렸지만, 마음속 그리움은 그대로였다. 추모제에 모인 ‘머리 하얀 소년들’이 아버지를 목 놓아 부르며 운다. 울음을 삼킨 바다는 73년 전 그때처럼 말없이 일렁일 뿐이다.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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