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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지금 이곳은 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습니다. 물기를 가득 머금고 뿜지 않고 있어요. 숱 많은 머리를 축 늘어뜨린 근사한 버드나무 아래 앉았어요. 짙은 녹색의 머리칼 사이로 작은 빗방울들이 툭툭 나를 건드립니다. 잔잔히 흐르는 강이 내다보이는 정자로 자리를 옮기며 모임은 시작됩니다. 들이치는 비를 맞으며 자신의 이름을 맞히는 게임을 합니다. 이름은 방금 옆 사람이 지어줬어요. 오늘은 신경숙과 황정은, 미셸 푸코와 토베 얀손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신경숙은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130㎞를 달려 이곳에 왔습니다. 황정은은 설레 잠을 한숨도 못 잤대요. 토베 얀손은 틈만 나면 이유 없이 손뼉을 칩니다. 미셸 푸코는 내가 올여름에 본 가장 크고 듬직한 부채를 들고 다닙니다. 충주 우체국에서 줬대요. 그는 생각보다 신발 끈이 자주 풀리는 사람. 길가에 자주 멈춰 섭니다. 보다 못한 토베 얀손이 끈을 직접 묶어주겠다고 나서요. 푸코는 웃으며 쭈그려 앉아 끈을 묶습니다. 두 번이나요.

네 사람은 안으며 인사합니다. 미셸 푸코와 황정은은 오늘 처음 만났지만, 서로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모임의 이름은 자주 모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서울에 살지 않는다는 것. 오늘의 모임을 위해 이들이 이동한 거리는 307㎞에요. 그들이 있던 곳을 점으로 잇는다면 대한민국을 포근한 이불처럼 덮을 수도 있어요. 물리적 거리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시대에 그들이 움직인 거리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각각에게는 엄숙한 의무가 있습니다. 황정은은 도시락, 신경숙은 편지, 토베 얀손은 운전, 미셸 푸코는 가이드 담당이에요. 신경숙이 약속한 편지를 꺼내놓네요. 네 개의 봉투에는 귀여운 여우가 그려져 있습니다.

네 사람은 푸코가 태어났을 때부터 살았던 동네에 갈 생각입니다. 이것은 작은 문학기행입니다. 그들은 푸코가 지난 1년간 쓴 모든 문장을 읽었거든요. 그런고로 그곳의 방앗간과 공원에 볼일이 있습니다. 특히 푸코의 마당은 그들에게 성지입니다. 그처럼 아름답게 묘사된 마당을 본 적이 없거든요. 그들은 4인용 경차에 꼭 맞고, 커다란 교회 옆에 차를 세웠어요. 푸코가 울적할 때나 심심할 때 정처 없이 몇 시간이고 걷는다는 동네를 넷이 걷습니다. 그 거리에 쌓인 무수히 많은 장면을 상상해 봅니다. 저기 그가 다닌 초등학교가 보여요. 푸코는 프랑스 사람이 아니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는 충주 사람이고, 이곳의 사과를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어요. 레즈비언으로 알려진 토베 얀손은 학교 앞 분식집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군요. 방금 하교한 아이들이 저마다 떡꼬치와 컵볶이와 콜라 맛 슬러시를 들고 있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네요. 마치 그의 과거를 멀리서 바라보는 것 같아요.

푸코의 아빠가 매일 같이 맨손체조를 했다는 공원을 지나갑니다. 저기 야트막한 언덕 너머에서 불량한 학생들이 모여 놀고는 한대요. 미셸 푸코는 옥동자, 황정은은 요맘때, 토베 얀손은 와일드 바디를 들고 방앗간을 지납니다. 아이스크림은 달콤하고 빠르게 녹아가고 있어요. 신경숙이 고른 것은 사과와 파인애플 맛이 번갈아 난다고 하네요. 푸코가 묻습니다. “그것은 신식 아이스크림인가요?” 그러자 토베 얀손이 정정합니다. 새로운 아이스크림이냐고 물어야지.

푸코가 태어난 집의 대문은 검은색. 이제 모두가 그의 집 열쇠가 어디 있는지 알게 됐어요. 대문이 검은색인 것에 대해 별 유감은 없대요. 하지만 그 대문이 초록색이거나 노란색이거나 빨간색이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는 것은 재미있습니다. 앞 골목에는 커다랗게 권태연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어요. 권태연씨는 더 이상 그곳에 살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당에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진귀한 모양의 돌들이 모여 있어요. 새가 날개를 펼치고 있고 연인이 키스하고 있고 바다 너머로 일몰이 지고 있어요. 돌의 나이는 천만년이라는데, 그들이 그곳에 모이기 위해 이동한 거리는 얼마일까요? 황정은은 그 공간의 구석구석에 동요합니다. 푸코의 문장으로 지어진 거푸집에 색을 채워 넣고 있어요.

푸코의 집에서 네 사람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방식으로 정렬된 가족의 사진을 봅니다. 그 집에서 나고 자란 네 사람이 아주 작을 때, 작을 때, 클 때, 아주 클 때 찍은 사진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각 맞춰 정렬돼 있어요. 그 사이에 시간이 숨어 있습니다. 그렇게 작고 아름답고 위대하고 가지런한 역사를 또 볼 수 있을까요. 그때 신경숙이 말하네요. “눈물 나요.” 그는 키가 크고 사파리 직원 같은 차림을 하고 있으며 스스로 그네를 잘 탄다고 확언합니다.

태어나서 한국을 떠나본 적이 없고 무슨 음식이든 가리지 않는다는 황정은은 보리밥을 비벼 먹을 때 고추장이 필요하냐고 묻습니다. 토베 얀손이 고등어구이 위에 누워 있던 레몬 조각을 맨손으로 집어 꾹 짜서 즙을 뿌렸을 때 황정은은 “정말 자상하세요”라고 말했어요.

모임에 참석한 네 사람은 동네를 떠나 곧 산도 보이고 강도 보이고 탑도 보이는 곳으로 이동합니다. 강가의 탁 트인 시야에 훅 솟아 있는 탑을 보며 토베 얀손이 물어요. “저거 오래된 거야?” 미셸 푸코가 답합니다. “응.” 탑은 1000년 됐습니다. 1000년은 오래일까요? 네 사람은 정자에서 들이치는 비를 맞으며 자신의 이름 맞히기 게임을 합니다. 그 이름은 방금 옆 사람이 지어줬어요. 자신이 누군지 아무도 맞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아이스크림처럼 빠르게 녹아 없어지고 있어요. 아무래도 그들은 책을 좀더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미셸 푸코는 자신을 맞히는 것을 포기합니다. 황정은은 도시락을, 신경숙은 원고지를 꺼냈어요. 비가 잦아들고 있네요. 하나둘 배를 깔고 누워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한참 말이 없습니다. 작가들 아니랄까 봐 누구도 그만 쓰자는 말이 없네요. 글을 낭독하는 소리가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를 닮았습니다. 황정은이 싸온 떡 강정은 웃음이 나는 맛입니다. 그것은 네 사람에게 상상력을 주었고 수분을 가져갔어요.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모두 먼 길을 가야 합니다. 토베 얀손은 검지를 들어 올립니다. “일, 이, 삼, 사, 오, 육, 칠.” 탑은 칠층입니다. 탑 앞에는 탑과 똑같이 생긴 자그마한 모형이 서 있어요. 모형을 만져도 좋습니다,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 작은 모형을 손으로 여러 번 쓰다듬습니다.

<양다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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