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급격히 무너진 발해…‘숯비와 불꽃 내린’ 백두산 분화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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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천지에는 20억t의 물이 담겨 있다. 만약 마그마가 천지 내부로 올라오면 이 20억t의 물과 만난다. 물이 폭발하면서 수증기로 바뀐다. 1000도의 마그마는 급속히 냉각되면서 잘게 조각나 마치 팝콘을 튀기듯 부석이나 화산재로 바뀐다. / 이기환 제공

백두산 천지에는 20억t의 물이 담겨 있다. 만약 마그마가 천지 내부로 올라오면 이 20억t의 물과 만난다. 물이 폭발하면서 수증기로 바뀐다. 1000도의 마그마는 급속히 냉각되면서 잘게 조각나 마치 팝콘을 튀기듯 부석이나 화산재로 바뀐다. / 이기환 제공

“오시(낮 12시쯤) 함경도 부령부와 경성부에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때때로 황적색의 불꽃 연기와 같으면서 비린내가 가득… 마치 화로 가운데 있는 듯 뜨거워 견딜 수 없었다. 4경(다음날 새벽 3시 무렵) 후에야 사라졌다.”

<숙종실록> 1702년 5월 20일자가 전한 6일 전(14일) 백두산 화산 분화 소식입니다.

“아침이 되니 (화산)재가 눈처럼 흩어져 내려 1치(3㎝) 정도 쌓였는데… 강변의 여러 고을도 모두 그러했다….”

“비린내 나는 뜨거운 공기가…”

이 <숙종실록> 기록을 토대로 ‘1702년 백두산 분출의 강도와 화산재의 규모’를 검토한 분석논문(윤성효·이정현, 2011)이 있는데요. 부령부와 경성부는 백두산에서 똑같이 139㎞ 떨어진 곳(부령부는 동쪽·경성부는 동남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백두산 분화로 생긴 뜨거운 화산재 구름이 140㎞가량 떨어진 부령부와 경성부까지 몰려 왔다는 뜻입니다.

그 열기가 15시간(오시~4경) 이상 지속되고, 눈처럼 내린 화산재가 3㎝가량 쌓였고요.

연구자들이 백두산~부령·경성의 거리와 화산재 두께(3㎝) 등을 고려해 계산해봤는데요. 그 결과 1702년 백두산 화산 분화로 생긴 ‘화산분출물의 용량=최소 1.2㎦ 정도’라는 결론을 얻어냈습니다.

‘화산폭발지수(VEI) 5’에 해당하는 ‘대분화’에 속합니다. 기원후 79년 폼페이를 단번에 매몰시킨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지수(5) 및 화산쇄설물 용량(2㎦)과 비슷한 규모라 할 수 있습니다.

2014년 9월 말 백두산 장백폭포 밑에서 찍은 노천온천수의 모습. 2002~2005년에 백두산에는 이상 전조증상이 빈번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최근 화산가스 성분이나 온천수 온도 측면에서 별다른 이상이 관측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지금 화산 분화가 임박했다는 것은 억측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백두산은 언제라도 터질 수 있는 위험한 화산이 분명하다. / 이기환 제공

2014년 9월 말 백두산 장백폭포 밑에서 찍은 노천온천수의 모습. 2002~2005년에 백두산에는 이상 전조증상이 빈번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최근 화산가스 성분이나 온천수 온도 측면에서 별다른 이상이 관측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지금 화산 분화가 임박했다는 것은 억측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백두산은 언제라도 터질 수 있는 위험한 화산이 분명하다. / 이기환 제공

“하늘에서 용의 비늘, 숯비가 내립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백두산 분출 관련 기록이 줄을 잇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선시대부터, 그것도 주목할 만한 사례만 살펴봅시다. “함경도 단주(단천)에 연기도, 안개도 아닌 것이 하늘을 뒤덮었고, 숯비(炭雨)가 내렸다”(<태종실록> 1401년 윤삼월 25일)는 기사가 보입니다. 화산재 구름에서 떨어진 돌조각(부석)을 ‘숯비’로 표현한 겁니다.

1597년(선조 30) 8월 26~28일 함경도 삼수 일대의 지진 및 화산 분출 보고 또한 심상치 않습니다.

“8월 26~28일 함경도 삼수를 중심으로 곳곳에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포를 쏘는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크기가 몇 아름씩 되는 바위가 터져나와 큰 산을 넘어갔습니다….”(<선조실록> 1597년 10월 2일)

1654년(효종5) 10월 21일에는 전 판서 조경(1586~1669)이 ‘직접 목격했다’는 천문현상을 알립니다.

“비도, 연기도 아닌 것이 북쪽에서 옵니다. 소리는 바람이 몰아치듯, 냄새는 비린내 같기도 한데… 가까이는 경기 적성·장단 사이와 멀리는 함경도의 남쪽 경계까지 일어났습니다”(<효종실록>)

1668년(현종9) 4월 23일에도 심상찮은 일이 일어납니다.

함경도에 화산재가 쏟아졌다는데 ‘하늘 주위가 20여 곳이 터졌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이때 좌의정 허적(1610~1680)은 “동쪽 하늘이 갈라졌는데 빛이 화경(火鏡·볼록렌즈)과 같았다”고 보고합니다(<현종실록> 1668년 4월 26일).

그런 뒤 30여 년 만인 1702년 대분화가 일어난 겁니다. 이후에도 백두산 화산 분화 기록은 끊이지 않습니다.

청나라 관리인 유건봉(1865~1952)의 <장백산강지략>에는 1903년 분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천지에서… 별안간 폭발 소리가 나서 차바퀴만 한 큰 불덩이가 떨어지고 수면 위에 수많은 불꽃이 낮처럼 환히 보였다.”

베수비오 화산의 100배 폭발

어째 좀 이상하죠. 과거의 백두산 분화를 언급하면서 고갱이는 빼먹고 전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연히 10세기 초·중반에 있었던 백두산의 초대형 분화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지난 2000년 동안 가장 규모가 큰 화산 분화였죠. 이때의 백두산 화산 폭발 지수(VEI·Volcanic Explosivity Index)’는 7이고요. 화산쇄설물의 용적은 83~117㎦(최대 150~170㎦)로 추정됩니다. 분출한 화산재는 대기 위로 25㎞ 이상 솟구쳐 올라갔고요.

겨울철 편서풍과 제트기류를 타고 함경도~동해안을 거쳐 일본열도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지금도 홋카이도(北海道)와 혼슈(本州) 북부에는 그때 쏟아져 내린 화산재가 5㎝ 이상 쌓인 곳이 있답니다.

백두산 화산 분출(화산지수=7·화산쇄설량=100㎦)은 베수비오 화산 폭발(화산지수=5·화산쇄설량=2㎦)의 무려 100배나 된답니다. 베수비오 화산 50개가 터진 것에 비유할 수 있고요.

화산학자들이 현지조사를 통해 확인한 10세기 중엽의 백두산 대분화. 10세기 초반부터 소·중규모의 분화를 거쳐 946년 11월~947년 2월에 기원후 2000년 동안 가장 규모가 큰 ‘화산지수 7’의 대분화가 일어났다. 화산분출물의 용적은 83~117㎦(최대 150~170㎦)로 추산된다. 그때 분출한 화산재는 대기 위로 25㎞ 이상 치솟아 겨울철 편서풍과 제트기류를 타고 함경도~동해안을 거쳐 일본열도까지 영향을 끼쳤다. / 윤성효·이정현의 논문과 소원주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 2010, 사이언스북스

화산학자들이 현지조사를 통해 확인한 10세기 중엽의 백두산 대분화. 10세기 초반부터 소·중규모의 분화를 거쳐 946년 11월~947년 2월에 기원후 2000년 동안 가장 규모가 큰 ‘화산지수 7’의 대분화가 일어났다. 화산분출물의 용적은 83~117㎦(최대 150~170㎦)로 추산된다. 그때 분출한 화산재는 대기 위로 25㎞ 이상 치솟아 겨울철 편서풍과 제트기류를 타고 함경도~동해안을 거쳐 일본열도까지 영향을 끼쳤다. / 윤성효·이정현의 논문과 소원주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 2010, 사이언스북스

백두산 화산 분화는 왜 이렇게 충격적인 재앙을 안겼을까요. 백두산 천지에 20억t의 물이 있습니다.

만약 마그마가 천지 내부로 올라오면 이 20억t의 물과 만나게 되겠죠. 즉 마치 달궈진 기름이 든 프라이팬에 찬물을 붓는 격입니다. 그 경우 물이 폭발하면서 수증기로 바뀌죠. 1000도의 마그마가 물을 만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급속히 냉각되면서 잘게 조각나 마치 팝콘을 튀기듯 부석이나 화산재로 바뀐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부피가 커지고 분화하면서 수증기와 함께 대기 상층으로 화산재 기둥(분연주)이 솟구쳐오릅니다.

“하늘에서 북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화산 분화였다면 당대 사관이 역사서에 기록했겠네요. 그 무렵 <고려사>에 보이기는 합니다.

<고려사> ‘세가·정종 원년(946)’조는 “하늘에서 고동(북) 소리가 들려 죄인들을 사면했다”고 했습니다.

<고려사> 기록은 그러나 이게 끝입니다. 이상하죠. 다른 폭발기록은 상세하게 전하면서 정작 가장 충격적인 재앙 소식은 그렇게 소략하게 전했을까요. 이해는 갑니다. 당대 고려는 백두산까지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백두산 곳곳에 10세기 중반의 대분화 때 쌓인 화산분출물 퇴적층이 보인다. 남쪽에는 그 두께가 60m나 되는 곳이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대분화였음을 증명해준다. / 윤성효·장철우·김선경의 논문

백두산 곳곳에 10세기 중반의 대분화 때 쌓인 화산분출물 퇴적층이 보인다. 남쪽에는 그 두께가 60m나 되는 곳이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대분화였음을 증명해준다. / 윤성효·장철우·김선경의 논문

서쪽으로는 의주, 동쪽으로는 원산 이남이었죠. 갈 수 없는 지역의 화산 폭발을 자세하게 기술하는 데 한계가 있었겠죠.

또 그해의 백두산 분화는 겨울철에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화산재가 겨울철 편서풍과 제트기류를 타고 동쪽으로 흘러간 겁니다. 그러니 백두산에서 465㎞ 떨어진 개경(서남쪽)에서는 ‘하늘에서 치는 북소리’처럼 들렸을 겁니다.

윤성효 교수가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설명하네요. 즉 그 시대에 화산폭발지수 7 이상의 대폭발이 일어났다면 어땠을까요.

1000도가 넘는 화쇄류(화산분출물과 뜨거운 가스 혼합체)는 초속 약 10~300m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는데요.

백두산의 경우 10세기 초·중반의 화산 폭발로 인한 화쇄류가 반경 60㎞까지 퇴적돼 있답니다.

그렇다면 어떨까요. 그 안에서 화산 폭발을 목격한 사람이 생존할 가망성은 전무합니다.

목격한 사람들이 살아남지 못했는데, 어떻게 기록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도 ‘카더라 통신’으로나마 멀리서 기록할 수는 없었을까요. 당시 동북아는 그러나 극심한 혼란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당나라(618~907) 멸망 후 5대10국의 지방정권이 난립하고 있었죠. 한반도에서는 후삼국이 각축을 벌이다가 고려로 통합되는 와중이었고요.

백두산 곳곳에서 매몰돼 있는 탄화목 퇴적층. 화산분출 때 화쇄류에 의해 매몰되면 고온 때문에 산림이 진공상태에서 숯이 된다. /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소원주 지음·사이언스북스)

백두산 곳곳에서 매몰돼 있는 탄화목 퇴적층. 화산분출 때 화쇄류에 의해 매몰되면 고온 때문에 산림이 진공상태에서 숯이 된다. /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소원주 지음·사이언스북스)

갑자기 붕괴한 해동성국

여기서 ‘발해의 멸망 미스터리’가 등장합니다. 발해는 698년 건국 후 거침없이 성장해 마침내 해동성국의 기치를 세웠던 왕조입니다. 하지만 멸망의 순간(926년 1월)은 너무도 허망했습니다. 거란이 출병한 것이 925년 12월 말인데요.

거란은 보름도 안 돼 발해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변변한 저항도 없었습니다. <요사>는 “(거란이) 발해의 ‘민심이 멀어진’(離心) 틈을 타 군사를 움직여 싸우지 않고 이겼다”(<요사> ‘야율우지전’)고 썼습니다.

그 무렵 <고려사>에는 발해의 왕·귀족과 장관들이 멸망(926)하기 몇 달 전부터 500명, 100가구, 1000가구 등을 이끌고 대규모 ‘엑소더스’에 나섰다는 기사가 속출합니다.

역사학자들은 거란이 밝힌 ‘민심의 이반(離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지배세력인 고구려인과 피지배세력인 말갈인 사이의 모순, 귀족들의 사치 생활, 통치계급 내부의 갈등을 꼽은 거죠.

그러나 각종 역사서에 발해 사회 내부의 모순을 가리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 엑소더스 행렬이 발해 멸망 이후에도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발해 멸망 직후 거란(요)에 의해 강제 이주당한 발해인은 9만4000여 가구(<요사>)에 이릅니다.

고려 망명 행렬도 이어졌습니다. 50년간 고려에 망명한 ‘탈발자(脫渤者)’가 10만여명으로 집계됩니다. <고려사>에는 심지어 “934년(태조 17) 발해 세자 대광현이 수만명의 무리를 이끌고 망명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일본 아오모리(靑森)현 나카노타이(中野平) 유적에서 확인된 백두산 화산재층. 그 밑에는 915년 분출한 도와다 (十和田) 화산재층이 깔려 있다. 백두산 분출이 915년 직후라는 것을 일러준다. /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소원주 지음·사이언스북스)

일본 아오모리(靑森)현 나카노타이(中野平) 유적에서 확인된 백두산 화산재층. 그 밑에는 915년 분출한 도와다 (十和田) 화산재층이 깔려 있다. 백두산 분출이 915년 직후라는 것을 일러준다. /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소원주 지음·사이언스북스)

발해 멸망=백두산 폭발 때문?

그래서 ‘발해 멸망=백두산 분화’로 연결짓는 연구가 있습니다. 백두산에서 날아온 화산재의 퇴적층과 함께 대분화에 이은 화쇄류로 묻혀버린 탄화목 연대를 측정한 결과를 토대로 한 연구인데요. 즉 10세기 백두산 화산은 926년 무렵, 934년 전후, 937~938년의 소·중 규모 분화를 거쳐 946년 무렵의 대폭발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대폭발을 앞두고 소·중 규모 분화와 같은 심각한 전조현상이 이어졌을 거라는 겁니다.

발해 장군과 왕·귀족이 잇달아 고려로 망명했던 바로 그 시기와 맞아 떨어지죠. 이 무렵 백두산 대폭발의 전조현상이 나타나자 이를 두려워한 사람들이 대규모 엑소더스에 나선 것은 아닐까요. 그것이 <요사>가 말하는 민심의 이반, 즉 이심(離心)은 아니었을까요.

또 <요사>에는 거란이 발해를 멸한 뒤 “압록강, 두만강, 쑹화강 일대와 연해주·동해안의 마을을 폐현(廢縣)시켰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이게 심상치 않습니다. 이들 지역에는 백두산 대분화로 인한 화산이류(화산분출물+물)의 해일이 일어난 흔적이 역력한데요. 이것이 화산 분화로 사라져버린 마을의 흔적은 아닐까요.

1702년 5월 14일에 일어난 백두산 분화의 규모는 ‘화산폭발지수(VEI)=5’ 정도의 대분화로 추정된다. 연구자들이 백두산~부령·경성 간 거리(139㎝)와 화산재 두께(3㎝) 등을 고려해서 계산한 결과 ‘화산분출물의 용량=최소 1.2㎦ 정도’라는 결론을 얻어냈다. / 윤성효·이정현의 논문

1702년 5월 14일에 일어난 백두산 분화의 규모는 ‘화산폭발지수(VEI)=5’ 정도의 대분화로 추정된다. 연구자들이 백두산~부령·경성 간 거리(139㎝)와 화산재 두께(3㎝) 등을 고려해서 계산한 결과 ‘화산분출물의 용량=최소 1.2㎦ 정도’라는 결론을 얻어냈다. / 윤성효·이정현의 논문

반경 82~87㎞ 내는 절멸

그럼 앞으로가 문제겠네요. 백두산 대분화는 또다시 일어날까요. 일각의 우려처럼 임박했나요.

한때 불안했습니다. 2002~2005년 이상한 전조증상이 빈번했거든요. 그러나 최근 화산가스 성분이나 온천수 온도 측면에서 별다른 이상이 관측되지 않고 있답니다. 그래서 화산 분화가 임박했다는 이야기는 억측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백두산은 언제라도 분화할 수 있는 위험한 화산이 분명합니다.

소름 돋는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만약 화산지수 7의 규모로 분화한다면 어떨까요. 분연주의 높이가 20~30㎞ 정도이고, 쇄설류는 무려 82~87㎞나 흐를 것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북한의 혜산시와 삼지연시 등은 물론 중국의 얼다오바이허(二道白河) 등 북한·중국민 수백만명이 위험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답니다.

백두산은 편서풍 지대에 속합니다. 따라서 백두산 분화가 발생하면 보통은 편서풍과 제트기류를 타고 동쪽으로 흐릅니다. 때문에 북한의 양강도와 함경도 지역에 화산재가 비처럼 내리게 됩니다. 일본열도도 일정한 피해가 예상됩니다. 인명피해는 물론 도로와 댐, 전기, 광산 등이 마비될 겁니다. 생태계 변란과 토양침식, 식수 오염, 냉해 등이 악순환이 초래될 것이고요.

순망치한

남한 쪽은 어떨까요. 백두산이 편서풍 지대에 속하므로 아무 문제가 없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봄철이나 이른 여름철에 백두산 지역에 북동기류가 유입되면 화산재가 남서쪽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 등에 화산재가 개경이나 적성·장단까지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지 않습니까.

직접 피해를 입지 않는다 해서 팔짱을 끼고 있으면 안 됩니다. 화산재 때문에 항공기가 결항해 25억달러 이상의 피해가 예상된다는 연구도 있거든요. 그리고 돈이 문제겠습니까. ‘순망치한’이라는 고사가 있죠. 발해 백성이 어떻게 됐습니까. 남으로 남으로 엑소더스 대열에 나섰잖습니까.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남과 북이 적극적으로 협력해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I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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