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물질 소송에서 과학의 의미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눈이 녹으면? 문과생은 ‘봄이 온다’를 떠올리고, 이과생은 ‘물’을 떠올린다고 합니다. 정의를 영어로 하면요? 문과생은 ‘justice’를, 이과생은 ‘definition’을 생각한다고 하네요.

[취재 후]유해물질 소송에서 과학의 의미

지난 호 표지 이야기 ‘연구 한계만 캐묻는 60인의 변호인단…과학은 또 ‘오역’될까’를 취재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2021년의 가습기 살균제 제조·유통기업 SK·애경·이마트 무죄 판결은 어쩌면 문과·이과 간 ‘오역’이 초래한 비극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정확히는 법률가·과학자 간의 ‘오역’이겠지요.

지난 호 보도로 말씀드렸듯, 현재 서울고등법원에서는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던 가습기 살균제 제조·유통 기업 SK·애경·이마트 전직 임원들의 항소심이 진행 중입니다. 변호인들은 1심 때처럼 ‘모든 연구에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전략을 끈질기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1심에선 이런 전략이 통했으니까요.

2년 전 1심 재판부는 지난 10년간 수행된 연구 20여 건 가운데 가습기 살균제와 건강피해 간 인과관계를 증명한 연구가 단 한 건도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판결문에선 연구자 스스로 말한 ‘한계점’이 연구를 폐기할 주된 이유로 언급됩니다.

당시 재판부는 각 연구의 의미와 한계점을 종합하는 대신, 연구를 각개격파하듯 논리를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실제 사례와 유사한 동물실험 결과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실험실 과학에 집착”했지요(‘과학적 증거와 인과관계 판단 기준 연구’).

하지만 인과성 증명 방법에 동물실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에선 30여 년 전부터 유해물질 소송에서 ‘역학’을 통해 인과관계 증명이 가능하다고 보고 어떤 역학 연구가 증명에 성공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을 마련해 발전시켜오고 있습니다. 역학은 다양한 인구집단의 질병 발생 원인을 추적하는 학문으로, 동물실험과 달리 ‘사람 대상 조사’가 기반입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과 다른 태도를 보여줄 수 있을까요? 유해물질 소송에서 과학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판결이 나오길 기대해 봅니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취재 후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