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비석 파편’이 품은 그해 여름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5·16 군사정권이 파괴한 ‘백조일손지지’ 위령비 조각을 담아놓은 보관함 / 전호일 제공

5·16 군사정권이 파괴한 ‘백조일손지지’ 위령비 조각을 담아놓은 보관함 / 전호일 제공

조각난 돌무더기가 들어 있는 유리함.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자’가 새겨진 돌덩이들도 보인다. 오른쪽에는 멀쩡한 모습의 위령비가 서 있고, 유리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5·16군사정권에 의해 파괴된 ‘百祖一孫之地(백조일손지지)’ 묘비의 파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예비검속(혐의자를 미리 잡아 놓는 일)과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적에게 부역할 잠재적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미리 ‘정리’한다는 명분.

하지만 좌익 활동과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도 ‘의심’만으로, 때로는 사적인 원한이나 복수심만으로 희생됐다. 구금에서 처형까지 이어지는 과정 역시 적법절차를 무시한 채 진행됐다. 조직적이고 전국적인 ‘전쟁범죄’로 희생된 민간인의 수는 100만 명까지 추산된다.

제주도 역시 피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예비검속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제주 ‘섯알오름’(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학살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1차 총살은 1950년 7월 16~20일경. 2차 총살은 그로부터 약 한 달이 더 지난 1950년 8월 20일 집행됐다.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희생자만 218명에 이른다.

‘빨갱이’로 몰려 목숨을 잃은 사람들. 유족들은 그 시신도 제때 수습하지 못했다. 학살이 일어난 지 6년 만인 1956년 5월에야 132기의 유골을 수습해 분묘를 세웠다. ‘조상이 다른 100여명의 뼈가 서로 엉켜서 하나가 됐다’는 의미로 ‘백조일손지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2년밖에 서 있지 못한 위령비 

3년이 더 지난 1959년에는 희생자들의 이름과 처형 경위를 새겨넣은 위령비를 세웠다. 그것이 바로 지금 유리함 안에 들어 있는 ‘돌무더기’의 정체. 위령비가 위령비로 서 있었던 시간은 고작 2년밖에 되지 못했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5월 17일 ‘용공분자 색출’을 지시했다. 이철희 육군방첩부대장은 다음 날인 5월 18일부터 전국 경찰과 군(헌병)의 협조를 통해 18개 정당 및 사회단체 등 당시 ‘혁신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예비검속을 단행했다. 그 타깃 중 하나가 바로 ‘피학살자유족회’였다.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으로 끌려간 뒤 학살당한 가족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유족들. 그들 역시 5·16 쿠데타 이후 용공세력으로 몰려 예비검속을 당했다. 억울함을 풀어달라던 그들의 활동은 어느새 ‘반국가행위’가 돼 있었다.

억울한 유족들 용공세력 내몰아 

“‘젊은이는 무슨 죄를 지었노?’ 묻길래 ‘죄지은 거 없습니다’ 그랬습니다. 푯말에 보니, 반공법도 집시법도 아니고 ‘반국가행위’라고 써놨어요. 반국가행위라니! 조선시대 같으면 역적이나 받을 죄명 아닙니까?”(진실화해위원회 소식지 ‘진실화해’ 3호 2021. 10.)

김하종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경주유족회 회장의 회고다. 1961년 8월 당시 28세의 나이로 구속된 김하종은 경찰서 지하에 40일 동안 구금된 뒤, 서울형무소 즉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다. 그는 법정에서 “김하종의 죄는 극형에 처할 것이로되 청춘이 아까워서 무기징역을 구형한다”라고 하던 검사의 말을, 구순의 노인이 된 지금까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김하종은 옥중에서 혈서까지 쓰면서 줄곧 무죄를 주장했다. 혁명재판소는 재판에 넘겨진 피학살자유족회 주요 인사들에게 ‘북한을 이롭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며 사형과 징역 15년 등 중형까지 선고했다. 김하종도 1962년 1월 ‘혁명재판소’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예비검속과 처벌의 정당성은 쿠데타 세력이 세운 혁명재판소에서조차 논쟁거리가 됐다. 당시 주임검찰관이었던 이○○은 훗날 이렇게 진술했다.

“‘전쟁 중에 억울하게 가족을 잃고 신원(伸寃)을 요구한 것인데 또 그 가족들마저 잡아들여 구속하고 반국가행위자로 만들면 그 자손이 그 일을 되풀이할 것 아닌가’라고 말한 이□□ 심판관이 속한 심판부 제5부는 일부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 무죄가 선고되자 박창암 혁명검찰부부장과 심판부 제5부 재판장이 혁명재판소 건물 복도에서 치고받으며 싸웠습니다.”(2009년 진실화해위원회 ‘5·16 쿠데타 직후 인권침해 사건 조사보고서’)

쿠데타 세력은 사람부터 먼저 잡아들여 놓고, 이들을 처벌할 법을 만들었다. 쿠데타 세력은 불법기관인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하고, 스스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제정했다. 그 법에 따라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3년 6개월 전의 일까지 소급해 처벌하도록 정했다. 이는 헌법상 ‘소급효금지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것이었다.

먼저 잡아들이고, 후에 법 만들고 

반대세력에 대한 예비검속은 5·16 쿠데타 직후인 5월 18일부터 진행됐지만,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이상이 지난 6월 22일이었다. 그 기간 동안 예비검속된 사람들은 아무런 근거 법률이 없는 상태로 ‘불법’ 구금돼 있었던 셈이다.

탄압은 주요 인사들에 대한 처벌로만 끝나지 않았다. 유족회가 세운 합동묘와 위령비까지 훼손했다. 거창양민학살사건 유족회는 희생자들의 유골을 남자, 여자, 어린이로 나눠 3기의 합동묘를 만들었다. 그러나 5·16 쿠데타 직후 경남도지사가 개장 명령을 하달해 경찰이 합동묘를 훼손했다. 위령비 역시 정으로 쪼아 글자를 지운 뒤, 비석 허리를 끊어 땅에 묻어버렸다.

“한국전쟁 중 국군이 양민을 살해한 잘못을 은폐하려고 억지를 부린 것이며 예부터 묘는 함부로 손대지 않는데 국가기관이 강제로 억울한 희생자들의 무덤을 파헤친 것이며 이는 부관참시에 해당하는 야만행위입니다.”(거창양민학살사건 유족 문병현 진술, 위 보고서)

경남 김해시 진영읍 설창리(금창피학살자장의위원회)에서도, 부산 연제구 거제동 화지산(동래피학살자유족회)에서도 같은 일이 자행됐다. 제주 서귀포 ‘백조일손지지’의 위령비가 산산이 조각난 것도 이때였다. 이후 유족들은 묘역 근처에 버려진 위령비 조각들을 찾아 다시 한곳에 모아뒀다. 지금은 새로 건립된 위령비 옆에, 유리함에 담긴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다.

‘빨갱이’로 몰려 죽은 가족들의 한을 풀어달라 외치던 사람들마저 ‘빨갱이’로 몰렸다. 전국 곳곳에서 유족회 인사들이 잡혀 들어갔다. 거창에서, 김해에서, 부산에서, 서귀포에서 묘가 파헤쳐지고 묘비가 깨어졌다. 겁에 질린 유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평생 입을 열지 못하고 원한 속에 살았다. 62년 전 그해 여름, 학살의 진실은 또 한 번 살해당했다.

1961년 당시 혁명재판소 심판관이었던 이□□이 훗날 남긴 말 한마디가 마음에 남는다. 비록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뒤에 한 증언이지만, 지금까지도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하는 말이다.

“학살행위 그 자체가 비극인데 그것을 법대(法臺)에 올려놓고 평가한 것은 불행이며,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로 국가는 유가족들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2009년 진실화해위원회 ‘5·16 쿠데타 직후 인권침해 사건 조사보고서’)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사물의 과거사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