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중국 사신 홀리고 무대붕괴 ‘인재’도…500년 전 광화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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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가 최근 광화문 월대 발굴에서 찾아낸 조선 전기의 유구와 유물. 고종 연간(1866)에 조성한 월대 아래 120㎝ 부근에서 조선 전기에 조성된 유구와 함께 햇빛을 차단할 때 쓰는 차양막의 고정장치를 확인했다. 광화문 일대에서는 이미 2007년 발굴에서 태조 연간에 조성된 광화문 석축 흔적과 조선 전기의 유구가 확인된 바 있다. /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제공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가 최근 광화문 월대 발굴에서 찾아낸 조선 전기의 유구와 유물. 고종 연간(1866)에 조성한 월대 아래 120㎝ 부근에서 조선 전기에 조성된 유구와 함께 햇빛을 차단할 때 쓰는 차양막의 고정장치를 확인했다. 광화문 일대에서는 이미 2007년 발굴에서 태조 연간에 조성된 광화문 석축 흔적과 조선 전기의 유구가 확인된 바 있다. /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제공

광화문광장은 조선시대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거두절미하고 대략 세 시기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의정부와 육조, 사헌부, 삼군부 등 중앙관청이 광화문의 좌우에 자리 잡고 있었고요.

임진왜란 와중에 경복궁 전소 이후 273년간이나 방치됐던 게 두 번째였을 거고요. 1865~1867년 경복궁 중건 이후 환골탈태한 것이 세 번째 풍경이었겠죠. 지금은 경복궁 중건 와중(1866년)에 조성된 ‘월대’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가 한창입니다.

차양막의 흔적 발굴 과정에서 심상치 않은 유구가 심심찮게 노출됐는데요.

임진왜란 이전, 즉 조선 전기에 조성된 ‘인간의 흔적’입니다. 2007년 발굴에서 돌을 쌓아놓은 흔적인 석축과 잡석 유구가 2곳 확인됐습니다. 석축은 창건 초기(1395~1398) 조성한 광화문터의 자취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비슷한 문화층에서 나온 잡석의 경우 조선 전기에 쌓은 월대 유구인지 특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발굴결과 매우 획기적인 유구와 유물이 노출됐습니다.

그 유구와 유물은 고종 연간(1866)에 세운 월대의 어도(임금이 드나드는 길) 서쪽 땅 밑 120㎝ 깊이에서 확인됐습니다. 즉 조선 전기 문화층에서 사각형 모양의 석재 1매(76×56×25㎝)가 보였고요.

그 석재를 중심으로 양쪽에 석렬(돌로 열지어 만든 시설)이 각 한 줄씩 배열돼 있었습니다.

이 사각형 형태의 석재 한가운데에 지름 6㎝의 철제 고정쇠가 박혀 있었습니다. 이 철제 고정쇠가 이번 발굴의 ‘알파요, 오메가’였습니다. 발굴단은 경복궁 근정전이나 종묘에서도 보이는 ‘차일(햇빛가리개) 고정장치’라고 판단했습니다.

일종의 ‘차양막’일까요. 광화문 앞에 ‘차양천막’을 치고 모종의 이벤트를 벌였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역린을 건드린 용봉차일 만약 임금이 참석한 행사였다면 ‘용봉차일(龍鳳遮日·용과 봉황을 새기고 기름 바른 국왕 전용 장막)’을 둘렀겠죠.

이 ‘용봉차일’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둘 있죠. 우선 세조~성종 연간의 세도가인 한명회(1415~1487)의 얘기입니다.

성종의 장인이기도 한 한명회는 유명한 개인 정자를 갖고 있었죠. 풍광이 뛰어난 ‘압구정’인데요.

1481년(성종 12)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이 바로 이 ‘압구정 관람’을 원했습니다.

광화문 월대 120㎝ 하부에서 확인된 조선 전기의 차양막 고정장치(왼쪽). 경복궁 근정전 앞에 설치된 차양막 고정장치와 똑같다. 광화문 앞에서 차양막을 설치하고 각종 행사를 펼쳤다는 이야기다. /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제공

광화문 월대 120㎝ 하부에서 확인된 조선 전기의 차양막 고정장치(왼쪽). 경복궁 근정전 앞에 설치된 차양막 고정장치와 똑같다. 광화문 앞에서 차양막을 설치하고 각종 행사를 펼쳤다는 이야기다. /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제공

이때 한명회가 “압구정이 좁아 중국 사신을 접대할 수 없다”면서 성종이 쓰는 용봉차일을 요청했습니다.

이것이 역린을 건드렸습니다. 이때 성종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는데요. 결국 한명회는 ‘임금도 몰라보는 안하무인’의 죄명으로 하옥되고, 결국 세도가의 날개가 꺾이고 말았습니다(<성종실록> 1481년 6월 25·26일 등).

이 ‘용봉차일’은 숙종(재위 1674~1720)의 환국정치에도 이용됐습니다(<연려실기술> ‘숙종조 본말고사’).

즉 1680년(숙종 6)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1610~1680)이 할아버지 허잠(1540~1607)의 연시연(시호를 받은 기념으로 열린 잔치)을 베풀 때 이 ‘용봉차일’ 사건이 벌어집니다. 마침 잔칫날에 비가 내리자 숙종이 내관을 시켜 호의를 베풀죠.

“비가 내리니 이 용봉차일을 허적의 집에 갖다주라”는 명을 내린 겁니다.

그런데 헐레벌떡 뛰어온 내관은 “이미 허적이 용봉차일을 찾아서 무단으로 가져갔다”고 보고했습니다.

이에 숙종은 “용봉차일은 (성종 때) 한명회도 쓰지 못했다”고 앙앙불락했습니다.

이 사건이 빌미가 돼 허적을 비롯한 남인 세력이 철퇴를 맞고, 서인 세력이 집권합니다.

이것이 환국정치의 시작점이 된 ‘경신대출척’ 혹은 ‘경신환국’입니다.

광화문 산대놀이에 빠진 중국 사신 여담이었고요. 광화문 앞에서 국왕용 ‘용봉차일’을 설치하고 연 이벤트는 무엇이었을까요.

왕실의 환궁 및 장례와 같은 주요 행사가 열렸고요.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장소로 활용했습니다. 임금이 친히 주재하는 과거시험(무과 전시), 군사행사도 열었습니다. 백성의 억울함을 전하는 상언과 격쟁이 이루어진 공간이기도 했죠.

굵직굵직한 이벤트가 열릴 때마다 광화문 앞에는 채붕(혹은 산대·일종의 무대)을 설치하고 다양한 공연이 펼쳐졌죠.

무대의 규모가 대단했습니다. 1488년(성종 19)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 동월(1430~1502)이 남긴 ‘조선부’를 볼까요.

“광화문 앞에 비단으로 꾸민 무대 높이가 광화문과 같고, 지극히 교묘하게 조성됐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외줄타기 하는 사람은 두 명의 동자를 세우고 춤을 추며 줄을 탄다….”(<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

특히 중국 사신을 위해 펼치는 공연은 허투루 할 수 없었습니다.

1539년(중종 39) 명나라 사신의 조선 방문 즈음에 중종이 “중국 황태자의 책봉을 알리려고 오는 사신이 한가롭게 앉아 공연이나 감상하겠느냐”고 했습니다.

가뜩이나 백성이 굶주리는 판인데, 공연을 위한 무대를 화려하게 꾸밀 필요가 없다고 한 겁니다.

사신 접대를 맡은 원접사이자 이조판서인 소세양(1486~1562)은 그러나 “아니 되옵니다”를 외칩니다.

1760년(영조 36) 4월 영조가 흥인문 오간수문에 행차해 청계천 준설의 현장을 관람한 것을 그린 <준천시사열무도> 중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국왕 행사용 ‘용봉차일(차양막)’ 속에 표현된 붉은 일산 아래 영조가 앉아 있었다. 그러나 임금의 모습을 직접 그리지는 않았다. / 부산박물관 소장

1760년(영조 36) 4월 영조가 흥인문 오간수문에 행차해 청계천 준설의 현장을 관람한 것을 그린 <준천시사열무도> 중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국왕 행사용 ‘용봉차일(차양막)’ 속에 표현된 붉은 일산 아래 영조가 앉아 있었다. 그러나 임금의 모습을 직접 그리지는 않았다. / 부산박물관 소장

“중국의 모든 연회에선 연극 공연이 빠지지 않습니다. 예전에 조선을 방문한 사신들도 모두 공연을 즐겼습니다. 너무 초라하게 하면 안 됩니다.”(<중종실록> 1539년 2월 6일)

과연 소세양의 말이 맞았습니다. 4월 10일 서울에 도착한 중국 사신이 광화문 앞 광장에서 펼쳐지는 산대놀이를 넋이 빠지도록 관람하고 입궁했습니다. 경복궁 안에서 중종과 세자, 모든 백관이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외교 결례일 수 있지만, 광화문 공연이 대단한 볼거리였음을 반증해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광화문 무대 붕괴 참사 기막힌 참사가 중국 사신이 방문한 1515년(인종 1) 5월 11일 일어납니다. 명나라 사신을 위해 설치해둔 광화문 앞 무대가 붕괴된 겁니다.

“중국 사신이 방문하면 광화문 밖에 의금부와 군기시가 좌우로 나눠 산대(무대)를 하나씩 설치하고 마음껏 공연을 펼친다. 그런데 군기시가 설치한 무대의 한 모퉁이가 무너져 관람객 수십명이 깔려 죽었다.”(<인종실록>)

마침 장마가 그쳐 많은 관람객이 몰려 있었답니다. <인종실록>은 “많은 사람이 무대에 올라가 구경하다가 사고가 났다. 희생자 중에는 두세 살쯤 되는 아이를 업은 민가의 노비도 포함돼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기둥을 세울 때 땅을 깊이 파지 않아 튼튼하지 않았다. 게다가 마침 장마 때문에 빗물이 기둥구멍에 스며들었다.”

<인종실록>은 “관람객들이 무대 위에 올라가 밟는 것을 막지 않아 깔려 죽는 변고가 생겼다”고 개탄했습니다. 광화문 앞 참사의 원인을 ‘인재(人災)’라 규정한 겁니다.

사고가 일어나기 13일 전의 <인종실록>(4월 27일자)에도 광화문 거리 공연 기사가 보입니다.

당시 창덕궁에 거처하던 인종 부부가 중국 사신 접대를 위해 경복궁으로 이어(移御·임금의 거처를 옮김)하는데요.

1760년(영조 36) 청계천 준설을 기념하는 행사를 그린 <준천시사열무도>. 청계천 준설에 참여한 모든 관계자를 연융대에 불러 연회를 베풀었다. 영조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왕실용 용봉차일을 하사해주었다. /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1760년(영조 36) 청계천 준설을 기념하는 행사를 그린 <준천시사열무도>. 청계천 준설에 참여한 모든 관계자를 연융대에 불러 연회를 베풀었다. 영조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왕실용 용봉차일을 하사해주었다. /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이때 광화문 밖에 설치된 좌우 무대에서 각종 공연을 펼쳤답니다. 인종은 “중국 사신을 위해 설치한 무대에서 나를 위한 공연을 벌이다니 참으로 미안하다”면서 “앞으로는 내가 출입할 때는 무대공연을 펼치지 마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만약 인종이 궁문에 들어설 때 무대 붕괴사고가 일어났다면 더욱 파장이 컸겠죠.

“왕후의 얼굴 좀 보자” 1440년(세종 22) 4월 6일 광화문에는 볼거리가 연출됐습니다.

온천에 갔던 소헌왕후(1395~1446·세종의 왕비)가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왕세자(문종·재위 1450~1452) 부부는 물론 숙의(종2품)·소용(정3품) 등이 왕후가 납시는 길목으로 총출동했고요. 흥인문(동대문)부터 광화문에 이르기까지 도로변에 오색천을 장식했습니다. 납시는 길마다 각종 거리 공연을 펼쳤습니다.

<세종실록>은 “왕후가 행차할 때 사대부의 부녀들이 도로 좌우에 채색 장막을 치고 흥인문에서 광화문 밖까지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과 같았다”고 전합니다.

광화문 앞 광장에서 벌어진 ‘척석놀이’ 광화문 앞은 갖가지 군사훈련을 펼치는 장소로도 활용됐습니다. 1445년(세종 27) 6월 3일자 <세종실록>은 “세자(문종)가 광화문 앞에서 무관 360명의 체력 평가시험을 주재했다”고 썼습니다.

개국 초인 1398년(태조 7) 5월 5일에는 태조(재위 1392~1398)가 남문(광화문) 앞에서 척석놀이(석전)를 관전했다는 <태조실록> 기사가 보입니다. 실록은 “두 팀으로 나뉘어 벌어진 척석놀이에서 상당수 참가자가 죽거나 다쳤다”고 전했습니다.

단순한 돌던지기 놀이가 아니었습니다. 태조는 활쏘기·말타기 등과 함께 척석(돌던지기)에 능한 사람들을 뽑아 ‘척석군’이라는 부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날의 ‘척석놀이’는 실전을 방불케 하는 군사훈련이었던 겁니다.

유생 수천명을 광화문광장에 모이라 한 영조 광화문은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통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개국초 태조가 남문(광화문) 앞에서 척석놀이(석전)를 관전했다는 <태조실록> 기사가 보인다(오른쪽). 실록은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된 척석놀이에서 상당수 참가자가 죽거나 다쳤다”고 전했다. 척석놀이는 군사훈련의 하나였다. 그림은 김준근의 ‘기산 풍속화’

개국초 태조가 남문(광화문) 앞에서 척석놀이(석전)를 관전했다는 <태조실록> 기사가 보인다(오른쪽). 실록은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된 척석놀이에서 상당수 참가자가 죽거나 다쳤다”고 전했다. 척석놀이는 군사훈련의 하나였다. 그림은 김준근의 ‘기산 풍속화’

예를 들어 “1428년(세종 10) 5월 24일 자재(사노비)가 신문고를 치려다가 의금부 당직자들에 의해 제지당하자 광화문의 종을 치고 억울함을 호소했다”는 기사가 보입니다. 세종은 신문고를 치지 못하게 한 의금부 관리 2명을 파면했습니다.

“백성의 억울함을 전하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했는데, 무슨 까닭에 금했냐”고 질타한 겁니다.

말년에 유생들의 상소를 귀찮아한 영조는 1770년 4월 5일 유생 수천명을 광화문 앞으로 불러 모아 엄명을 내립니다.

“할 말이 있는 자들은 이 자리에서 해라. 오늘 하면 벌을 주지 않겠다. 그러나 앞으로 상소로 직언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영조의 서슬에 유생들은 “없다”고 답했는데요. 영조는 참석 유생들의 명단을 기록해 잘 보관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다시는 ‘쓸데없는 상소를 올리지 마’라고 재갈을 물린 셈이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보다 보름 정도 전인 3월 21일 청주사람 한유가 도끼를 들고 궐문 밖에 엎드려 소장을 올렸는데요.

한유가 탄핵한 인물은 당대 최고 권세를 누리던 영의정 홍봉한(1713~1778)이었습니다. 영조 앞에 불려 온 한유는 “망국동(亡國洞)의 망정승(亡政丞)이라는 동요가 있는 것 아시느냐”고 합니다. 이것은 ‘안국동(安國洞)’에 살고 있는 홍봉한을 빗댄 풍자 동요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한유는 흑산도로 유배를 떠났지만, 홍봉한 역시 경질되고 말았습니다.

영조는 바로 이 한유의 도끼상소가 너무 과하다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광화문 앞 광장으로 유생들을 불러모았던 겁니다.

경복궁 광화문 앞 월대 복원 후 모습의 조감도. 월대는 1866년 경복궁 중건 때 남북 52m, 동서 29.5m 규모로 조성됐다. 월대가 완전 복원되면 사직동 방면에서 광화문을 거쳐 안국동 쪽으로 가는 도로의 선형이 반원 형태로 돌아간다. / 서울시청 제공

경복궁 광화문 앞 월대 복원 후 모습의 조감도. 월대는 1866년 경복궁 중건 때 남북 52m, 동서 29.5m 규모로 조성됐다. 월대가 완전 복원되면 사직동 방면에서 광화문을 거쳐 안국동 쪽으로 가는 도로의 선형이 반원 형태로 돌아간다. / 서울시청 제공

광화문 밖 고발 상자의 정체 광화문 밖에 이른바 ‘고발 상자’가 놓인 적도 있었는데요.

1465년(세조 11) 2월 4일의 일입니다. 당시 도성은 물론 광주(경기)·과천 등지에 도둑이 성행하자 광화문 밖에 고발 상자를 설치해뒀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방을 붙였습니다.

“도적을 고발하려는 자는 그 내용을 상세히 기록한 밀봉문을 궤짝에 넣어라. 사실이면 상을 받을 것이고, 사실이 아니어도 처벌하지 않을 것이다.”

이 고발 상자는 의금부가 관리했고요. 저녁마다 밀봉된 고발장을 승정원이 받아 임금에게 보고했답니다.

조선시대 광화문 앞 광장 1990년부터 장장 55년 예정으로 진행 중인 경복궁 복원은 ‘중건 시기’(1865~1868)를 기준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광화문 앞 월대 역시 조성 당시(1866)가 복원 기준이 된답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 건국에서 19세기까지 경복궁에 서린 역사를 지워서는 안 되겠죠.

광화문 앞 광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월대 유구에서 발굴한 ‘철제 고정쇠’를 보면서 ‘조선 시대 광화문광장’의 이모저모를 복원해봤는데요. 어떻습니까. 조선시대 광화문광장과 지금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죠.

예나 지금이나 임금과 백성이 호흡을 함께 나눈 소통의 공간이었답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I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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