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같지만 다른 계절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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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 시인 첫 시집 <여름 가고 여름>

지난봄 동남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저녁 무렵 출국인지라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해가 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과 땅의 어둠 사이로 길게 빛이 드리웠습니다. 빛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깨어나는 듯했지요. 동쪽에서 서쪽으로의 비행인지라 경계의 빛은 오래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습니다. 어둠의 속도를 추월할 수 없어 어느새 하늘은 캄캄해졌고, 별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공항을 나서자 습한 여름이 거기 있었습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봄에서 여름으로 이동한 것이지요.

채인숙 시인(왼쪽)과 <여름 가고 여름> 표지 / 민음사

채인숙 시인(왼쪽)과 <여름 가고 여름> 표지 / 민음사

몇 권째인지 모를 푸른 여권

1999년 인도네시아로 이주해 24년째 살고 있는 채인숙 시인(1971~ )은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는 게 아니라 또 여름이라 합니다. 고온다습한 열대성 기후인 인도네시아는 항상 여름입니다. 한데 시인은 여름이 지속되는 게 아니라 여름이 가면 다시 여름이 온다고 합니다. 이는 타국에 살지만, 고국에서의 습관과 생체리듬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시인은 시 ‘출국’에서 “몇 권째인지 모를 푸른 여권을 들고” 비행기에 타면서 “당신이 잠든 사이”에 슬며시 다녀오겠다고 했습니다. 수시로 고국을 오가다 보니 계절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기온의 변화가 거의 없지만, 꽃이 피고 지는 것 같은 작은 변화에서 시인의 예민한 감성으로 여름과 여름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라진 사원 옆”(‘디엥 고원’)에 핀 에델바이스나 “몸이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이하 ‘여름 가고 여름’)가 나는 ‘시체꽃(타이탄 아룸)’의 개화 소식이 북쪽 섬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데 여름은 그냥 여름일까요. 식물이 꽃을 피우는 시기는 “가장 화려한 생의 한때”입니다. 향기 대신 지독한 냄새를 피워 쉬파리, 꿀벌 등을 끌어들여 수분하는 시체꽃은 세상에서 가장 큰 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통 7년쯤 꽃 피울 준비를 하고, 핀 지 이틀이면 진다고 합니다. 시인은 “사람들은 어떤 죽음을 목도한 후에 비로소 어른”이 되고, “꽃은 제 심장을 어디에 감추어 두고” 지는지 궁금해합니다. “열한 번째,/ 이국의 이사”(이하 ‘이사’)를 한 시인에게 여름은 “아픈 것을 미련하게 참는” 감내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시인의 여름에는 “아득한 시차”(이하 ‘독작’)와 오후 5시면 해가 지는 “우기의 날들”에 비와 어둠을 벗 삼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고독이 스며 있습니다.

그런 고독은 이국의 낯선 지명들과 문화, 소설적 서사를 만나 한결 깊어집니다. 화산재를 밟으며 사라진 사원을 맨발로 오르는 여자들, 부기스의 마지막 해적이 돼 마카사르 항구를 떠난 열아홉 살 청년, 파타힐라 광장 모퉁이에서 사산도를 연주하는 노인, 열일곱 살에 처음 배를 타고 술라웨시와 순다 열도를 오간 사내, 자와어를 쓰는 이웃집 할머니 등의 이야기가 시로 다시 태어납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활화산과/ 세상에서 가장 많은 항구를 가진 나라”(이하 ‘밤의 항구 -순다2’)의 “쉽게 뜨거워지고/ 쉽게 실패”하는 사람들의 삶이지요.

시를 쓰는 것은 안부를 묻는 것

채인숙 시인은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한 지 25년 만인 2015년 ‘오장환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습니다. 시인의 고백에 의하면 이국에서 혼자 시를 쓰고, 포기하고, 외면하고, 경외하는 긴 시간 후인, 그러니까 마흔다섯 살, 인도네시아에서 산 지 17년 만이랍니다. 등단작 중 한 편인 ‘그리운 바타비아 -1945’는 바타비아(자카르타의 옛 이름)를 배경으로 식민지 기억과 낭만적 사랑을 담아낸 빼어난 작품입니다. 한국은 일본의,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식민지를 경험했는데, 인도네시아는 우리보다 이틀 늦은 8월 17일에 독립했습니다. 시인은 1945년 차양이 넓은 모자를 쓴 채 하얀 자전거를 타고 파타힐라 광장을 빠져나가는 “화란의 여자들”과 항구를 떠나 “바다를 항해하는 목선들의 긴 열”을 통해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이어 수용소를 탈출한 “북동의 식민지에서 왔다는 청년”과 고국에 두고 온 “어린 아내” 때문에 “화란인의 빨래를 다려 주는 여인”의 사랑을 받아줄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을 묘사합니다. 그림자극을 보다가 병사들에게 잡혀간 청년의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확장하지요.

남들에게는 아닐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지요. 아마도 시인에겐 ‘와양 인형극’이 그런가 봅니다. ‘밤의 그림자 극장’에서는 밤비가 내려 극이 상영되지 못하자 “하염없이 비를 바라보며” 서 있는 “씨앗 무늬 사롱을 걸친 맨발의 남자” 이야기를 시로 썼습니다. 와양은 자바어로 그림자라는 뜻입니다. 시인은 ‘브런치’에 연재한 글에서 와양은 시적이고 드라마틱한 대사, 아름다운 가믈란 연주, 인형을 조종하는 달랑의 극적인 목소리 연기 등이 어우러진 종합 예술이라 했습니다. 가장 강렬한 환상과 시적 영감을 줬다네요. 와양에 대한 연작시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시인은 “고향보다 크리스마스 섬이 더”(이하 ‘격자무늬 창문’) 가깝다면서 “12월이 왜 겨울이 아니냐고 묻는/ 너에게 답장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크리스마스섬은 1년에 한 번씩 수억 마리의 홍게가 산란을 위해 숲에서 바다로 대이동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먼 시간의 바깥을 서성이다/ 타향으로 돌아오”는 일상과 “한 번도 표정을 바꾸지 않”(이하 ‘부조’)는 계절은 “내가 쌓은 마음”을 스스로 허물고 눈물 흘리게 합니다. 시인의 마음은 수시로 그리운 곳과 사람에게로 향합니다.

시인은 결심합니다. “다시 태어나면 살던 마을을 떠나지 않”(이하 ‘다음 생의 운세’)겠다고. “지붕이 낮은 곳에서 봄을 맞고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기다리고 겨울을” 지내겠다고. 지금 고국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나 엽서를 쓰듯, “먼 나라의 당신이 보내온 엽서를 읽”겠다고. 디아스포라 시인에게 “시를 쓰는 것은 안부를 묻는 것”입니다. 사는 곳은 고향이 아닌 영원한 타향입니다.

◆시인의 말

▲첫눈이라는 아해
권애숙 지음·시인동네·1만원

[김정수의 시톡](22)같지만 다른 계절 속에서

시조는 내게 아득한 첫사랑이다. 전설이고 신화이다. 고맙다.
오래 접어두었던 날개를 덜어내며 여기까지
나를 끌고 온
이름들을 불러본다.

▲환한 저녁
유기택 지음·달아실·1만원

[김정수의 시톡](22)같지만 다른 계절 속에서

세상의 저녁은,
다 알겠다는 말보다
조금 더 환했다.
딱, 살고 싶은 만큼 어두웠다.
손이 조금 떨렸다. 용서하시라. 환했다.

▲내 중심을 낚는 이 누구신가
이금례 지음·휴먼앤북스·1만2000원

[김정수의 시톡](22)같지만 다른 계절 속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시를 만났다. 글쓰기가
나의 눈물을 닦아주었고, 용암처럼 끓는 분노를
잠재워 주었고,
몇몇 미운 사람들을
용서하게 되었다.

▲바다에 꽃을 심다
이외현 지음·리토피아·1만2000원

[김정수의 시톡](22)같지만 다른 계절 속에서

못난 자식처럼
오래 품고 어루만지다가,
낡고 닳아버린
시를 두 번째 시집으로
묶어 종이비행기에
실어 보낸다.

▲우리 손 흔들어 볼까요
이둘임·상상인·1만원

[김정수의 시톡](22)같지만 다른 계절 속에서

끈질김이었고
위로였던 언어를
이 계절과
나누고 싶습니다.

<김정수 시인 sujungih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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