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원 사랑시선집 <그곳에서 만나, 눈부시게 캄캄한 정오에>
지난 주말 고향에 다녀왔습니다. 살던 집 문이 열려 있어 빼꼼 들여다보자 개가 사납게 짖어댔습니다. 아무도 내다보지 않더군요. 제가 살던 집 옆 잠실은 낡아 허물어져 갔고, 공동우물은 뚜껑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하얀 꽃 만발하던 이웃집 살구나무와 개나리 울타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친구들과 공을 차던 마당은 왜 그리 좁던지요. 한밤에 살금살금 복숭아 서리를 하던 친구들은 어디서 잘살고 있을까요. 마을을 나서는데, 옷에 쓱쓱 문질러 먹던 복숭아 맛이 새삼 그리웠습니다.
지고지순한 사랑인데 약간은 무서운
지난 6월 사랑시선집 <그곳에서 만나, 눈부시게 캄캄한 정오에>를 낸 강기원 시인(1957~ )은 사랑을 과일로 치면 복숭아 같은 것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있으면 손목이, 가슴을 대고 있으면 달아오른 심장이”, 그리고 서로 하나가 됐을 땐 “송두리째 서서히 물크러지며 상해가는 것”이 사랑이라 합니다. ‘물크러지다’는 썩거나 물러서 제 모양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일그러지거나 닳아 원래의 형체가 꽤 손상되는 ‘뭉크러지다’보다 강도가 세죠. 또 진정한 사랑은 사랑한다고 속삭이면서 “서로의 살점 뭉텅뭉텅 베어 먹는 것”, 앙상한 늑골만 남을 때까지 “남김없이 빨아 먹”고, “마지막까지 함께 썩어”가고, “썩어갈수록 향기가 진해지는 것”이라 합니다. 시인이 말하는 복숭아는 수밀도(水蜜桃) 같습니다. 껍질을 벗겨 먹으면 과즙이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흐르는. 제가 어렸을 때 서리해 먹던 복숭아지요. 한데 시인이 원하는 사랑은 지고지순한데, 약간은 무섭습니다.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이라면서도, 서로를 탐하다가 죽는 것이라 노래하는 듯합니다. 하긴 자기는 손해를 보지 않으면서 상대에게만 희생을 요구하면,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겠지요.
시선집에는 사랑을 음식에 비유한 시가 몇 편 더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전화를 기다리며 혼자 저녁을 먹는 쓸쓸함을 드러낸 ‘우무’,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고 싶은 욕망을 노래한 ‘무화과를 먹는 밤’, 한 번 맛보면 잊을 수 없는 만두처럼 사랑의 허기를 채우길 원하는 ‘만두’, “나의 얼굴, 팔, 다리, 심장”으로 만든 베이글을 그대만을 위해 내주겠다는 ‘베이글 만들기’, 그리운 그대의 속내를 원 없이 들여다보려는 ‘절여진 슬픔’, “징그러운 그리움일랑/ 아예 뭉그러질 때까지” 나를 끓여 그대에게 주겠다는 ‘곰국’ 등. 특히 헬렌 쉬르벡의 ‘금발의 소녀’ 그림과 어우러진 ‘그린티 아이스크림’은 “매혹적이나 그대 숨결 닿자마자 사라지는/ 그윽해도 끝까지 들켜버리지는 않”아 “한없이 세심하게 음미해줘야 하는” 연인 같은 맛이랍니다. 한데 말입니다. 시인의 사랑은 받기보다는 주는 사랑입니다. 내 육체와 영혼까지 갈아 그대에게 바칩니다. 혹시 그런 사람을 원하는 것일 수도, 절대자를 향한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다섯 권의 시집에서 고른 사랑시 50편
시선집에는 강기원 시인이 쓴 다섯 권의 시집에서 사랑시만 골랐습니다. <바다로 가득 찬 책> 16편,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 14편, <다만 보라를 듣다> 12편, <지중해의 피> 7편,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 1편 등 모두 50편을 실었지요. 시편마다 시와 어울리는 세계 유명 화가 29명의 그림 52편을 함께 수록해 ‘읽는 맛’에 ‘보는 맛’을 더했습니다. 수록 화가는 표지 그림 ‘헬레나 클림트의 초상’을 그린 구스타프 클림트를 비롯해 바실리 칸딘스키, 에곤 실레, 에드가르 드가, 에드바르 뭉크, 조르주 쇠라, 클라라 피터스, 클로드 모네, 폴 고갱, 프리다 칼로 등입니다. 국내 유일의 이원미 화가는 시인의 친구라네요.
시인은 시선집 발간 소감에서 “많이 아팠고, 많이 행복했고, 꽤 자주 불행했다”며 “돌아보니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었던 담즙의 시간들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그 시간 속에서 만난 상제나비, 여울고양이, 은하, 푸른 수국, 초록각시뱀, 죽은 말, 로브그리예, 로제타석… 나의, 그리고 너의 아바타들을 이제 한 자리에 불러 모은다”면서 “사랑의 사슬로 엮어 당신 발아래에 놓는다. 당신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점점이 꽃잎 위에 고인다”고 했습니다. 시인에게 사랑은 “상처에 상처를 맞대고/ 서로 멍드는 일”(‘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일’)처럼 여전히 어려운가 봅니다
표제는 ‘정오의 카페 7그램’에서 뽑았습니다. “그곳에서 만나”자 했는데, 그곳은 어디일까요? “너와 내가 깃털보다/ 가벼워지는”, “우리의 윤곽이 사라지는”, “미농지보다 얇게 널 볼 수 있는” 곳이라 합니다. 문득 한 장면이 떠오르네요. 영화에서 강한 햇빛 속의 그림자 같은 한 사람이 점점 가늘어져 결국 사라지는 장면 말입니다. 불현듯 당도한 네가 늦은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되는 그곳은 또한 “우리의 질량이 같아지는” 묘한 장소입니다. “나의 7그램에/ 너의 7그램을 합해도/ 여전히 7그램”인 곳이랍니다. 왜 7g일까요. 1907년 미국 매사추세츠 병원 의사 던컨 맥두걸이 발표한 논문에 ‘영혼의 무게는 21g’이라 했다네요. 결핵환자가 숨을 거두는 순간 특별히 개조한 침대 아래쪽의 저울로 몸무게 차이를 확인했는데, 환자 6명 모두 숨을 거두는 순간 갑자기 몸무게가 21g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카페 7그램이라는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이 있고요, 시인은 사랑에 빠지기에 적당한 ‘영혼의 무게’가 7g이라 합니다. 카페 7그램에서 사랑 7g과 7g이 만나니 21g이 되는 것이지요. 커피가 몸에 스미듯 그렇게 “우리가 흔적도 없이 스며”들 수 있는 곳이니 “눈부시게/ 캄캄한/정오”일 것입니다.
시인은 사랑이 신비롭다고 합니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타자를 만나 매혹에 빠지고, 타자의 초록빛에 물들고, 영원할 것 같은 사랑도 마침내 아픈 이별을 맞이하겠지만, 사랑을 통해 비로소 나와 타자가 화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록 시편은 그러나 화해보다 불화에 가깝습니다. “어림도 없지”(‘블랙’), “결국 떠나갔어?/ 이젠 그의 허물을 벗어버”(‘칵테일’)린다고 하니 말입니다.
◆시인의 말
▲해낙낙
조성국 지음·시인의일요일·1만2000원
일부러 갖지 않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켜켜이 포개어 둔
가진 것을 비워 가듯 내버리려 애썼다.
그 덕분에 내가 참 많이 가벼워졌다. 해낙낙해졌다.
▲사람은 사랑의 기준
김박은경 지음·여우난골·1만2000원
다정한 사람은
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될까
생각하면 미안해집니다.
영원은 알 수 없지만
순간은 놓지 않겠습니다.
▲다정한 무관심
김영주·현대시학·1만원
아무것도 없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내가
또 한 권의 말빚을 남기고 만다.
▲날씨가 되기 전까지 안개는 자유로웠고
정영효 지음·문학동네·1만2000원
이제는 작별의 시간이다.
▲일종의 마음
이제야 지음·시인동네·1만원
다정한 햇볕이 쏟아지던 날은 올리브나무를 접어두는 습관이 생겼다. 다행이라는 마음들이 사실은 다정하지 않다는 인사 같아서 일종의 마음이라고 적었다.
<김정수 시인 sujungih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