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이사의 의무는 어디까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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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기업과 스타트업 창업주의 복수의결권을 허용한 벤처기업육성법 개정안이 4월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되고 있다.

벤처기업과 스타트업 창업주의 복수의결권을 허용한 벤처기업육성법 개정안이 4월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되고 있다.

벤처기업 창업주에게 복수의결권을 부여하는 벤처기업법 개정 법률이 지난 5월 16일 공포돼 올해 11월 17일부터 시행에 들어간다. 과연 이 개정 법률이 벤처산업을 획기적으로 활성화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지배적 영향력을 손쉽게 확보한 창업주가 혹시라도 부당하게 사익을 추구할 가능성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는 단순히 벤처업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재벌을 포함한 우리나라 경제계 전반의 문제다. 오늘은 이런 점에서 회사를 경영하는 이사가 부담하는 의무는 무엇이고, 또 이것을 규율하기 위해 필요한 정책 과제는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현대 경제에서 회사는 이사(사실상의 이사 포함) 또는 그 집합체인 이사회가 경영한다. 회사법은 이들에게 일정한 의무를 부과하고, 그 의무를 준수하지 않은 경우 민사적으로 제재한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이사의 의무에 관한 우리나라의 현실이 대단히 후진적이라는 점이다. 특히 현실이 이 지경이 된 이면에는 우리나라 법원의 어처구니없는 태도가 자리하고 있다.

이사의 의무 밑바닥에는 회사를 보는 영미법적 시각이 깔려 있다. 회사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것(즉 ‘사단법인’)인데 이 사람들을 주주라고 하고 이들이 낸 돈이 자본금이 된다. 주주들은 회사를 만든 후 자신들이 이를 직접 경영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우므로 ‘이사’라는 대리인에게 이 자본금을 맡기고 “이 돈을 맡아서 우리를 위해 잘 불려 달라”고 부탁한다.

영미법적 시각에서 보면 이 관계는 기본적으로 신탁 관계다. 전체 주주들이 위탁자 겸 이익수령자이고, 대리인인 이사가 수탁자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회사법에서 말하는 이사의 의무는 바로 이 수탁자의 의무에서 발전된 것이다.

관리자의 주의 의무와 ‘전체 주주’에 충성 의무

그럼 주주의 돈을 맡은 이사는 수탁자로서 어떤 의무를 부담하는가? 하나는 그 돈을 ‘잘 관리할 의무’다. 이것을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주의 의무(duty of care)”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우리를 위해’ 행동하라는 의무다. 이사 자기 자신이나 제3자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체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회사를 경영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통상 “충실 의무” 또는 “충성 의무(duty of loyalty)”라고 한다.

만일 이사가 의무를 다하지 못해 문제가 생긴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사에게 정당한 항변이 있다면 봐주고, 없다면 제재를 가하거나 잘못된 결과를 바꿔야 한다.

우선 주의 의무를 다하지 못해 문제가 생긴 경우를 보자. 통상 이 결과는 회사의 손해로 표출된다. 따라서 전형적인 해법은 손해배상이다. 다만 이사는 “내가 의무를 태만한 것이 아니라 사업가로서 신중한 판단의 내린 결과인데 공교롭게 일이 그렇게 된 것뿐이다”라는 항변을 할 수 있다.

조금 더 어려운 문제는 충성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이다. 왜냐하면 그 결과가 반드시 회사 재무제표상의 손해로 표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이 합병하는데, 가상적으로 삼성물산의 이사(또는 사실상 이사)들이 제3자의 이익을 위해 일을 처리함으로써 불리한 합병비율을 기반으로 합병을 강행했다고 해보자.

이 가상적인 사례에서 삼성물산의 이사들은 이해상충의 상황에 처했는데 그 상황에서 삼성물산 주주의 이해를 최우선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용인해서는 안 되는 합병이 발생하고, 삼성물산의 주주들은 재산상의 손해는 물론이고 합병 전 삼성물산에 대한 주주로서의 통제권을 상실하게 됐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적절한 구제책은 무엇일까? 우선 관심을 ‘회사 재무제표상의 손해’로만 국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합병비율이 무엇이 되건 회사 재무제표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삼성물산 주주의 손해’에 관심을 집중해 부당한 합병비율에 따른 손해만 배상해 주면 끝일까? 이것도 불충분하다.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돈을 준다고 합병 전 회사에 대한 주주로서의 통제권이 되살아나지는 않는다. 결국 적절한 구제책은 합병을 무효로 만들고 원래 상태를 복구하는 것이다.

그럼 이때 이사가 사용할 수 있는 항변은 무엇일까? ‘신중한 사업가로서의 판단’ 운운은 항변이 되지 않는다. 문제의 본질이 이해상충이기 때문이다. 항변이 성립하려면 기본적으로 ‘주어진 이해상충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실질적으로 완전히 공정한 절차에 따른 의사결정을 했다’는 점을 보여야 한다. 예를 들어 대주주가 선임한 이사들을 모두 배제하고 나머지 이사들로 의사결정을 하고, 대주주는 주주총회에서도 자신의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는 것 등이 그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체 주주의 이익을 위한 공정한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여건을 만들었다는 점이 항변의 요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떠한가? 제도는 파편적으로 도입됐으나 핵심원리는 부정되고 있다. 특히 후진적인 부분은 충성의 의무 부분이다. 대법원은 그 유명한 삼성에버랜드 사건에서 ‘이사는 회사에만 의무를 부담할 뿐, 주주에게는 의무를 부담하지 않는다’는 어처구니없는 판결(2007도4949)을 내렸다. 그리고 이해상충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돈만 물어주면 그뿐”이라는 것이 기본적 태도다. 의사결정 과정이 “이해상충에 오염됨이 없이 완전하게 공정했는가”는 사실상 법원의 판단 준거가 아니다.

대법원 판례 변경 어렵다면 상법 개정을

결국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방법은 대법원이 기존 판례의 문제점을 깊이 인식해 판례를 변경하는 일이다. 즉 이사는 회사 및 전체 주주에 대해 의무를 부담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의무별로 이사가 사용할 수 있는 항변과 사용할 수 없는 항변을 잘 구분하고, 의무 위반 시 구제책에 대해서도 금전적 손해배상만이 아닌 원상회복(즉 ‘변화된 상태의 무효화’)을 적절히 활용해야 한다.

법원이 태도를 바꾸지 않을 경우 어찌할 것인가? 차선책으로 상법을 개정해야 한다. 지금 국회에는 이사가 회사뿐만 아니라 총주주 또는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위해서도 의무를 부담한다는 취지의 상법 개정안(박주민 의원안과 이용우 의원안)이 발의된 상태다. 벤처기업법 통과를 위해 혈안이 됐던 더불어민주당은 이제 큰 숙제를 떠안았다. 이 상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일이다. 이것은 모호한 효과를 위해 기본 원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기본 원리가 왜곡되고 있는 부당한 현실을 바로잡는 것이다. 국회의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응답해야 한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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