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4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에서 ‘상법 개정 이슈’ 관련 브리핑을 했다. 이례적이다. 상법은 일반적으로 ‘금융 관련 법령’에 포함되지 않으며, 소관 부처 역시 법무부다. 설사 상법이 포괄적 의미에서 ‘금융 관련 법령’에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그 주무부서는 금융감독원이 아니라 금융위원회다(금융위원회는 국무총리 산하의 행정위원회이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국무총리실 소관 업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과거 검사를 지냈던 사람이 개인 자격으로 자신의 사견을 밝힌 것도 아니다. 이례적인 수준을 넘어 잘못한 행동이다.
이복현 원장 발언 내용 측면서도 부정확
이복현 원장의 발언은 내용 측면에서도 부정확해 본인이 브리핑의 목적으로 암시하는 “회사법 영역에서의 건강한 토론 진행이나 해석”을 오히려 저해할 위험성이 크다. 이하에서는 필자가 이해하고 있는 회사법상 이사의 의무에 대해 간단히 살펴봄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건강한 토론 진행에 기여하고자 한다.
회사의 이사는 기본적으로 ‘회사의 경영이라는 문제에 관하여 신뢰를 받은 자’라고 볼 수 있다. 영어로는 신뢰 혹은 믿음과 깊은 관련이 있는 피두시어리(fiduciary·수탁자)라고 한다. 이런 관계가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영역이 신탁 계약에서의 위탁자(부탁하는 사람)와 수탁자(부탁받은 사람) 간의 관계다.
이사의 의무는 바로 이 ‘신뢰를 받은 자’가 응당 취해야 마땅한 적절한 태도에서 연유한다. 통상 그 의무는 2가지로 세분된다. 하나는 성실한 관리자로서의 주의의무(duty of care)이고, 다른 하나는 충성의무(duty of loyalty)이다.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주의의무(약칭해 선관주의의무, 또는 주의의무)란 ‘열심히 하라’는 뜻이다.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을 주의의무 태만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의무 위반에 해당한다. 만일 이사가 주의의무를 게을리해 ‘신뢰를 준 상대방’에게 손해를 입히면 이사는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 즉 주의의무 위반을 통제하는 가장 전형적인 구제책은 손해배상이다.
한편 이사는 주의의무를 게을리했다는 문제 제기에 대해 소위 ‘경영 판단’ 또는 ‘신중한 사람으로서의 결정’이라는 항변을 제기할 수 있다. ‘내가 열심히 안 한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따져본 후 신중하고 합리적으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라는 뜻이다.
이에 비해 충성의무(이를 충실의무 또는 신인의무로 번역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용어의 혼동을 피하고자 충성의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란 ‘딴 데 한눈팔지 말고, 신뢰를 준 사람의 이익만 생각하라’는 것이다. 본인의 이익을 먼저 챙긴다거나 다른 사람의 이익을 우선한다면 충성의무 위반에 해당한다. 주의의무가 태만을 통제하기 위함이라면 충성의무는 이해상충을 통제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이사가 충성의무를 위반해 자신의 이익이나 다른 사람의 이익을 우선했다면 어떤 구제책이 적절할까? 이사의 부당한 행위 때문에 애초 신뢰를 준 사람이 손해를 입었으니 손해배상으로 처리할 것인가? 꼭 그렇지 않다. 바로 여기서부터 많은 논의가 궤도를 이탈하고, ‘삐딱선’을 타기 시작한다.
왜 그럴까? 이사의 배신이 언제나 신뢰를 준 사람의 ‘법원에서 입증 가능한 가시적 손실’과 직결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사가 자신 소유 회사를 조용히 설립해 원래 회사의 사업 기회를 가로챈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사는 배신의 결과로 이익을 얻었지만, 회사가 과연 ‘가시적인 손실’을 입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기회비용의 입장에서는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얻지 못했으므로 잠재적인 손실을 보았지만, 법정에서 이를 입증하기란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영미법에서 충성의무 위반은 다른 구제책을 동원한다. 손해배상이 아니라 부당이득 반환이 그것이다. ‘너 때문에 내가 손해를 입었으니 물어내’가 아니라 ‘네가 얻은 이득이 부당하니 도로 뱉어내’가 그것이다. 그 외 원상회복, 계약의 해지, 거래나 의사결정의 무효 등 다양한 구제책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충성의무 위반에 대한 이사의 항변은 무엇일까? 문제되는 상황이 기본적으로 이해상충 상황이므로 그에 대한 항변 역시 ‘이 결정은 이해상충 상황에 처한 사람이 내린 것이 아니라 이해상충에서 자유스러운 사람들이 내린 것’이고 이사는 ‘그런 공정한 의사결정 상황을 구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음’을 보여야 한다. 즉 항변의 핵심 쟁점은 ‘(이해상충에 때 묻지 않은) 공정성의 확보’ 여부다. 이런 의미에서 충실의무의 항변으로 ‘열심히 했다’는 취지의 경영 판단의 원칙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거의 언제나 번지수를 잘못 짚은 엉뚱한 주장이다.
그렇다면 이사가 주의의무와 충성의무를 부담하는 상대방, 즉 ‘신뢰를 준 사람’은 누구일까? 영미법에서는 회사 및 집합적 의미에서의 주주 일반이다. 양자의 이해관계는 대부분 일치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전형적인 예가 회사가 다른 회사와 합병하는 경우다. 이사는 합병 여부에 대해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지만, 그 결정에 따른 손익은 회사가 아닌 주주 일반에 미친다. 그래서 영미법에서 이사가 합병 과정에서 공정성 확보에 실패한 의사결정을 하여 주주에게 손해가 발생한 경우 이사의 의무 위반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배임죄 폐지 여부 종합적으로 논의돼야
이제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자. 우리나라 상법상 이사의 의무는 기본적으로 주의의무이고 위반에 대한 구제책은 손해배상이다. 충성의무와 관련된 내용은 몇몇 개별 조항으로 도입됐으나 그 법리가 근본적으로 도입되지는 못했다. 이사가 의무를 부담하는 상대방도 회사일 뿐이고, 이사는 주주에 대해 의무를 부담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법원 판례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법원은 영미법에서 형평법상 구제 수단인 원상회복, 부당이득 반환, 계약이나 거래의 무효 등을 판단하는 데 지나치게 소극적이다.
그럼 이제 이복현 원장의 브리핑에서 제기된 몇 가지 주장을 판단해보자. 배임죄 폐지 여부는 우리나라 상법의 사각지대와 법원의 협소한 판결 성향을 종합적으로 감안해서 논의돼야 한다. 그리고 이사의 의무 부담 대상에 집합적 의미에서의 주주 일반을 포함할 것인가 여부는 배임죄 폐지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냥 현존하는 커다란 사각지대일 뿐이다. 시급히 메꿔야 한다. 마지막으로 충실의무 위반 여부에 대해 경영 판단의 항변을 허용하라는 주장은 충실의무가 충성의무를 의미하는 한 완전히 잘못된 주장이다. 충성의무 위반에 대한 항변은 “충분한 공정성의 확보”일 뿐이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