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창경궁에 동물원을 세운 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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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전경. 창경궁은 성종 연간인 1480년대에 대비전 세 어른인 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세조비)와 친어머니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추존왕 덕종비), 양어머니 안순왕후 한씨(예종비)를 위해 조성한 궁궐이다.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창경궁 전경. 창경궁은 성종 연간인 1480년대에 대비전 세 어른인 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세조비)와 친어머니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추존왕 덕종비), 양어머니 안순왕후 한씨(예종비)를 위해 조성한 궁궐이다.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최근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창경궁 명칭 환원 30주년’을 맞아 올 연말까지 다채로운 행사를 벌인다고 발표했습니다.

아마도 50대 이상의 세대에게는 이 소식이 색다른 감회로 다가왔을 겁니다. 저만 해도 20대 초반까지는 ‘창경원’이었고요.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소풍 가서 사자·호랑이 같은 진귀한 동물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1983년 12월 비로소 ‘창경궁’의 명칭을 되찾게 됐죠. 원래는 ‘궁’이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11년부터 ‘원(苑)’으로 명칭이 바뀌었죠. 해방 이후 40년 가까이 ‘창경원’ 이름을 답습했다는 사실 자체도 기막힌 일입니다.

창경궁에 웬 작은 아방궁? 

창경궁은 1418년 세종(재위 1418~1450)이 상왕인 태종(재위 1400~1418)을 위해 조성한 궁궐(수강궁)이었습니다.

그러다 성종(재위 1469~1494) 때 대비전의 세 어른을 모시려고 제대로 수리해 ‘창경궁’이라 했는데요.

대비전 세 어른은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세조비·1418~1483)와 친어머니인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추존왕 덕종비·1437~1504), 양어머니인 안순왕후 한씨(예종비·1445~1499)였습니다.

이렇게 성종의 효심이 깃든 창경궁은 연산군 시대에 들어 ‘작은 아방궁’으로 전락하는데요.

1506년(연산군 12) 1월 21일자 <연산군일기>에 심상치 않은 기사가 보입니다.

“창경궁에 돌로 대(臺)를 만들고 용을 새긴 난간을 만들었다. 1000명은 앉을 만하고 높이가 10길이나 됐다. 이름을 서총대(瑞?臺)’라 했다. 그 앞에 큰 못을 팠는데… 밤낮으로 인부 수만명이 ‘호야(呼耶)!’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리한 토목공사에 따른 후유증이 극심했습니다. 공사 강행을 위해 아직 출사하지 못한 진사·생원 중 100명을 뽑아 이른바 가부장(임시부장)직을 맡겨 인부들을 감독하게 했습니다.(<연산군일기> 1505년 12월 30일)

‘완장을 찬’ 가부장들이 인부들에게 얼마나 ‘갑질’을 해댔는지 원성이 자자했답니다.

“가부장들이 툭하면 곤장을 때리고 벌금을 물렸다. 가진 돈을 다 날린 인부들이 입고 있던 바지의 헌솜까지 빼내서 면포를 만들어 변상했다. 그렇게 만든 무명 빛깔은 질이 좋지 않았다. 지금도 품질 나쁜 베를 ‘서총대포’라 한다.”(<연산군일기> 1506년 2월 3일)

그렇지만 연산군은 ‘작은 아방궁’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전국에서 차출된 인부들이 제때 도착하지 못했답니다.

결국 공사를 마무리 짓지도 못한 채 중종반정(9월 2일)이 일어났습니다.

연산군의 폐위와 함께 서총대 공사도 중단됩니다(1507년 윤1월 5일). 완전히 철거되지는 않았습니다.

명종(1560년 9월)과 정조(1795년 3월) 등이 이곳에서 연회를 벌이고, 활쏘기 대회를 열었다는 기사가 보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경성안내>는 “경성 박물관 및 동·식물원은 이토 히로부미가 왕가의 오락을 겸하고 공중의 관람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계획했다”고 설명했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경성안내>는 “경성 박물관 및 동·식물원은 이토 히로부미가 왕가의 오락을 겸하고 공중의 관람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계획했다”고 설명했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창경궁은 임금(중종·환경전)과 왕비(명종비 인순왕후·통명전)가 승하하거나 즉위(인종·명정전)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매국노 형제와 일본인 차관의 수상한 대화 

세월이 흘러 국운이 급격히 쇠하던 1908년 11월 4일이었습니다.

매국 내각의 총리대신인 이완용(1858~1926)·궁내부 대신 이윤용(1854~1939) 형제가 궁내부 차관 겸 제실재산정리국장이던 일본인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1859~1935)와 수상한 대화를 합니다.

“혼자 떨어진 황제(순종)에게 소일거리가 없을까요.”(이완용·이윤용 형제)

불과 이틀 뒤 고미야가 명쾌한 해답을 들고 옵니다.

“창경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을 조성하면 어떻습니까.”(고미야)

이상하죠. 왜 일본인이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관리를 담당하는 궁내부 차관을 맡게 된 걸까요.

여기에는 뼈아픈 사연이 담겨 있죠. 1907년 일제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트집 잡아 ‘정미 7조약’을 체결합니다.

조약의 핵심은 조선통감이 대한제국의 입법·사법·행정 전반에 걸쳐 통치권을 발휘한다는 것이었죠. 이에 따라 초대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가 대한제국의 각부 차관을 일본인으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이토의 측근인 고미야가 대한제국 황실 재산의 관리를 겸한 궁내부 차관이 된 겁니다.

법률가로 대심원 검사 출신이었던 고미야는 이토 히로부미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던 인물입니다. 고미야의 장인이 이토와 같은 조슈번(長州藩·야마구치 지역을 통치한 영지) 출신이었다네요.

명종 때(1555년 이전) 창경궁 서총대에서 벌어진 문무시예 행사를 그린 그림. 서총대에서 문무 신료들에게 행했던 활쏘기와 제술(시와 문장) 양시에서 모두 으뜸으로 뽑힌 양응운에게 말 두 필을 하사한 기념으로 그렸다. /국립문화재연구원 제공

명종 때(1555년 이전) 창경궁 서총대에서 벌어진 문무시예 행사를 그린 그림. 서총대에서 문무 신료들에게 행했던 활쏘기와 제술(시와 문장) 양시에서 모두 으뜸으로 뽑힌 양응운에게 말 두 필을 하사한 기념으로 그렸다. /국립문화재연구원 제공

‘순종의 소일거리를 만든다?’ 

매국노 이완용·이윤용 형제와 고미야 간 ‘수상한 대화’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미 1905년부터 통감정치를 밀어붙인 일제는 황제권을 축소하는 조치를 합니다. 급기야 1907년 7월 “궁궐이 무질서하다”는 이유로 궁궐 출입을 제한하는 ‘궁금령(宮禁令)’을 내립니다. 궁중에 출입하려면 일본 경무고문부의 허가증을 얻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궁궐 내 인원을 1만명이나 삭감했답니다.

여기에 일제는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강제 퇴위한 고종을 덕수궁에 머물게 하죠. 새로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합니다. 고종과 순종은 연금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순종의 새로운 거처로 낙점된 창덕궁은 수리공사에 들어갔고요. 당시 공사 총책임자가 궁내부 차관인 고미야였습니다.

이때 이완용 형제가 순종의 소일거리를 마련해주자고 제안한 거고요. 그 말을 들은 고미야가 이틀 만인 1907년 11월 6일 ‘창경궁 동·식물원 및 박물관 설립계획’으로 맞장구를 친 겁니다.

“창경원은 이토 히로부미의 작품” 

이 무렵 궁내부에 근무했던 일본인 곤도 시로스케(權藤四郞介)는 다른 증언을 합니다.

당시 5~20원에 거래되던 고려청자는 창경궁 박물관이 시장에 나서자 천정부지로 솟았다. ‘청자 포도 동자 무늬 표주박 모양 주전자 및 받침대’는 950원(10억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당시 5~20원에 거래되던 고려청자는 창경궁 박물관이 시장에 나서자 천정부지로 솟았다. ‘청자 포도 동자 무늬 표주박 모양 주전자 및 받침대’는 950원(10억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가 궁내부 대신(장관)인 민병석(1858~1940)과 차관인 고미야에게 ‘박물관과 동·식물원의 설립’ 등을 명했다는 겁니다(곤도의 <이왕궁 비사>·1926).

하기야 그런 거창한 계획은 고미야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을 겁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한 계획을 이완용 형제가 제안하는 형식을 취했을 가능성이 짙습니다. 아니면 원래 계획하고 있던 와중에 이완용 형제가 “황제의 소일거리” 운운하니까 ‘옳다구나’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로써 창경궁 내 박물관 및 동·식물원 설립 계획은 일사천리로 추진됩니다.

1908년 봄부터 경성에서 사립동물원을 경영하고 있던 유한성이라는 인물을 스카우트했고요. 유한성이 보유 중이던 곰·원숭이·낙타 등의 동물을 구입해 동물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인이 주동이 돼 식물원도 조성했습니다.

창경궁 내의 경춘전, 통명전, 명정전, 양화당 등의 각 전각을 수리해 박물관 진열관으로 사용했습니다.

진열품 수집도 시작됐는데요. 이게 큰 문제였습니다. 19세기 말부터 한반도 전역에 일본인 도굴꾼이 득세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일본인들은 개성과 강화도 등 고려 왕·귀족의 무덤을 마구 파헤쳐 고려자기를 수중에 넣었는데요.

바로 이러한 도굴품들을 막 문을 연 창경궁 박물관이 사들인 겁니다. 당시 고려자기 값은 대략 5~20원 사이였는데요.

박물관 측은 그러나 ‘청자 포도 동자 무늬 표주박 모양 병’의 경우 골동품업자로부터 950원이라는 고가에 구입했어요. 지금 돈으로 10억원가량 된다고 합니다. 옛 절터에서 무단 반출된 불상 등도 마찬가지였죠.

1912년 당시 돈 2600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주고 사들인 국보 반가사유상(옛 83호)이 있습니다. 출처가 불분명한 도굴품을 왕립박물관이 세탁해준 셈입니다.

“순종을 투명그릇에 가둬 전시했다” 

그렇게 궁궐이었던 ‘창경궁’은 박물관 및 동·식물원이 조성된 ‘창경원’으로 격하됐는데요.

‘궁’ 명칭이 공식적으로 ‘원’이 된 것은 1911년 4월 26일입니다(<순종실록> 부록).

순종은 “진기한 동·식물과 문화 유물을 백성과 함께 즐기고 싶다”면서 ‘창경원’의 대중관람을 지시했답니다.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은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의 작품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토는 궁내부 대신(장관)인 민병석과 차관인 고미야에게 ‘박물관과 동·식물원의 설립’ 등을 명했다는 것이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은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의 작품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토는 궁내부 대신(장관)인 민병석과 차관인 고미야에게 ‘박물관과 동·식물원의 설립’ 등을 명했다는 것이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경성 안내서는 “경성 박물관 및 동·식물원은 이토 히로부미가 왕가의 오락을 겸하고 공중의 관람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계획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일제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대한제국과 황실의 위상이 추락하고 황제가 더 이상 존경과 위엄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창경궁에 동·식물원과 박물관을 조성·개방한 겁니다.

‘원(苑)’ 자의 본뜻이 “울타리를 쳐서 짐승과 나무를 키우는 곳”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창경원 조성을 기획한 고미야가 평소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조선병합 이후 외국에서 일본이 이왕가를 후히 대우하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게 중요하다. 실정을 알려야 한다. 따라서 창덕궁(창경궁 포함)은 ‘투명한 유리그릇에 넣은 물체’처럼 명백하게 보이는 것이 좋다.”(<이왕궁 비사>)

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요? ‘순종을 창경원의 유리그릇(사육장)에 넣은 물체(동·식물)’로 취급했다는 것이 아닌가요.

반대의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유서 깊은 궁전에 불상과 고기물, 시체를 넣었던 관곽마저 진열하고 일반인들이 흙 묻은 발(土足)로 출입게 하는 일이 말이 되냐”는 여론이 있었죠. 하지만 그와 같은 여론은 일축됐습니다.

밤벚꽃놀이, 일탈의 장소로 전락한 ‘창경원’ 

그렇게 개방된 창경원은 갈수록 태산이 됐습니다. 1918년 무렵부터는 그 유명한 벚꽃놀이가 ‘창경원’에서 시작됩니다.

창경원 설립을 두고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유서 깊은 궁전 건물을 박물관으로 조성해 불상과 고기물, 시체를 넣었던 관곽마저 진열하고 일반인들이 흙 묻은 발(土足)로 출입게 하는 일이 말이 되냐”는 여론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그와 같은 여론을 일축했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창경원 설립을 두고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유서 깊은 궁전 건물을 박물관으로 조성해 불상과 고기물, 시체를 넣었던 관곽마저 진열하고 일반인들이 흙 묻은 발(土足)로 출입게 하는 일이 말이 되냐”는 여론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그와 같은 여론을 일축했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서울에 머물던 일본인이 1908년 무렵 창경궁 등에 심은 벚나무가 화려한 꽃을 피운 겁니다(1939년 4월 16일 매일신보).

창경궁은 해마다 4월이 되면 ‘놀이동산’으로 전락합니다. 1924년 봄부터는 ‘창경원 밤벚꽃놀이(야앵·夜櫻)’가 시작되고요. “창경원 동물원의 울타리를 이룬 벚꽃 가지에… 꽃봉오리가 맺기 시작… 해마다 꽃이 필 때마다 밤에도 열어달라는 여론이 많았다…. 금년 봄 벚꽃이 만발하는 2~3주일간 야간개장하고 수천 개의 전등을 장식할 계획….”(동아일보 1924년 3월 11일)

“모두 마음이 들떠서 야앵! 야앵! 말하느니 야앵이요, 가느니 야앵이라. 분을 한껏 바르고 향수를 뿌린 모던 걸에게 장난을 걸 때 양복 친구들의 시선은 으슥한 곳으로 혹은 젊은 여자들의 다리로 꽂혔다.”(<별건곤> 1930년 5월)

창경원은 그렇게 일탈의 장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창경원과 청와대? 

어떻습니까. ‘창경궁’ 명칭 회복 30주년 기념행사를 계기로 ‘창경궁(원)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살펴보았는데요.

지난해인가요. 일반에 개방된 청와대에서 패션잡지의 화보 촬영 소식이 전해지자 ‘창경원’이 소환됐죠.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전락시킨 일제강점기가 연상된다는 비판이 일었죠.

저는 이러쿵저러쿵 평가하지 않겠습니다. 본래 역사는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니까요. 주어진 팩트를 토대로 독자 여러분이 나름의 평가를 하면 됩니다. 다만 살펴보았듯이 창경궁에 600년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담겨 있죠.

지금의 청와대에는 그보다 더 오래된 1000년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1101~1104년에 조성된 고려 제3의 도읍인 남경터가 자리 잡고 있었고, 조선시대 내내 국왕을 위해 충성을 맹세한 장소인 ‘회맹단’이 존재했으며, 경복궁 중건(1865~1868)과 함께 궁궐의 후원이 됐고, 그 후에는 조선총독의 관저로 기능했죠.

해방 이후 역대 대통령의 공간으로 존재한 것은 1000년 중 80년도 채 안 된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죠.

어떤 경우든 청와대의 공간과 관련된 역사성을 제대로 연구·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고고학과 역사를 공부하는 연구자들도 선뜻 나서는 이들이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아서요. 제2의 창경원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창경원, 창경궁 이야기하면서 불쑥 청와대 이야기를 꺼낸 이유입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I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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