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연산군의 ‘탕춘대’가 왜 세계유산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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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은 최근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탕춘대성을 포함한 ‘한양의 수도성곽’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신청 후보로 선정했다. / 서울대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문화재청은 최근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탕춘대성을 포함한 ‘한양의 수도성곽’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신청 후보로 선정했다. / 서울대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연산군이 황음무도한 짓을 벌인 탕춘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감이라고?”

최근 문화재청이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탕춘대성을 포함한 ‘한양의 수도성곽’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신청 후보로 선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올해 9월에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예비평가신청서를 유네스코에 제출할 계획입니다.

여기서 ‘탕춘대’의 유래를 안다면 납득이 가지 않을 분들도 있을 겁니다. 왜냐면 ‘탕춘대’는 중종반정 때(1506년 9월 2일) 연산군이 시녀들과 질탕하게 놀았던 ‘문제적 장소’로 지목된 곳이니까요.

탕춘대 돌구유에서의 음란행위 “…큰 정자를 지어… 밤낮으로 시녀들과 놀았다. 그중 가장 큰 것이 삼각산 밑 장의사동의 탕춘정인데….”(<연산군일기>)

‘탕춘정(대)’이 들어섰다는 ‘삼각산 밑 장의사동’은 세검정초등학교 인근을 가리킵니다.

‘탕춘정(대)’ 기사는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8개월 전인 1506년(연산군 12) 1월 27일 처음 보입니다.

“연산군이 창의문 밖에… 탕춘대를 봉우리 위에 세웠다. 봉우리 밑에 좌우로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돌기둥을 세우고… 언덕을 따라 긴 회랑을 짓고 모두 청기와를 이으니 고운 색채가 빛났다.”

그러고 보면 연산군이 지은 탕춘대(정)는 청기와를 이은 청와대라 할 수 있네요.

<연산군일기>는 이날 “연산군이 의정부·육조·대간들을 모두 데리고 가서 이른 봄의 흥취를 즐기며 술자리를 베풀었다”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7월 2일자 <연산군일기>에 심상치 않은 내용이 나옵니다.

“연산군이… 탕춘대에서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와 엄명을 내렸다. ‘궐내에 출입하는 운평(궁궐에서 춤과 음악을 담당하는 기녀)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 누설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7월 2일)

권섭의 작품으로 알려진 ‘세검정도’ / 개인 소장·김달진미술연구소 촬영

권섭의 작품으로 알려진 ‘세검정도’ / 개인 소장·김달진미술연구소 촬영

대체 탕춘대에서 무슨 짓을 벌였기에 ‘발설하지 말라’고 입단속을 했던 걸까요. 하지만 비밀은 없는 법이죠.

불과 5일 뒤인 7월 7일자 <연산군일기>에 누설되고 맙니다.

“왕이 내구마(궁궐의 말) 1000필을 들여 흥청(연산군 시절 대궐로 들인 기녀들)을 싣고 탕춘대에 가서 나인(정5품 상궁 이하의 궁녀)과 길가에서 간음했다.”

이 무슨 망극한 짓이란 말입니까. <연려실기술>은 “연산군은 탕춘대에 ‘돌구유(석조)’를 만들고 궁녀들과 음란한 짓을 벌였다”고 좀더 구체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조선판 벙개 모임’ 장소 연산군의 놀이터였던 탕춘대의 풍치는 대단했나 봅니다.

연산군 이후 점잖은 체면의 많은 문인·학자들이 탕춘대의 절경에 흠뻑 빠져 앞다퉈 음풍농월했으니 말입니다.

미수 허목(1595~1682)은 “맑은 물과 흰 돌이 사랑스러워 시내의 돌 위를 천천히 걸어 탕춘대에 올랐는데, 정오의 햇살이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따사로운 봄풀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기언별집> ‘기’)고 읊었습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동갑내기 벗(채홍원·1762~?)에게 “괴롭고 괴로운 이조참의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느냐”고 농담하면서 “비온 뒤 탕춘대 아래 폭포수가 한창인데, 훨훨 날아 함께 구경할 수 없는 것이 애석하다”는 편지를 보냈답니다.

동명 김세렴(1593 ~1646)은 원두표(1593~1664), 이해(1591~1670) 등과 함께 탕춘대로 ‘번개 모임’을 가졌답니다.

“회포를 풀지 못해 답답하던 중 벗 두세 명과 함께 놀이 나가니… 문 나서 말에 올라 서로 보고 웃은 다음 채찍질해 곧장 바로 탕춘대로 향했네.”(<동명집>)

약천 남구만(1629~1711)은 탕춘대의 봄 경치를 운치 있게 읊었습니다

“…피어오르는 봄 경치 우리 몫이라오…. 때로 이슬 내리고 산 깨끗하니 한 점의 먼지도 없어라. 못의 물고기는 따뜻한 햇볕을 맞이하고, 골짝의 새들은 새봄 노래하네….”(<약천집>)

양명학의 거두인 하곡 정제두(1649 ~1736) 역시 ‘탕춘대’에 흠뻑 빠졌답니다.

“물은 탕춘대를 싸고 왼쪽으로 두 골짜기를 끼고 흐른다…. 돌이라 물은 골골이 울며 흐르고 모래라 물은 맑고 깨끗하며… 맑은 바람과 소나무는 운치를 이루니 참말로 산간의 절승(絶勝)이었다”(<하곡집> ‘탕춘대기’)라고 했습니다.

왜 하필 탕춘대였나 그나저나 연산군은 왜 하고 많은 이름 중에 ‘탕춘대(蕩春臺)’라 지었을까요.

정제두는 “창의문에서 5리쯤 지나 들판이 있는데… 우뚝하게 언덕이 됐다. 위는 넓고 평평하니 탕춘대(蕩春臺)라 했다”고 전했는데요. ‘탕(蕩)’에는 ‘넓다’는 뜻과 함께 ‘방탕하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춘(春)’은 ‘봄’과 함께 ‘정욕’의 뜻도 갖고 있죠. 그렇다고 연산군 스스로, ‘방탕하게 유희를 즐기는 장소’라는 뜻의 이름을 지었을 리는 만무합니다.

‘가없는 봄 경치(浩蕩春光 澹蕩春光)’라는 의미로 지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더군요. 그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어감이 좋지 않았던 것 같아요.

유숙의 ‘세검정도’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숙의 ‘세검정도’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훗날 영조가 “‘탕춘의 의미가 좋지 않다”면서 ‘군대를 교련시킨다’는 뜻의 ‘연융대(鍊戎臺)’로 개명했으니까요.

<승정원일기> 1756년(영조 30) 9월 2일자는 “탕춘을 연융이라 한 이유는 연산군이 음탕한 짓을 벌일 때의 이름(燕山荒淫時名)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본뜻은 알 수 없지만 ‘연산군이 방탕하게 즐긴 봄날(탕춘·蕩春)’이 연상됐던 것 같습니다.

“20만 도성민을 버리고 갈 수 없다” 그럼 이런 좋지 않은 어감인 탕춘대가 왜 ‘유네스코 세계유산감’이라는 말일까요.

300년 전인 1700년대 초로 올라가 봅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병자호란(1636) 때 여실히 입증됐듯이 강화도와 남한산성은 더 이상 전란 시 임금의 도피처가 될 수 없었습니다.

내부 사정도 걱정거리였습니다. 16~18세기 전 세계를 강타한 소빙하기가 조선에도 불어닥쳤습니다. 냉해와 가뭄, 홍수, 전염병이 창궐했고요. ‘경신대기근’(1670~1671)과 ‘을병대기근’(1695~1696)으로 수많은 백성이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그사이 요승 여환이 “미륵의 세상이 온다”는 등의 해괴한 소문을 퍼뜨렸습니다(1688). 장길산이 출몰했으며, 정씨 성이 국왕으로 등극한다는 요사스러운 설도 들렸고(1697), 떼강도(명화적)가 출몰(1703)했습니다.

이럴 때 변란이 일어나면 어찌 될까요. 당시 서울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1648년(인조 26) 10만명 남짓이던 서울의 인구는 1717년(숙종 43) 24만명(23만8119명·3만4191가구)으로 급증했습니다(<숙종실록> 1717년 11월 14일). 당시 대동법 확대시행 등으로 서울로 들어오는 세곡의 물류량이 크게 늘었습니다. 서울은 상업도시로 변모했습니다. 여기에 자연재해로 대거 발생한 유민들이 무작정 상경하고 있었거든요.

이럴 때 변란이 일어난다고 도성을 비운다면 수십만 서울의 백성은 어찌 되겠습니까.

<연산군일기>는 연산군이 1506년 7월 7일 탕춘대에 흥청(대궐로 들인 기녀들)과 함께 놀러 가서 길가에서 나인(정5품 이하 궁녀)과 간음했다고 폭로했다. / 진영욱 서울시 문화예술과 학예연구사 제공

<연산군일기>는 연산군이 1506년 7월 7일 탕춘대에 흥청(대궐로 들인 기녀들)과 함께 놀러 가서 길가에서 나인(정5품 이하 궁녀)과 간음했다고 폭로했다. / 진영욱 서울시 문화예술과 학예연구사 제공

“북한산성에서 청야술 펼친다” 1703년(숙종 29) 무렵부터 수도방위론과 관련, ‘북한산성 축조’와 ‘도성 사수’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집니다.

숙종은 ‘북한산성 축조론자’였습니다. 숙종은 “나의 적자(赤子·백성)인 도성민들을 버리고 멀리 갈 수가 없는 형세가 됐다”면서 “도성은 지키기 어렵다면 백성들과 함께 북한산성에 들어가 지킬 것”(1710년 10월 20일)이라 했습니다.

전란이 일어나면 임금과 백성 모두 배후의 산성에 들어가 최후항전을 벌인다는 일종의 청야전술이었습니다.

반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위급한 시기에 20만 도성민이 어떻게 좁은 북한산성으로 들어가는가, 자칫 종묘사직과 도성민을 고스란히 적에게 내주는 격이다, 차라리 도성 수축에 힘을 쏟는 게 낫다, 뭐 이런 논리였습니다.

7~8년이나 계속된 논쟁을 종식한 것은 숙종이었습니다(1711년 2월 9일). 숙종은 “여러분의 의견 수렴을 기다리다가 이미 적군이 강을 건너겠다”(<비변사등록>)라고 짜증을 내면서 산성의 축조를 최종결정했습니다.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고요. 1711년 4~11월까지 단 7개월 만에 백운대~만경대~용암봉~문수봉~원효봉~영취봉 등의 봉우리를 잇는 총 둘레 11.6㎞의 산성을 완성했습니다. 산성 밑 평지에는 7만 석 규모의 군량창고를 설치했는데요. 이것이 ‘평창(平倉)’(1715)입니다.

약천 남구만도 “…피어오르는 봄 경치 우리 몫이라오…. 때로 이슬 내리고 산 깨끗하니 한 점의 먼지도 없다”는 시를 읊었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약천 남구만도 “…피어오르는 봄 경치 우리 몫이라오…. 때로 이슬 내리고 산 깨끗하니 한 점의 먼지도 없다”는 시를 읊었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평창을 지키는 방법” 이 ‘평창’의 지세가 너무 낮아 적의 침입을 막을 수 없다는 우려가 제기됐습니다.

이에 판중추부사 이유(1645~1721)는 “탕춘대와 북한산성은 ‘입술과 이빨(순치지세·脣齒之勢)’의 관계이니 탕춘대에 토성을 쌓아야 북한산성도 지킬 수 있다”(<숙종실록> 1715년 10월 30일)고 아뢰었습니다.

탕춘대성 축조론은 그러나 극심한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찬성론자들은 탕춘대를 잃으면 임금이 유사시에 몸을 피할 북한산성과 도성이 불통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대론자들은 도성~탕춘대성~북한산성까지 전선이 길어지면, 도리어 어느 한쪽도 온전하게 보전되기 어렵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찬성론자 편에 선 숙종은 탕춘대성의 축성을 결정했고요.

이듬해인 윤 8월 26일부터 10월 5일까지 40여일간 공사를 강행했습니다. 하지만 반대여론은 갈수록 거세졌습니다.

당시 대소신료들의 찬반양론을 분석한 연구가 있는데요. 1719년 2월 4~8일 탕춘대성 축성의 찬반을 언급한 신료 57명 중에 찬성이 14명(24.6%), 반대가 43명(75.4%)으로 집계됐답니다.

숙종은 “국가 대계에 따라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마당에 그만두라니, 이게 아이들 장난이냐”고 탄식했습니다. 대세가 된 반대여론을 거스를 수는 없었습니다. 탕춘대성 축조공사는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현재까지 잘 남아 있는 탕춘대성 서성벽 구간(5.1㎞).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신청구간에 포함됐다. / 진영욱 학예연구사 제공

현재까지 잘 남아 있는 탕춘대성 서성벽 구간(5.1㎞).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신청구간에 포함됐다. / 진영욱 학예연구사 제공

“탕춘대성은 도성의 목구멍” 영조 즉위(1724) 후 국면이 달라졌습니다. 이인좌의 난(1728)이 일어나 청주성이 함락되는 위기를 겪게 된 겁니다. 뒷골이 서늘해진 영조는 “임금과 백성들이 힘을 합해 도성을 지킬 것”이라는 도성 사수의 의지를 피력했는데요.

둘레가 18㎞가 넘는 한양도성을 지키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영조는 반란 진압 뒤 “만약 반란군이 북한산성을 점령했다면 도성을 수호할 수 없었을 것”(<승정원일기> 1729년 10월 26일)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역시 논쟁이 거세게 일었으나 영조는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은 도성을 지키기 위한 핵심 요처”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니 탕춘대에 조성된 창고(평창)와 그러한 평창을 지키는 미완의 탕춘대성이 재조명됐죠.

영조는 1747년(영조 23) 5월 7일 삼청동에 있던 총융청(수도방위사령부)을 탕춘대로 옮겨왔고요(<비변사등록>).

1752년(영조 28) 총융사 구성임(1693~1757)을 불러 “자네는 아무 쓸모도 없이 탕춘대에 앉아만 있는가?”라고 질책하며 탕춘대성 공사를 재촉했습니다. 영조의 호된 꾸지람을 들은 구성임은 1753~1754년에 탕춘대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잘 남아 있는 도성~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의 길이는 5.1㎞ 정도입니다. 북한산(삼각산)~한북문 구간이 그렇습니다. 이때 ‘탕춘대’의 이름도 ‘연융대’로 바꾼 겁니다.

도성 방위의 마지막 퍼즐 탕춘대성의 축조 의미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숙종은 도성~북한산성으로 통하는 피란길을 위해 조성하려 했고, 영조는 수도 방위를 위한 외곽성으로 탕춘대성을 쌓았습니다. 조선왕조의 종묘와 사직 그리고 도성민의 안위를 위해 쌓은 성이라는 의미는 다르지 않습니다. 탕춘대성은 한양도성~북한산성을 잇는 도성 방위 체계의 완성을 위한 마지막 퍼즐이었던 셈입니다. 탕춘대에는 이와 같은 파란만장한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참, 한가지 풀어야 할 과제가 있네요. 연산군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탕춘대성’ 이름을 어떻게 할까요. 영조가 느낌이 영 좋지 않다면서 바꾼 ‘연융대성’이라 불러야 할까요. 여러분의 고견이 궁금합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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