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 없는 제도에 낙관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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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글로리>는 드라마일 뿐이야.”

술잔을 기울이며 A가 말했다. 직장 내 괴롭힘과 젠더 폭력의 피해자인 A는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제기했다. 가해자와 조직에 마땅한 조치가 취해지길 바랐다. 2차 가해에 시달렸지만 요구한 보호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회사는 ‘문제가 없다’는 자체 결론을 내렸고, 노동청은 ‘직장 내 괴롭힘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결정을 하고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정순신 자녀 학교폭력 진상조사 및 학교폭력 대책 수립 청문회’가 열린 지난 3월 31일 국회 교육위원회 회의실에서 정순신 변호사, 송개동 변호사가 불참한 상황에서 다른 증인들이 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 박민규 선임기자

‘정순신 자녀 학교폭력 진상조사 및 학교폭력 대책 수립 청문회’가 열린 지난 3월 31일 국회 교육위원회 회의실에서 정순신 변호사, 송개동 변호사가 불참한 상황에서 다른 증인들이 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 박민규 선임기자

취재원인 노무사를 통해 들은 현실은 이랬다. “근로기준법은 사용자가 피해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해야 하며,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조치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지만, 회사들이 지키지 않는다”, “회사가 ‘사측’ 노무법인에 외주를 주는 것과 다름없는데, 노동청은 조사의 신뢰성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노동부가 사건을 종결하고도 당사자에게 통보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법’ 자체의 허점과 법에 규정돼 있지만 실제 이를 운용하는 데 관여하는 ‘사람’이 지키지 않는 문제가 뒤섞여 피해자의 회복을 지연시키고 있다. 각종 기사에는 법부터 손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전문가들의 단골 멘트로 나온다. 물론 이는 항시적인 과제로서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법이 제·개정될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현재진행형인 피해자들의 고통이 너무 크다.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는 일련의 자원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경제자본과 상징자본이 많은 이가 유리한 게 현실이다. 현행법부터 실용적인 팁까지 갖은 정보를 알아야 “제대로 하라”고 따져 물을 수 있다. 힘 있는 자들은 이를 적극 이용한다. 아들이 학교폭력으로 강제전학 처분을 받자 ‘끝장 소송전’에 나서 서울대 진학을 성공시킨 정순신 변호사도 그중 하나다. ‘법 기술’과 ‘위법’을 넘나든다. 관계부처 담당자, 조직 책임자 등이 이들의 폭주에 제동을 걸어야 하건만, 실상은 법 제도를 검토하는 절차마저 거치지 않거나 대충 넘기는 사례가 많다.

‘있는 제도’를 악용하는 어른들과 이를 방관하는 어른들이 바뀌지 않는 한 피해자들의 회복은 지연될 수밖에 없다. 학교폭력 근절 대책으로 학교생활기록부 기재 기간 연장, 정시전형 확대 반영 등이 거론되자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소송을 남발하는 가해학생 부모와 손 놓고 있는 학교·교육부 담당자는 그대로인 채 피해학생의 회복은 뒷전일 학교현장의 모습이 그려져서다. 경력단절 여성, 장애인, 노년층 등 ‘있는 인구’의 가용 노동력을 소외시킨 채 “아이 낳으라”고 열을 올리는 정부의 인식과 일맥상통한다.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려면 제도 운용에 관여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원자폭탄 피폭지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1960년대에 취재했던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당시 일본 정부의 핵무장 움직임이 감지되자 “에드워드 사이드의 만년의 신조인 ‘의지적인 낙관주의’라는 말에서 배우려고 한다”고 했다. 폭력 예방·사후대응 평가 시스템이라도 체계화해 정부와 조직 책임자들이 피해자 회복을 도모할 의지가 있는지 물어야 한다. 피해 복구에의 낙관은 여러 사람의 ‘의지’가 모여야 가능한 일이다.

<박하얀 스포트라이트부 기자 whit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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