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태양에 대한 통화기록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울적함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밀려오는 순간에 나는 때로 엄마에게 전화한다. 그것은 일요일 오후 4시쯤에 일어나는 일이다. 정점에 달한 오후의 햇살 안에서, 나는 더 이상 나에게 우울함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청소를 마친 집 안은 깨끗했고, 방금 요리한 음식들로 배가 불렀다. 포만감과 온기로 내 몸은 흐드러지고 있었다. 이제는 덩어리들만 남아 있었다. 내가 해야만 하고, 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일들. 생각하는 것만으로 어깨가 뻐근해지는 덩어리들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파도에 덮쳐 숨을 쉴 수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을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멀리 도망갈 수도 없었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엄마는 묻는다. “잘 지내고 있니?”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그냥 의례적으로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하면 될 것을 그러지 못했다. 정적 끝에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마치 숨을 내쉬는 김에 하는 것처럼 말한다. “무척, 절망스러워.” 나는 엄마가 전화를 끊고서도 그 말을 얼마나 곱씹을지를 알고 있다. 그 단어는 그의 가슴에 박혀서 시간이 갈수록 더욱 증폭될 것이다. 내 딸이 저 멀리서 혼자 절망하고 있어, 내 딸이 절망하고 있어. 그렇지만 나는 그저 그 외의 다른 대답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한다.

엄마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요컨대 친구라든가. 친구들은 절망스럽다는 내 말을 별로 대수로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전화를 끊은 뒤에 곱씹는 일 따위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내가 보통 자주 절망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세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그러나 아무도 없을 때도, 거기엔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때로 내 세상의 유일한 수신자가 되었다. “절망.” 엄마는 나를 따라 말했다. 마치 그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듯이.

“거기는 정신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뉘어.” 엄마는 요즘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국가에서 지원하는 교육을 받고 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큰일 났을 뻔했어.’ 교육을 들으러 다녀온 첫날에 엄마는 말했다. 자신이 돌보게 될 노인들과 자신의 나이가 정말이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엄마와 함께 교육받는 교육생들 전부가 이미 늙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어딘가에는 그보다 더 늙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이제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을 돌보려 하고 있었다. 엄마는 이제 이론 교육을 마치고 현장 실습에 나가고 있었다.

“정신이 없는 사람은 그냥 침대에 누워만 있고, 그나마 정신이 있는 사람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나는 묻는다.

“문?”

“응. 누군가 들어오면 문이 열린 틈을 타 밖으로 나가려고. 거기 서 있기도 하고 의자를 가져다 두기도 하고 하여튼 거기서 하루종일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려. 그러다 내가 들어가서 문이 열리잖아, 근데 문이 닫힐 때까지 거기에 닿지를 못 해.”

엄마는 웃는다.

수백 번 달려나갔을 마음과 한없이 더디기만 한 몸, 순식간에 벌어졌다가 사라지는 문의 틈새 같은 것이 눈앞에 떠올랐다 사라진다.

“하루종일 문이 열리길 기다린 사람이 그걸 놓쳤을 때 그 눈빛이란, 도저히 쳐다볼 수가 없어.”

그 말을 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꼭 그 눈을 앞에 둔 것처럼 다시 무너진다. 나는 그 눈빛을 상상한다. 상상 속 사람은 거울을 보고 있다.

“하루는 어떤 아저씨가 나한테 이리 좀 와 보래.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먹을 걸 꺼내 줘. 그러면서 그냥 이 종이에다가 저 문의 비밀번호만 적어주면 된대.”

엄마는 그 말을 하는 동안 웃는다. 아마 그 말을 들었던 순간에도 웃는 것 말고는 별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엄마가 데리고 나가주면 안 돼?”

“그럼 내가 그 사람의 안전에 대한 전적인 책임자가 돼. 밖에 나가면 무슨 일이 날지 모르는데 말이지.”

나는 노인이 혼자 밖에 나가서 낼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본다. 넘어질까. 뛰어내릴까. 부술까. 전력으로 질주할까. 누군가를 찾아갈까. 헤맬까. 엄마는 또 무언가 생각난 듯이 말한다.

“어떤 사람은 지금 집에 세 살짜리 애가 혼자 있다고, 자기가 얼른 가서 봐줘야 한다고. 막 다급해. 빨리 가야 하니까 어서 문 열어달라고.”

엄마는 뜸을 들인다. “그 애가 세 살이었던 때의 기억만 머릿속에 살아 있는 거지.”

엄마는 조금 더 천천히 말한다. 우리는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이 없다. 나는 기억이 어떤 것은 살고, 어떤 것은 죽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아, 그런데 매일 문 앞에서 기다리던 그 아저씨가 이제는 침대에 누워만 있어.”

침대 위에 수평으로 포개어진 한 늙은 남자의 몸을 떠올린다. 그것은 절망의 모양과 비슷할까. 그것을 방안에 앉아 있는 내 모습과 나란히 두어본다. 아저씨가 그토록 원하는 밖으로 나가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밖이 있다는 확인일까. 밖으로 갈 수 있다는 확인일까.

나는 묻는다. “엄마는 어떤 기억이 살아남을 것 같아?”

가끔 노인과 대화를 하다 보면 깨닫는 사실이 있다. 이 이야기를 열 번 정도 더 들은 적이 있다는 것. 그러나 여전히 노인의 얼굴은 생생하기만 하다. 영화처럼, 돌림노래처럼 정해진 레퍼토리와 멜로디가 반복되는 동안, 나는 훗날 내가 어떤 이야기를 돌려 부르게 될까 상상해보고는 했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과거는 지나가는 것일 뿐이고, 어떤 것이 특별히 크거나 작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어떤 시기를 그토록 강렬하게 느끼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게. 내가 할 말이 있으려나.”

“난 알아.”

“뭔데?”

“엄마는 말할 거야. 어릴 적에 이모가 얼마나 못되게 굴었고, 나가서 어떤 비행을 일삼았고, 툭하면 집에 와서 모아둔 돈을 빼앗아 갔고, 아빠는 어떤 여자를 만났고, 엄마는 빚을 갚느라 전전했고….”

돌고 돌아서, 살고 살아서 엄마의 머릿속에 남아 있을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졌다. 한도 많고 어려움도 많은 삶이었다. 한 마디 한 마디 이어질 때마다 엄마가 놀라거나 웃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죽어 있던 기억을 깨우기라도 한 것처럼.

“네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럴 것 같네. 생각지도 못했다.”

엄마는 어디서부터 잊어버리기 시작한 걸까. 내가 엄마가 무슨 말을 하게 될지 아는 것처럼 엄마도 내가 무슨 말을 하게 될지 알까. 어쩌면 나는 엄마에 대해 말하게 될까. 아니면 절망에 대해 말하고 있을까. 침대와 문 중에 나는 어떤 곳에 더 가깝게 서 있게 될까. 무얼 기다리게 될까. 그 순간 엄마가 말했다.

“절망하지 마.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나는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양다솔 작가>

양다솔의 기지개 켜기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