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왜란 때 조선 위해 싸운 일본인들이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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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는 얼마나 될까요. 2만~3만명(일본 측 자료)에서 10만~40만명(조선 측 자료)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어땠을까요. 항왜(귀화 혹은 항복한 일본인)의 수가 1만명을 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인 1593년 1월 평양성 전투를 그린 ‘평양성 탈환도’. 이후 임진왜란은 장기전의 양상으로 접어든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임진왜란 때인 1593년 1월 평양성 전투를 그린 ‘평양성 탈환도’. 이후 임진왜란은 장기전의 양상으로 접어든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597년(선조 30) 5월 18일 도원수 권율(1537~1599)이 적진에 밀파된 첩자들의 보고를 정리해서 조정에 알렸는데요.

“왜군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항왜의 수가 이미 1만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이 일본의 용병술을 다 털어놓았을 테니 심히 걱정된다고 수군거린답니다.”(<선조실록>)

한 연구자가 <실록>에 등장하는 항왜의 수를 집계했는데요. 모두 42건에 600명에 달합니다. 기록된 숫자만 이 정도이니, 항복 혹은 귀화한 왜인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실록에는 일본 이름이 상당수 보입니다. 사야가, 사고소우, 연노고, 산여문, 요질기, 훤도목병위, 평구로, 요시지로, 조사랑, 노고여문, 사백구, 세이소…. 또 김귀순(金歸順), 김향의(金向義), 이귀명(李歸命) 등의 이름이 보입니다. 귀순하고(귀순), 의를 좇았으며(향의), 천명에 귀의했다(귀명)는 뜻에서 조선 조정이 하사한 이름임이 분명하죠.

사야가 김충선 가장 유명한 이는 사야가(沙也加·김충선)라 할 수 있습니다.

사야가, 즉 김충선의 문집인 <모하당집>은 “임진왜란 발발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가 이끄는 왜군 2진의 선봉을 맡아 부산포에 상륙했다가 곧바로 부하들과 함께 귀순했다”고 썼습니다. <모하당집>은 사야가가 출정 전부터 “의롭지 못한 전쟁에 나섰지만, 동방예의지국인 조선에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고 전했습니다.

조선 조정은 사야가에게 자헌대부(정2품)를 제수했고요. 그러면서 김해 김씨의 성과 함께 ‘충성스럽고 착하다’는 뜻의 ‘충선(忠善)’이란 이름을 내렸답니다. 임진왜란 때 무공을 세운 김충선은 조선군에 조총과 화포, 화약제조법을 전수했고요. 이괄의 난(1624년)과 병자호란(1636년) 때도 공을 세웠답니다.

심지어 훗날 정조 임금은 ‘김충선=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외손’이라는 가짜뉴스를 철석같이 믿게 됩니다.

“왜인 김충선은 평수길(平秀吉·도요토미)의 외손이다. 임진왜란 때 선봉에 서서… 충성을 다했다. 김씨 성을 하사받고… 호는 모하당이라 한다. 사실이 맞는가.”(<승정원일기> 1797년 10월 17일)

근거 없는 뉴스였죠. 김충선은 정조 임금마저 도요토미의 외손이라고 여길 만큼 ‘전설적인 인물’이었던 겁니다.

‘평양성 탈환도’의 부분. 왜군들이 조·명 연합군에 쫓기는 모습을 그렸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 전세는 왜군의 파죽지세였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고 이순신 장군이 제해권을 움켜쥔 데다 명나라군까지 참전하자 장기전의 양상을 띤다. 오랜 전쟁에 지친 왜군들은 설상가상으로 군량미 부족에 시달리게 됐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평양성 탈환도’의 부분. 왜군들이 조·명 연합군에 쫓기는 모습을 그렸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 전세는 왜군의 파죽지세였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고 이순신 장군이 제해권을 움켜쥔 데다 명나라군까지 참전하자 장기전의 양상을 띤다. 오랜 전쟁에 지친 왜군들은 설상가상으로 군량미 부족에 시달리게 됐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왜군의 항복을 적극 유도하라! 물론 사야가, 즉 김충선처럼 처음부터 귀순을 염두에 두고 참전한 왜인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장기전의 양상을 띠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자연 군량미도 부족해졌죠.

1594년(선조 27) 4월 17일 접대도감 이덕형(1561~1613)의 언급이 의미심장합니다.

“왜적들의 한 끼 식사가 작은 종지 하나의 밥이 전부인데, 그나마 절반이 껍질째였습니다. 일은 고달프고 배가 고파 항복하려는 자가 매우 많다고 합니다.”(<선조실록>)

포악한 왜장의 휘하 장졸일수록 투항한 자가 많았죠. ‘악귀’라는 악명을 떨친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병졸들이 특히 그랬습니다.

예컨대 1597년(선조 30) 항복한 왜인 세이소(世伊所)와 마다사지(馬多時之)를 다시 적진에 보내 가토의 휘하 군관을 5명이나 귀순시켰는데요(4월 21일), 귀순자들은 “사역이 과중하고 장수의 명령이 너무도 혹독해 견디다 못해 도망쳤다”고 했습니다.

귀순자들은 “요즘 가등청정(가토)이 사졸들의 마음을 크게 잃어 일본으로 귀국하려는 자들이 하루에 100명에 이른다”고 알렸습니다. 이들에게 당상관(3품 이상)의 관직을 내리며 후대한 선조의 ‘항왜 정책’도 한몫 단단히 했습니다.

선조는 “항왜 가운데 검술과 병기제작에 능한 자를 꾀어내면 파격적인 상을 내려야 한다”(1595년 6월 11일)고 했고요. 심지어 “지금 항왜들만이… 성 위로 올라가 죽을힘을 다해 적병을 죽인다”(1597년 8월)고 칭찬합니다.

“우리 조선”이라 한 왜인 여여문 항왜 가운데 첫손으로 꼽히는 인물은 바로 여여문(呂汝文)입니다.

1595년(선조 28) 6월 19일 <선조실록>에 의미심장한 기사가 보입니다.

“내가 항왜 여여문을 각별히 후대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실행하고 있는가. 요사이 이 자가 병이 났다가 차도가 있다고 하는데 이는 보통 왜인이 아니다. 후하게 대우하라.”

여여문이 누구이기에 선조 임금으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았을까요. 여여문은 훈련도감에서 결성한 ‘아동대(兒童隊)’를 조련한 책임자였는데요. 그 성과가 대단했습니다. 여여문이 훈련한 아동대 인원 50여명 중 19명이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여여문은 일본군의 진법과 전술을 조선 진영에 가르쳐 주었고요. 전쟁터로 달려가 죽을 각오가 있음을 피력했습니다.

“현장으로 내려가 산성을 쌓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아니면 저를 요해처로 보내주십시오. 죽음으로 보답하겠습니다.”(<선조실록> 1597년 1월 4일)

‘동래부순절도’(국보·육군박물관 소장). 1592년(선조 25) 4월 15일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에 대응하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과 군민들의 항전 내용을 묘사한 그림이다. / 육군박물관 소장

‘동래부순절도’(국보·육군박물관 소장). 1592년(선조 25) 4월 15일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에 대응하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과 군민들의 항전 내용을 묘사한 그림이다. / 육군박물관 소장

여여문은 “일본군을 꾀어 적장을 모살하면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계책을 올렸습니다. 여여문은 이때 ‘우리(我) 조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뼛속까지 조선인이 됐던 겁니다.

“우리 조선사람들 하는 것을 보면 한갓 계획만 세우고 의논은 많지만 실행은 적습니다. 날짜만 기다린다면….”

이 말을 전해들은 선조는 장탄식하며 “우리나라 일이 부끄럽다”고 했습니다.

허무한 죽음 여여문의 활약은 이어지는데요. 1597년(선조 30년) 12월 명나라군 총사령관인 양호(?~1629)가 여여문을 적진에 밀파해 적정을 살피라는 임무를 맡깁니다. 적진에 잠입한 여여문은 적진 3곳의 적병 숫자를 파악해 손수 형세도를 그린 뒤 빠져나왔는데요. 여여문의 형세도를 본 명나라군 양호 총사령관은 은 10냥을 내려주었고요.

명나라군은 여여문의 형세도대로 작전을 짰습니다. 명나라군의 마귀 제독(생몰년 미상)은 여여문을 다시 적진에 침투시켰고요. 이때 여여문이 왜군 4명의 수급을 베어 가지고 나왔는데요. 여기서 비극이 일어납니다.

마귀가 전공을 세우고 돌아온 여여문을 죽이고는 그가 가지고 있던 왜적의 수급마저 다 빼앗은 겁니다.

<선조실록>은 1598년(선조 31) 3월 27일 여여문의 죽음을 알리면서 “여여문이 베어낸 왜적 4명의 수급을 (마귀의 수하장수인) 파귀가 빼앗는 것을 똑똑히 본 사람이 많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여여문의 공을 가로챈 혐의가 짙습니다. ‘우리 조선’이라고 하면서 조선에 충성을 다한 항왜 여여문의 허무한 죽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1598년(선조 31) 5월 17일 우의정 이덕형은 “여여문은 임진란 이후로 종군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처자식도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면서 “여여문을 논상함으로써 격려하는 뜻을 보여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울산왜성에 포위된 왜군이 물을 길으러 나오는 모습을 그린 기록화 /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울산왜성에 포위된 왜군이 물을 길으러 나오는 모습을 그린 기록화 /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조선 장수 가족을 구한 일본인 사백구라는 인물도 있습니다. <선조실록> 1597년(선조 30) 9월 8일자에 경상우병사 김응서(1564~1624)의 보고서가 실렸는데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백구는 가토 기요마사 휘하에서 투항한 왜인인데, 일단 김해부사 백사림의 휘하로 보냈답니다.

마침 왜군이 황석산성(함양)을 공격했고요. 이때 백사림을 따라 출전한 사백구가 조총으로 왜병 4명을 죽였답니다. 산성은 함락됐고, 몸이 뚱뚱해 탈출이 어려웠던 백사림은 포로가 될 운명이었답니다.

이때 사백구가 성을 지키던 왜병들을 위협해 백사림을 성 밖으로 탈출시켰습니다. 사백구는 백사림을 산속에 숨겨놓고는 먹을 것을 구하려 왜병이 점령한 산성으로 다시 들어갔는데요. 그사이 백사림은 사백구가 배신한 줄 알고 몸을 숨겼습니다.

사백구는 백사림이 보이지 않자 “어디 갔느냐”고 애타게 불러댔고요. 사백구는 겨우 찾아낸 백사림의 허리를 끌어안고 “대체 어디 갔다 왔냐”고 반가워했답니다. 사백구는 백사림에게 옷을 입혀주고 밥을 먹이면서 눈물을 흘렸답니다.

사백구와 백사림의 일화를 전하던 김응서의 한탄이 심금을 울립니다.

“조선의 유식한 무리도 처자식을 구제하지 못하는데, 사백구 같은 오랑캐가 지극정성으로 김해부사를 피신시켰습니다. 사람으로서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선조실록>)

명량대첩에 도움을 준 왜인 이순신(1545 ~1598) 장군의 명량대첩(1597년 9월 16일)에서 한몫 단단히 한 항왜 ‘준사’도 유명하죠.

1593년 안골포에서 투항한 준사는 이순신 장군이 단 13척의 배로 일본 수군을 격파할 때 장군의 배에 타고 있었죠.

준사는 바다에 빠진 왜군들을 내려다보면서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적장 마다시(馬多時)”(<난중일기>)라고 지목했습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이 마다시의 목을 내다 걸어 왜적의 사기를 꺾었고요. 준사가 지목한 마다시는 왜장인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1561~1597)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왜병들이 조·명 연합군에 항복하는 사례가 많았다. / 일본 혼묘지(本妙寺) 소장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왜병들이 조·명 연합군에 항복하는 사례가 많았다. / 일본 혼묘지(本妙寺) 소장

적장 가토 기요마사의 암살계획을 모의한 ‘항왜’도 있습니다. <선조실록> 1595년 2월 29일자에 나와 있는데요.

경상좌병사 고언백(?~1608)에게 ‘항왜’ 주질지와 학사이가 쫓아왔습니다. 두 사람이 은밀하게 고한 내용은 놀라웠습니다.

“우린 본국(일본)을 등졌으니 이미 조선사람입니다. 마땅히 적의 괴수(가토 기요마사)를 베어야 합니다.”

가등청정 암살 모의사건 두 사람의 암살계획은 아주 구체적이었습니다.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은 다른 장수와 만날 때 거느리는 군사가 10여명에 불과합니다…. 이때 일본인 중 내응하고 있는 자와 살해를 도모한다면 손바닥 뒤집듯 쉬울 것입니다.”

고언백이 이들의 말을 믿지 않자 더욱 치밀한 계획까지 일러주었다.

“지금 우리와 함께 항복한 구질기의 종형(고로비)이 청정(가토)의 가장 가까운 군관으로 있습니다. 고로비 또한 조선 진영으로 귀순하려 합니다. 그 사람과 내응하면 성사될 겁니다.”

이 암살계획은 그러나 끝내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명나라와 왜와의 강화 계획이 틀어질까 걱정했기 때문입니다(<선조실록> 1595년 3월 24일), 이뿐이 아니죠. 1597년(선조 30) 11월 벌어진 정진 전투에서도 항왜들의 활약이 컸습니다.

아군이 왜군의 포위로 전멸의 위기에 몰렸지만 항왜들의 맹활약으로 사지를 겨우 탈출했는데요. 권율 도원수는 이 전투에 참전한 항왜들의 이름과 벼슬명, 공적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왜적 70명을 죽였습니다. 사고여무는 왜적의 목을 두 급, 요질기, 사야가(김충선), 염지는 각 한 급씩을 베었습니다. 손시로는 중상을 입었으며, 연시로는 전사했습니다. 왜기와 창, 칼, 조총 등을 노획했고, 우리나라 포로 100여명을 탈출시켰습니다.”

이밖에도 1597년(선조 30) 남원성 전투와 상주 전투, 가덕도 전투, 그리고 1598년(선조 31) 10월 사천 전투에서도 항왜들의 활약상이 보입니다.

여여문, 사백구, 주질지, 학사이… 항왜들은 전투나 적정탐지 외에도 기술전수에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요.

조선은 그들에게서 총검을 주조하고 염초를 굽는 방법을 배웠고요. 조총의 사격술과 검술도 익혔습니다. 그 덕분일까요.

1597년(선조 30) 1월 “김응서 휘하의 항왜 중 조총 기술자가 많으니 상경시켜 배우자”는 건의에 선조는 자신 있게 밝힙니다.

“이제 조선에도 조총을 잘 만드는 자가 많다. 상경시킬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항왜의 도움이 컸습니다. 하지만 이 기사를 쓰면서 걸리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 조선!’이라 하며 충성을 바치고자 했던 여여문이 너무나도 허무한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죠.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래도 여여문이나 사백구 같은 이들은 실록에 이름자를 남겼죠. 나머지 1만명에 달한다는 항왜들의 자취는 찾을 수 없네요. 그들 역시 조선인으로 뼈를 묻고 살면서 후손을 남겼을 텐데 말입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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