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흠결 가득한 달항아리, 국보 즐비한 곳에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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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중에 뉘에 ‘군자의 기개’가 담겼느냐”(경향신문) “‘백자’쟁명 청화-철화-동화…조선백자 대표 다 모인 챔피언스리그”(동아일보) “불멍·물멍 이어 자기멍…눈 뗄 수 없는 조선백자”(서울신문) “어둠을 몰아내는 ‘조선백자의 스펙터클’”(조선일보)….

‘국보 달항아리’. 이 달항아리는 군데군데 누런 얼룩이 묻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항아리에 담겨 있는 기름이 밖으로 배어난 건지, 혹은 항아리가 엎어져서 옆에 쏟아져 있던 기름에 밑부분이 젖어든 건지 확실치는 않다. 이런 흔적이 오히려 달항아리의 가치를 높였다. / 리움미술관 제공

‘국보 달항아리’. 이 달항아리는 군데군데 누런 얼룩이 묻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항아리에 담겨 있는 기름이 밖으로 배어난 건지, 혹은 항아리가 엎어져서 옆에 쏟아져 있던 기름에 밑부분이 젖어든 건지 확실치는 않다. 이런 흔적이 오히려 달항아리의 가치를 높였다. / 리움미술관 제공

요 며칠 사이 각 언론이 편집자의 감각을 마음껏 뽐낸 온갖 수식어와 함께 앞다퉈 소개한 특별전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리움미술관의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특별전(2월 28~5월 28일)입니다. 국가지정문화재 59점(국보 18점·보물 41점) 중 절반이 넘는 31점(국보 10점·보물 21점)과 일본에 있는 34점 등 총 185점의 백자가 총출동한 특별전이랍니다.

군자와 백자 특별전에서 조선백자의 매력을 ‘군자’의 덕목과 연결해 해석한 것이 눈에 띄더군요.

조선백자에서 군자의 모습이 떠오른다는 겁니다. 하나만 예로 들죠. 양란(임진왜란·병자호란) 후 곤궁해진 조선의 실정이 백자에도 영향을 끼치는데요. 이때부터 페르시아산 코발트(Co) 성분의 값비싼 청화안료를 상대적으로 저렴한 철안료가 대신합니다.

이를 두고 특별전 기획자(이준광 리움미술관 책임연구원)는 <논어> ‘위령공’편을 인용합니다. 즉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어느 나라에서도 쓰임 받지 못하고 곤궁한 처지에 빠진 공자에게 묻죠.

“군자도 곤궁함이 있습니까(君子亦有窮乎).”

그러자 공자는 “군자는 곤궁 속에서도 굳세지만, 소인은 궁하면 멋대로 군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고 응수했답니다.

이런 ‘공자 왈’이 조선의 백자에도 통한다는 겁니다. 즉 전란 후 조선의 경제 사정 때문에 청화안료를 쓴 백자를 만들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조선의 도공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대체원료인 철안료를 써서 특유의 강렬함과 변화무쌍한 색 변화가 돋보이는 새로운 미의 세계를 창출했다, 뭐 이런 겁니다.

흠결 있는 국가대표? 특별전의 백미는 조선백자의 명품 베스트 42점을 한 공간에 전시했다는 겁니다.

당당한 형태와 화려한 그림이 돋보이는 ‘백자청화매죽문호’와 고려 매병에서 조선 항아리로 변해가는 특징을 보이는 ‘백자청화 홍치명(1489) 송죽문 호(항아리)’, 강렬한 색과 묵직한 힘을 과시하는 ‘백자철화 포도문 호’ 등이 보이고요.

절제미와 창의미가 조화를 이룬 ‘백자청화철채동채 초충난국문 병’, 순백미와 품격미를 겸비한 ‘백자 개호(뚜껑 있는 항아리)’, 생활용품이면서 풍만한 자태를 풍기는 ‘백자 달항아리’ 등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저마다 빼어난 자태를 뽐내는 ‘베스트 42’ 가운데 그래도 달항아리 3점에 관심이 꽂히더군요.

그중에서도 흠결이 있는 두 점의 달항아리에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그중 국보 한 점의 몸통 전체에 커다란 누런 얼룩이 져 있습니다. 순백색의 아름다움을 가치로 친다면 흠결이 이만저만한 백자 항아리가 아니죠.

아닌 게 아니라 이 백자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고, 또 매물로 나왔을 당시에도 골동품상이 여럿 걸쳐 있었다고 합니다.

1995년 절도범이 일본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 간논인(觀音院)에 소장돼 있던 달항아리를 내동댕이쳐 무려 300여편으로 산산조각 났다. 오사카 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 기증된 달항아리 파편은 복원과정을 거쳐 완벽한 형태로 재탄생했다. / 오사카 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1995년 절도범이 일본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 간논인(觀音院)에 소장돼 있던 달항아리를 내동댕이쳐 무려 300여편으로 산산조각 났다. 오사카 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 기증된 달항아리 파편은 복원과정을 거쳐 완벽한 형태로 재탄생했다. / 오사카 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리움 미술관 구입 당시 미술관 관계자가 고 이건희 회장(1942~2020)의 출근길을 막아서서 결재 처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당시 아파트 한 채 값을 치렀답니다. 이 흠결 있는 달항아리가 어떻게 해서 이런 대접을 받아 국보가 됐을까요.

우선 약간은 비대칭이지만 거의 풍만한 정원을 그린 완벽한 달항아리라는 점에서 점수를 얻었답니다.

또 몸통에 가득한 얼룩 또한 국보로서의 가치를 한껏 높였는데요. 분석결과 식물성 기름인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이 항아리에 담겨 있는 기름이 밖으로 배어난 건지, 혹은 항아리가 엎어져 옆에 쏟아져 있던 기름에 젖어든 건지 확실치는 않습니다. 어쨌거나 이 달항아리는 감상용이 아니고 기름때가 묻은 생활용기였다는 것 덕분에 가치가 더 높아졌습니다.

백자 항아리가 생활용기로 제작됐다는 기록(<승정원일기> 1630년 2월 19일조)이 보입니다.

“제사용 술과 참기름을 담는 도기는 공조에서… 꿀을 담는 흰 항아리(白缸)는 사옹원에서 진배해야 하는데….”

또 일본 와세다대(早稻田大) 아이즈야이치(會津八一) 기념박물관 소장 ‘웃밧쇼’명 백자도 흥미로운데요. ‘웃’은 ‘위(上)’를, ‘밧쇼’는 ‘바깥 소주방’을 각각 가리킵니다. ‘웃밧쇼’ 항아리는 ‘웃전에 딸린 외소주방’을 나타내는 거죠. 그런 사례가 또 있습니다.

개인 소장인 ‘연령군 겻쥬방’명 백자 항아리가 그것인데요. 숙종의 여섯째 아들인 연령군 이훤(1699~1719)의 자택 ‘곁 주방’에 쓰인 생활용기였던 겁니다. 그리고 이 ‘국보 얼룩 항아리’에는 또 다른 숨겨진 가치가 있습니다.

얼룩이 백색의 도화지에 그린 한 폭의 추상화 같다고 할까, 혹은 구름에 걸친 달을 연상케 한다 할까, 이런 갖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다는 겁니다. 한가지 여담은 이 항아리를 들고 온 이가 “얼룩을 지우면 어떠냐”고 했다는 겁니다.

미술관 관계자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답니다. 만약 순백색의 자기를 만든다고 얼룩을 지웠다면 어찌됐을까요.

그 백자의 역사성은 송두리째 사라졌을 겁니다.

김환기 화백은 도자기 중에서도 유독 찌그러진 둥근 항아리, 즉 달항아리를 좋아했다. / 환기재단·환기미술관

김환기 화백은 도자기 중에서도 유독 찌그러진 둥근 항아리, 즉 달항아리를 좋아했다. / 환기재단·환기미술관

300조각 난 달항아리가 대표선수로 발탁 이번에 ‘베스트 42’에 뽑혀 전시장을 장식한 ‘흠결 있는 달항아리’가 또 있는데요.

일본 오사카(大阪) 시립 동양도자미술관 소장품입니다. 자그마치 300조각으로 박살 난 항아리였습니다.

사연인즉슨 이 항아리는 ‘소설의 신’으로 유명한 시가 나오야(志賀直哉·1883~1971)와 관계가 있는 백자입니다. 즉 시가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 관음원(觀音院)에 머물며 신세를 지고 돌아갔는데요.

이후 시가가 이 절의 주지인 가미츠카사 카이운(上司海雲)에게 감사의 뜻으로 백자 항아리를 주었답니다. 그래서 ‘시가의 항아리’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 항아리는 이후 관음전의 응접실에 보관돼 있었는데요.

1995년 7월 4일 사달이 벌어집니다. 대낮에 사찰에 침입한 한 남자가 달항아리를 들고 도망가다가 발각된 겁니다. 그러자 범인이 달항아리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도망갔습니다. 사찰 측은 산산이 조각난 항아리를 가루까지 솔로 쓸어담았답니다. 셀 수 있는 도자기 편만 300조각이 넘었답니다. 이 항아리 조각 및 가루는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박물관에 그대로 기증됐는데요. 박물관 측은 고심 끝에 ‘가능한 형태만이라도 남겨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수리·복원 전문가들은 ‘불가능한 미션’이라며 손사래를 쳤는데요. 그중 한 전문가가 손을 들고 나섰답니다.

6개월 후 그 전문가가 복원 중인 달항아리를 들고 왔는데요. 300조각 난 항아리가 거의 완벽한 형태로 복원된 상태였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복원 전문가가 한마디 했다는데요.

“앞으로의 복원 방향은 두 가지입니다. 복원한 흔적까지 완전히 지울 수도 있고, 혹은 자세히 보면 복원한 흔적을 알게 할 수도 있습니다. 두 가지 방법 중 어떤 것을 고르시겠습니까.”

박물관 측은 서슴없이 “두 번째, 복원 사실을 알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답니다. 이렇게 ‘시가의 항아리’가 완전 복원됐습니다.

저는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다’는 수리 흔적을 찾으려고 눈을 씻고 들여다보았는데요. 결국 찾지 못해 전시기획자의 설명을 듣고서야 흔적을 분간할 수 있었습니다.

이 두 점 외에도 ‘베스트 40’에 선발된 ‘보물’ 달항아리 또한 나름의 특징이 있답니다. 가운데 부분에 아래위를 따로 만들어 붙인 흔적이 보이죠. 달항아리의 제작특성이 단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습니다.

백자가 ‘제사용 술(祭酒)’과 ‘참기름(眞油)’을 담는 용도 등 생활용기로 쓰였다는 사실은 <승정원일기> 등에서 보인다. /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백자가 ‘제사용 술(祭酒)’과 ‘참기름(眞油)’을 담는 용도 등 생활용기로 쓰였다는 사실은 <승정원일기> 등에서 보인다. /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중력을 거스르는 도공의 분투 재미있죠. 화려하고 예쁜 백자도 많고, 그런 백자들도 절정의 예술성을 뽐내죠. 그런데 왠지 살이 좀 찐 듯하고, 또 조금은 비대칭이면서 아무런 무늬도 없는 달항아리에 마음이 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조선조 성종(재위 1469~1494)이 그 순백의 의미를 알았던 것 같아요. 성종은 안료를 사용하지 않은 순백자 잔을 승정원에 하사한 뒤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이 술잔은 맑고 티가 없다. 술을 따르면 티끌이나 찌꺼기가 다 보인다. 사람에게 비유하면 ‘대단히 공평하고 지극히 바르다(大公至正)’고 할 수 있다.”(<성종실록> 1491년 12월 7일)

하지만 성종이라면 몰라도 웬만한 사람들은 조선백자의 멋과 흥취를 깨닫지 못했던 것 같아요. 심지어 북학파 실학자인 박제가(1750~1805)조차 “중국 자기는 정교하고 화려하지만 조선 자기는 몹시 거칠다”(<북학의> ‘내편·자’)며 ‘디스’했답니다.

그런 마당에 17세기 후반(숙종 말)~18세기(영·정조)까지 100년 남짓 동안 반짝 생산됐던 달항아리는 더군다나 ‘관심 밖’이었겠죠. 또 생각해보십시오. 높이가 40㎝가 훌쩍 넘는 대형 백자를 만들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큰 항아리를 한 번에 물레로 성형하려 하다가는 스르르 무너져 버리기 십상이었겠죠. 그래서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만들어 붙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큰 항아리를 구워내는 과정에서 갈라지거나 틀어진 부분을 완벽하게 원형으로 마무리 짓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생활용기로 제작했기 때문에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날렵한 대칭과 깔끔한 몸체를 자랑하는 중국·일본의 수출용 도자기와는 달랐겠죠.

‘잘생긴 며느리?’ 그와 같은 인식은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 직후까지 이어집니다.

새삼스럽게 따져 볼 것이 바로 ‘달항아리’의 명칭입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백자대호(白瓷大壺)’라는 무미건조한 이름을 썼는데요. 해방 이후 화가 김환기(1913~1974)와 미술사학자인 혜곡 최순우(1916~1984)가 멋들어진 이름을 지었습니다.

한자리에 모아둔 백자 베스트 42점 가운데는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백자들이 즐비하다. / 리움미술관 제공

한자리에 모아둔 백자 베스트 42점 가운데는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백자들이 즐비하다. / 리움미술관 제공

‘밤하늘에 둥실 떠 있는 보름달 같은 백자’라 해서 ‘달항아리’라는 이름을 붙인 겁니다.

고미술상이었던 홍기대(1921~2019)는 “김환기 화백은 찌그러진 백자 항아리를 좋아했는데, 특히 일제강점기 마루츠보(圓壺)라 일컬어졌던 항아리를 특별히 ‘달항아리’라 했다”고 전했습니다. 김 화백은 1949년 ‘신천지’에 “지평선 위에 항아리가 둥그렇게 앉아 있다. 굽이 좁다 못해 둥실 떠 있다. 둥근 하늘과 둥근 항아리와…”(‘이조 항아리’)라고 읊을 만큼 ‘달항아리’에 매료된 분이죠.

김 화백과 교유했던 최순우 선생도 1963년 4월 17일 동아일보에 ‘달항아리 예찬론’을 펼칩니다.

“오늘 노감상가 한분이 찾아와 시원하고 부드럽게 생긴 큰 유백색 ‘달항아리’를 어루만져보고는 ‘잘생긴 며느리 같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그저 느껴야 하오.” 얼마나 절묘한 표현입니까. 원형을 이루다가 곧 이지러지는 달이 백자 항아리를 쏙 빼닮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같은 달이지만 달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달을 보죠. 달항아리를 보면서 저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저마다 다른 상상의 나래를 펴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멋들어진 ‘달항아리’ 이름은 2000년대 초까지는 학술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터부시됐습니다.

그러다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의 개관 첫 전시 제목을 ‘백자 달항아리’ 특별전으로 붙일 만큼 인식이 바뀌었고요. 마침내 2011년 국보 명칭을 ‘백자대호’에서 ‘백자 달항아리’로 바꾸었습니다.

만약 지금까지 어려운 한자인 ‘백자대호’니 ‘백자대항’이니 했다면 어찌 됐겠습니까. 달항아리는 지금처럼 대중에게 사랑받는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달항아리 감상평 중 고고미술사학자 김원룡 선생(1922~1993)의 한마디가 백미인 것 같습니다.

“조선백자…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오. 느껴서 모르면 아예 말을 마시오…. 여기에 무엇 새삼스러이 이론을 캐고 미를 따지오….” 그래서 저도 <조용히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특별전을 ‘그저 느끼고’ 왔습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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