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요청할 용기, 안심시켜줄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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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6일 밤 12시 50분쯤 밖에서 한 여성의 외침이 들렸다. 잘못 들었는가 싶었는데 흐느낌 같기도 한 외침이 점점 커졌다. 서둘러 창문을 열었다. 도로변에서 하얀 롱패딩을 입은 한 여성이 겁에 질려 울먹이는 목소리로 “살려주세요!” 하면서 소리치고 있었다. 여성 뒤로 한 남성이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따라가고 있었다. 여성이 큰소리로 “살려달라”며 앞장서 달아나니 남성은 당황한 눈치였다.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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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를 위해 휴대전화를 챙기는데 “저희가 지켜보고 있어요!”라는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맞은편에도 오피스텔이 있었는데 거주민 중 한 여성이 외친 목소리였다. 그 말에 구호를 요청한 여성은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제발 도와주세요!”라고 흐느꼈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한적한 새벽 도로 위, 여성의 구호요청이 메아리처럼 퍼지는 듯했다. 다시 한 번 맞은편 오피스텔에서 여성이 “여기 지켜보는 사람 많아요!”라고 달랬다. 구호를 외치던 여성의 흐느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여기도 지켜보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막상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누군가 대표해 말했고, 구호를 요청한 여성 주변으론 꽤 많은 시민이 모여들었다. 이들이 신고하는 모습을 보니 굳이 말을 보태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합리화가 나를 머뭇거리게 했던 것 같다. 맞은편 오피스텔에는 꽤 많은 거주민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처럼 머뭇거리고 있는 걸까 궁금했다. 목소리를 보탠다는 것도 ‘용기’를 필요로 하는구나, 몸으로 느꼈다. 잠시 뒤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자 입주민들이 하나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일부는 경찰이 돌아갈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구호요청에 응답한 여성도 끝까지 상황을 보고 있었다. 어두운 데다 맞은편이어도 거리가 꽤 됐다. 얼굴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서로 눈을 맞춘 것도 같았다.

용기 내 목소리를 낸 그 여성을 수소문했다. 다행히 연락이 닿아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40대 직장인이라는 여성은 “저는 그런 위급한 상황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여성분이 너무 무서워 보였다”며 “사실 제가 겁이 되게 많다. 저도 무서운데 저분은 혼자서 얼마나 무서울까 싶어서 우선 목소리라도 전달하면 안심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여성의 남편은 신고를 했다고 한다. 그는 “여성분이 ‘살려달라’고 한 게 더 대단하다”고 했다. 아무도 모르게 지나갈 수 있었을 피해를 크게 알린 건 당사자였다. 그를 보며 “지켜보고 있다”고 말을 건넬 용기도 낼 수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여성이 여성의 위험신호에 즉각 반응한 것이다.

목격자가 많으면 도움의 손길이 줄어든다는 ‘방관자 효과’를 예방하려면 피해자가 특정인을 지목해 “살려달라”고 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한다. 물론 지목하는 게 효과적이겠지만, 그날 직접 본 피해 당사자는 누구를 지목할 정신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피해자나 목격자 모두 그저 ‘용기’가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앞으론 더 용기를 내리라 다짐해본다.

<유선희 뉴콘텐츠팀 기자 y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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