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똥휴지도 작품으로…예술은 비싼 싸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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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소재를 예술로 품는 팔순의 개념미술가 성능경

성능경 작가가 지난 2월 23일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화동 백아트 갤러리에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성 작가 뒤로 그가 2020년 7월부터 매일 아침 화장실에서 사용한 휴지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하고, 이를 앱 프로그램을 이용해 컬러링한 ‘밑그림’ 연작이 보인다. / 서성일 선임기자

성능경 작가가 지난 2월 23일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화동 백아트 갤러리에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성 작가 뒤로 그가 2020년 7월부터 매일 아침 화장실에서 사용한 휴지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하고, 이를 앱 프로그램을 이용해 컬러링한 ‘밑그림’ 연작이 보인다. / 서성일 선임기자

성능경 작가(79)는 1970년대 이후 실험미술의 흐름을 주도한 한국의 대표적 개념미술가다. 신문, 사진, 퍼포먼스 등을 이용해 자신만의 독보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해왔다. 신문 기사 오려내기, 스트레칭하기,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신체 촬영하기 등 일상을 예술로 수용한 그의 작품은 파격적이다. 관객 앞에서 배뇨를 하거나 대변 닦은 휴지를 매일 촬영해 형형색색의 색을 입혀 완성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 미술계로부터 아주 오랜 기간 외면받았다. 철저히 소외됐고 비주류로 존재했다. 55년간 작가생활을 해왔지만 ‘불러주는 곳’이 없어 지금껏 개인전을 연 것은 고작 다섯 차례에 불과했다. 스스로 ‘업신여김’을 넘어 ‘없음여김’을 당했다고 표현할 정도다.

그런 그는 올해 개인전과 단체전을 오가며 다수의 전시를 연다. 지난 2월 22일 서울 종로구 화동 백아트 갤러리에서 개막한 개인전을 시작으로 5월과 9월 국립현대미술관과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각각 <한국실험미술 1960-1970> 그룹전이 개최된다. 8월 갤러리현대와 9월 리만 머핀 뉴욕, 내년 2월 로스앤젤레스의 해머미술관에서 개인전도 예정돼 있다.

지난 2월 23일 개인전 <아무것도 아닌 듯…성능경의 예술 행각>이 열리는 백아트 갤러리에서 성능경 작가를 만났다. 희고 긴 턱수염을 가진 ‘팔순’의 노작가는 숱이 많지 않은 머리카락을 뒤로 모아 동여맨 모습이었다. 중절모와 셔츠 속 스카프, 헐렁한 청바지…. 패션감각이 돋보였다. 전날이 전시 개막일이어서 과음을 했다는 그는 시종 구수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신문: 1974.6.1 이후’(1974). 사진과 광고, 행간만 남기고 모든 기사를 면도날로 오려내는 퍼포먼스다. 신문 검열로 공기능을 거세당해 제 기능을 못하는 현실을 풍자했다. / ⓒ성능경

‘신문: 1974.6.1 이후’(1974). 사진과 광고, 행간만 남기고 모든 기사를 면도날로 오려내는 퍼포먼스다. 신문 검열로 공기능을 거세당해 제 기능을 못하는 현실을 풍자했다. / ⓒ성능경

-전시회 때마다 항상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끌고 입장하지요. 선글라스와 분홍색 헤어캡, 권투선수가 입는 것과 같은 가운 차림으로 부채를 들고 제사축문(祭祀祝文)을 하는 것도 일정한 수순이고요. 어떤 의도로 이 행위를 하는 건가요.
“내가 입장할 때 끄는 여행용 가방은 무게만 6~7㎏이에요. 그 안에 여러 소품이 들어 있어요. 동서고금의 모든 이야기가 나의 예술 소재임을 보여주는 퍼포먼스죠. 그래서 축문을 읽을 때도 나만의 특성이 있어요. 처음에는 우리 전통의 어조로 읊다가 끝날 때는 서양의 신부들이 미사 드릴 때와 같은 어조로 바꿔서 읽거든요. 마치 비빔밥처럼요.”

올해 국내와 해외서 개인전·그룹전 예정
전시 개막식마다 여행가방과 축문 읽기
수영복 입고 훌라후프, 관객에 새총도
일상 속 행위 숨김없이 보여주고 싶어

-이번 <아무것도 아닌 듯…성능경의 예술 행각>전 개막식 때는 축문을 읽은 후 옷을 하나씩 벗어 삼각 수영복만 입었어요. 그러고는 훌라후프를 돌리면서 새총으로 탁구공을 관객에게 쏘았죠. “예술은 비싼 싸구려다!”, “예술은 소통의 불통이다!”라고 외치면서요.
“과거에는 불 켜진 손전등을 입에 물고 관람객 사이를 다니면서 여기저기 불빛을 쏘고, 또 그걸로 자위행위 시늉을 하기도 했어요. 반짝이는 망사천을 설치하고 그 속에서 오줌을 누는 행위를 보여주기도 했고요. 때로는 일상 영어나 경구, 광고나 영화 카피를 낭독하거나 드로잉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해요. 우리 일상에서 이뤄지는 행위들을 숨김없이 보여주고자 했어요. 일상을 예술의 범주로 가져온 것이라고 할까요? 관람객과 소통하는 행위이기도 하고요. (손가락으로 작품을 가르키며) 여기 설치한 ‘밑그림’ 연작(2020)은 봤습니까?”

-예. 시각적으로 화려해 보이더군요. 얼핏 보면 꽃을 촬영한 것으로 오해할 정도로요.
“2020년 7월부터 매일 아침 화장실에서 사용한 휴지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하고, 이를 앱 프로그램을 이용해 컬러링한 거예요. 다른 나의 많은 작품이 그렇듯이, 이런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재료로 삼아 결국 우리가 예술 또는 문화로 포장한 것들을 한 꺼풀 벗겨내면 인간의 원초적 모습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거죠.”

-‘예술과 똥은 한 끗 차이다’일 수 있겠군요.
“그렇게 읽힐 수도 있겠죠. 하하하….”

성능경 작가는 충남 예산 출신이다. 아버지는 운수업에 종사했고 그의 집은 삼시 세끼 쌀밥을 먹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그가 미술을 전공한 것은 사촌형인 성찬경 시인(1930~2013)의 영향이 컸다. 서울대 영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성 시인은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폐병을 앓아 성 작가의 집에서 오랫동안 요양을 했다. 그는 성 작가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그린 그림을 보며 “너는 장차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담배 피우는 과정을 17장의 사진으로 연속해 보여주는 ‘끽연’(1976). / ⓒ성능경

담배 피우는 과정을 17장의 사진으로 연속해 보여주는 ‘끽연’(1976). / ⓒ성능경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운 것은 언제인가요.
“나는 학창시절 미술반 활동을 안 했어요. 대신 사진 중심의 미국 잡지 ‘라이프’ 등을 통해 앵포르멜 미술(비정형 미술)에 푹 빠졌죠. 당시 한국에 주둔한 미군들로 인해 해외 잡지들이 많이 수입됐거든요. 그걸로 독학했어요. 그러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성)찬경 형의 소개로 경복고에서 찬경 형과 함께 교편을 잡고 있던 서양화가 이규상 선생님(1918~1967)께 제 그림을 보여드렸어요.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그림을 계속하라며 미술학원을 소개해 주셨어요. 미대에 가려면 석고 데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요.”
그는 1963년 홍익대 서양학과에 입학해 1967년 졸업했다. 대학 2학년 때 학과 동기인 김휘부, 이경석과 함께 <ㄱ ㅇ ㅅ>을 개최하며 첫 전시 이력을 시작했다. 1966년 졸업전시회에선 100호 크기의 추상회화 ‘Image 661’과 ‘Image 662’를 발표했다. 졸업 이듬해인 1968년 <제12회 현대작가초대미술전>에 추상회화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그는 1970년 군에 입대해 1973년 제대했다.

-군 제대 후 개념미술을 시작한 건가요.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니까 제가 속한 ST(Space & Time·조형미술학회)에선 유리나 돌덩어리 등 각종 물질을 이용한 입체미술이 대세였어요. 고민 끝에 스테인리스판을 흰색 돌덩어리 두 개를 맞물려 휘게 한 뒤 벽에 세워놓고 ‘상태성’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망신살이 뻗쳤어요. 누가 ‘저게 상태성이래’라고 말하면서 피식 웃으며 지나가는 거예요. 당황스럽고 부끄러워 앞으로 입체미술은 안 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러다 1973년 개념미술이라는 용어를 처음 접했어요. 당시만 해도 나는 탈물질, 탈미술관으로 개념미술을 이해했어요.”

-그 첫 작품이 <제3회 ST>전에서 발표한 ‘신문: 1974.6.1 이후’이지요.
“미술에서 물질성을 제거하고 나니 정보로서의 미술만 남더라고요. 그래서 정보가 담겨 있는 신문을 작업의 매체로 사용한 거예요.”
‘신문: 1974.6.1 이후’(1974)는 성 작가의 대표작이다. 그는 1974년 6월 21일부터 일주일 동안 매일 동아일보를 전시회장에 가져와 4장의 하얀 패널에 붙였다. 그런 다음 면도날로 신문의 모든 기사를 오려낸 다음 패널 앞에 놓아둔 반투명 청색 아크릴 통 속에 넣었다. 신문에 남은 부분은 사진과 광고, 행간뿐이다. 그는 이 작업을 하면서 두려움을 느꼈다고 했다. 당시는 박정희 유신독재 시대로, 언론의 보도가 군에 의해 철저히 검열되던 때였기 때문이다. 1974년 12월 26일에는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까지 일어났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1974. 10. 24)을 발표하고 투쟁에 나서자 군사정권이 압력을 가하면서 기업의 광고계약이 줄줄이 취소된 탓이다.

화살표 등의 표식이 그려진 보도사진을 촬영한 후 해당 필름에 같은 표식을 다른 방향으로 그려 넣어 교란시킨 ‘현장 3’(1980). 10장의 사진이 한 세트다. / ⓒ성능경

화살표 등의 표식이 그려진 보도사진을 촬영한 후 해당 필름에 같은 표식을 다른 방향으로 그려 넣어 교란시킨 ‘현장 3’(1980). 10장의 사진이 한 세트다. / ⓒ성능경

-군부 정권의 신문 검열을 짐작게 하는 작업을 그 시절에 했으니 상당한 각오가 필요했겠군요.
“참여문학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러면 나는 참여미술을 해보자는 심정으로 했어요. 언론이 통제받는 상황에서 공기능을 거세당해 기능을 못 하는 신문의 기사들을 오려내는 것이죠. 그런데 당시는 택시에 탄 승객이 술김에 정권을 욕하면 운전기사가 승객을 태운 채 경찰서로 직행하던 시절이에요. 매일 석간인 동아일보를 사서 전람회장에 가져갔는데 혹시 정보기관 사람이라도 안 왔는지 내내 노심초사했어요. 그런 어느 날 내가 신문에 칼질을 하고 있는데 누가 내 어깨를 톡톡 쳐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뒤돌아봤죠.”

-정보기관 요원이었나요.
“아뇨. 어떤 남자가 신분증을 쓱 내밀더니 자기가 경향신문 기자라고 해요. 그러면서 내 작업이 충격적이라며 퍼포먼스 끝나고 인터뷰하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했습니까.
“아뇨. 바쁜 일 있다는 핑계를 대고 줄행랑쳤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인터뷰를 했으면 사회적 파장도 일으키고 경찰에 잡혀가 몇 대 얻어맞고 나오면 나의 사회적 계급도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어쩌면 김지하씨 정도? 하하하….”

신문 도려내는 ‘신문: 1974.6.1. 이후’
군부정권의 신문 검열 암시한 참여미술
당시 시국 무서워 신문 인터뷰도 뿌리쳐
올 9월 뉴욕 구겐하임 단체전에도 출품

-1975년 이후 신문, 퍼포먼스와 함께 사진이 성 작가 개념미술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해요. ‘액자’ ‘사진첩’ ‘여기’ ‘자’(이상 <제4회 ST>전), ‘사과’ ‘끽연’ ‘손’(이상 <제5회 ST>전)을 발표하죠. 어쩌다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됐나요.
“신문 작업을 하다 보니까 보도사진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정보를 제공하는 탈물질 재료로 사진만 한 게 없거든요. 기사의 내용과 사진설명이 사라져 더는 언어를 통한 의미 전달이 불가능해진 사진에 주목한 거죠. 보도사진은 사진작가들의 작품과 달리 낮은 퀄리티의 인쇄물이어서 저평가할 수밖에 없지만, 또 그래서 매력이 있어요. 아버지께 말씀드려 1974년 니콘 카메라를 하나 구입했어요. 그걸로 연습해 작품을 만들었죠.”
‘사과’는 작가 자신이 사과 먹는 과정을 9번 촬영해 17장 인화한 작품이다. 그는 “문명사적으로 봤을 때 아담의 사과 다음에 뉴턴의 사과가 있었고, 이상의 사과가 있었으며, 스티브 잡스의 사과에 이어 성능경의 사과가 있다”고 말하며 웃었다. ‘끽연’은 담배를 피우면서 담뱃재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촬영했다.

몸에 쿠킹호일을 휘감아 부착하는 퍼포먼스에서 비롯되는 여러가지 신체 동작의 차이를 이강우 사진가가 촬영한 ‘쿠킹호일맨’(2001). 12장의 사진을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 ⓒ성능경

몸에 쿠킹호일을 휘감아 부착하는 퍼포먼스에서 비롯되는 여러가지 신체 동작의 차이를 이강우 사진가가 촬영한 ‘쿠킹호일맨’(2001). 12장의 사진을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 ⓒ성능경

-이상의 사과는 뭔가요.
“이상 시인은 ‘최후’라는 시에서 ‘사과 한알이 떨어졌다. 지구(地球)는 부서질 그런정도(程度)로 아펐다’고 했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이상은 기후위기로 몸살을 앓는 오늘의 지구 현실을 예견한 것 같아요.”
1979년 그는 신문, 사진, 드로잉 행위를 결합한 ‘현장’ 연작을 시작한다. 1989년 ‘현장 35’까지 이어지는 시리즈다. ‘현장 1’은 화살표나 점선, 실선 등으로 독자의 이해를 돕는 표식을 한 보도사진을 재료로 삼았다. 작가는 이 보도사진을 촬영한 후 해당 필름에 같은 모양의 표식을 다른 방향으로 그려넣었다. 미술사학자 조수진은 “이를 통해 작가는 해당 사진의 메시지를 무효로 만들고 언론의 편집 권력을 해체하고자 했다”고 풀이했다. ‘현장’ 연작에는 1980년대 초반 민주화 운동 시위대와 진압 경찰의 이미지들도 담겼다. 조수진은 “이들 이미지를 담은 ‘현장 29a’(1987)와 ‘현장 29b’(1987)는 캐나다 토론토와 미국 뉴욕에서 열린 <민중예술전>에 출품돼 루시 리파드에 의해 당대 한국 정치 상황을 반영한 작품으로 해석됐다”고 소개했다. 1985년 관훈미술관에서 열린 첫 개인전인 <성능경전>은 ‘현장’이라는 제목 아래 ‘현장 8’(1985)부터 ‘현장 24’(1985)까지 전시됐다.

바닥에 서거나 누운 채 팔다리를 펼쳤다 접었다를 반복하는 행위를 12장의 사진으로 보여주는 ‘수축과 팽창’(1976). / ⓒ성능경

바닥에 서거나 누운 채 팔다리를 펼쳤다 접었다를 반복하는 행위를 12장의 사진으로 보여주는 ‘수축과 팽창’(1976). / ⓒ성능경

-1990년대 들어 ‘S씨의 망친 자손들-망친 사진이 더 아름답다’(1991), ‘The wall-망친 영화가 아름답다’(1992), ‘망친 예술이 더 아름답다’(1993) 등 ‘망친’을 화두로 한 작품을 잇따라 발표했어요.
“가령 ‘망친 사진이 더 아름답다’는 촬영하다 보면 노출이 부족하거나 초점이 어긋나는 등의 이유로 제대로 안 찍힌 사진들이 필연적으로 나오잖아요. 이것들을 차곡차곡 모아 전통적인 예술의 심미관을 다시 돌아보는 작품의 재료로 삼은 거예요. 이미 예술인 것에 대한 실망감과 거부의식, 그리고 그런 게 합쳐져 난센스 미술이 탄생한 거죠. 아직 미술로서 인정받지 못한 것들이 미술이 될 가능성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그는 1990년대에 극심한 공황장애를 앓았다. 그 이유와 이후 건강상태가 궁금했다.

보도사진 비튼 ‘현장’ 연작은 시대 고발
‘망친’ 시리즈로는 예술의 심미관 건드려
1990년대 공황장애로 미술 내려놓을 뻔
55년 경력에도 “오래오래 예술하고 싶다”

-어쩌다 공황장애를 앓았나요.
“1991년이었어요. 집에서 어느 날 TV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숨이 가빠지더니 콱 막히더라고요. 일어서다가 소파와 함께 뒤로 넘어졌어요. 동네 응급실을 거쳐 대학병원에 실려갔는데, 공황장애라는 거예요.”

-왜 공황장애가 왔을까요.
“1970~1980년대 화단에서 소외되면서 미술가로서 내 인생은 끝났구나, 실패했구나, 그런 생각을 계속하다 보니 고개를 못 들고 다녔어요. 가슴에 항상 큰 돌멩이 하나가 얹힌 느낌이었어요. 그런 스트레스가 쌓여 증상으로 나타난 것 같아요.”

사진/서성일 선임기자

사진/서성일 선임기자

-건강은 회복했습니까.
“이러다 생명을 잃겠구나 싶어 차라리 미술을 포기하자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3년간 상담과 함께 치료를 받았죠. 미술에 대한 압박감을 놓으니까 조금씩 몸의 증상이 사라지면서 가슴속에 박힌 돌멩이도 저절로 삭아 녹는 것 같더라고요. 어쩌면 운동을 열심히 한 효과일지도 몰라요. 담당의사의 권유로 주 1회 반드시 등산하고 집에서도 매일 하루 1시간 이상씩 스트레칭을 해 몸을 단련시켰거든요.”

-그러고 보면 지난해까지 개인전이 열린 게 다섯 번뿐이니, 지금껏 해온 작업은 돈이 별로 안 됐을 것 같아요.
“내 소원이 하나 있어요. 죽기 전에 내가 생산한 작품은 다 팔아먹자에요. 하하하…. 그래도 국립현대미술관과 아르코미술관 등 일부 미술관에는 내 작품 몇 점이 들어가 있어요. 평생 단 한 점도 못 판 작가들도 수두룩하니 그보다는 낫죠.”

-작가생활 55년 동안 생활비는 어떻게 조달했나요.
“아내가 성찬경 시인의 외갓집 조카예요. 1979년에 찬경 형의 중매로 결혼했는데, 아내가 초등학교 교사였어요. 어려서는 아버지가, 결혼해서는 아내가 나를 먹여 살렸죠. 아내가 그러더라고요. 사기당해 결혼한 거라고. 하하하….”
국립현대미술관과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릴 단체전에는 모두 29명의 실험미술 작가가 참여한다. 성 작가는 어떤 작품을 출품하는지 물었다. 그는 “‘신문: 1974.6.1 이후’와 ‘신문 읽기’, ‘사과’ 이렇게 세 작품을 출품하게 될 것 같다”고 답했다.
인터뷰 말미,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느냐고 묻자 그는 “오래오래 예술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무것도 아닌 듯…성능경의 예술 행각>은 4월 30일까지 계속된다.

<박주연 선임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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