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라디오 <신·영·음> 25주년 맞은 신지혜 아나운서
“오늘 첫 곡은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중에서 바르다가 차 안에서 따라 부르던 그 곡이에요. ‘링 마이 벨(Ring My Bell)’…. 아니타 워드가 부릅니다.”
매일 오전 11시, 이탈리아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의 OST ‘바이시클(bicycle)’의 선율이 흐르면 어김없이 중저음의 차분한 목소리가 청취자들의 마음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25년간 CBS 음악 FM(93.9MHz) <신지혜의 영화음악>(이하 <신영음>)을 지켜온 신지혜 아나운서(54)다. 매년 봄·가을 개편 때마다 1, 2년도 안 돼 숱한 프로그램들이 사라지는 라디오 세계. 그 속에서 25년을 한결같이, 그것도 영화음악으로 청취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다. 동시간대 청취율 1위도 거의 빠짐없이 기록 중이다.
<신영음>은 신지혜 아나운서의 1인 제작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 나오는 작가 한 명이 일부 원고를 써주는 것을 제외하곤 모든 일을 신 아나운서 혼자 처리한다. 기획·연출·진행은 물론 청취자들을 위한 이벤트 준비까지 모두 그의 몫이다. 지난 3월 7일 신 아나운서를 CBS 사옥에서 만났다.
-지난 2월에 <신영음> 25주년을 맞았지요. 감회가 어떻습니까.
“청취자들이 계셔서 여기까지 왔어요. 그분들이 신지혜가 영화에 애정을 갖고 있고, 선곡을 잘한다고 인정해주신 결과예요.”
-매일 10~14곡을 틀어주던데, 선곡의 원칙이 있나요.
“오늘은 이 곡을 들려드리면 좋겠다고 생각해둔 음악도 있지만, 많은 경우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청취자들의 사연을 보면서 그때그때 선곡을 해요. 이런 사연엔 이 곡이 어울리겠다 싶은 곡을 들려드리죠. 그런데 되도록 오리지널 스코어를 틀어요. 영화음악의 본질은 해당 영화를 위해 작곡한 오리지널 스코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가령 ‘가브리엘 오보에’는 <미션>의 오리지널 스코어지만, ‘넬라 판타지아’는 사라 브라이트만이 가사를 붙여 부른 노래로, 영화에는 나오지 않거든요.”
-PD 없이 일인다역을 소화하다 보니, 생방송 중에도 분주해 보여요.
“저는 방송하며 두 개의 모니터를 봐요. 하나는 인터넷 검색과 함께 오프닝 멘트 같은 한글문서를 작성하고,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사연도 보는 모니터고요, 다른 하나는 nCROS라는 통합단말이에요. 쉽게 말해 음원을 카트에 꺼내놓고 페더를 올리면 해당 카트의 음원이 송출되는 모니터예요. 그래도 과거에 비하면 작가도 붙여주고 많이 나아진 거예요. 예전에는 음반을 사용하다 보니 음악을 틀어놓고 수시로 음반자료실로 냅다 뛰어가 30초 만에 CD를 찾아와야 했어요. 사연도 부스 밖 팩스로 수시로 받고, <신영음> 시사회 초대권도 제가 일일이 봉투에 넣어 부쳤어요(웃음).”
PD 없이 일인다역으로 생방송 소화
예전엔 수시로 음반자료실 뛰어가고
시사회 초대권도 직접 일일이 포장해
-음반을 어떻게 30초 만에 찾아올 수 있나요.
“음반자료실에서 CD마다 장르별로 고유 기호와 숫자로 넘버링을 해서 관리해요. 생방송 중에 신청곡이 들어오면 바로 그 음반을 가져와야 하니까 저는 자주 신청이 들어오는 곡은 각 CD의 고유 번호를 리스트로 만들어 지니고 다녔어요. 아예 넘버링을 외우는 곡도 많았고요.”
<신영음>이 처음 청취자와 만난 것은 1998년 2월 2일이다. 그가 CBS에 입사한 지 4년 만의 일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만 29세였다.
-짧은 연차임에도 진행자 이름까지 내건 영화음악 전문 프로그램을 맡았어요. 꽤 기쁜 일이었을 것 같은데, 원래 영화마니아였나요.
“어려서부터 영화를 좋아했어요. KBS <토요명화>, MBC <주말의 명화> 열혈 팬이었어요. EBS 영화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였고요. 중학생 때 영화감독과 영화배우, 영화 내용을 적고 별점을 매긴 노트까지 있었어요. 1994년 CBS 아나운서로 입사한 후 어떤 음악이 나오거나 특정 풍경이 보이면 제가 이 음악은 어느 영화에서 나온 거라고 하든가, 어느 영화의 어떤 장면과 흡사하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많이 했나 봐요. 1950~1960년대 영화까지 줄줄이 꿰니까, 나이든 선배들이 놀라셨어요. 그러다 1995년 12월에 CBS에 음악 FM이 생기면서 제게 기회가 주어진 거예요(웃음).”
-1995년부터 영화 프로그램을 맡았다는 얘기인가요.
“그때는 일요일 밤에 2시간 동안 방송하는 <시네마 천국>이었어요. 제가 진행한 이 프로그램이 이듬해 가을 개편 때 오전 11시대로 옮겨진 거예요. <오정해의 영화음악실>과 <추상미의 영화음악>을 거쳐 1998년 봄 개편 때 제가 다시 맡게 된 거고요.”
-영화를 좋아해도 음악을 기억하기는 쉽지 않은데,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나 봐요.
“1979년부터 전파를 탄 TBS FM <김세원의 영화음악실> 애청자였어요.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서 거듭 들었어요.”
-현재 맡고 있는 프로그램은 <신영음>뿐인가요.
“아니에요. 매일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2시간 동안 방송되는 종교 프로그램인 <신지혜의 내가 매일 기쁘게>도 맡고 있어요. 이 프로그램은 하루 전날 녹음해 방송해요. 또 당연히 뉴스도 진행하고요.”
-일정이 빡빡하겠어요. 일과가 어떻게 이뤄지나요.
“오전 9시에 출근하면 바로 다음 날과 주말에 방송될 <내가 매일 기쁘게>를 녹음해요. 그런 다음 <신영음>의 오프닝 멘트를 쓰고 처음 들려드릴 곡을 결정하고 각 코너의 원고를 숙지한 후 어떤 음악을 틀어드리면 좋겠다고 생각해둬요. 물론 생방송 중에 올라오는 사연에 맞춰 선곡하는 것도 많고요. 정오에 <신영음>이 끝나면 예전에는 개봉을 앞둔 영화의 시사회에 갔는데, 코로나19 사태 이후부터는 스크리너로 받아서 점심시간에 김밥을 먹으면서 봐요. 일주일에 평균 3~4편을 보고, 관련 정보들을 숙지하죠. 이후 뉴스 진행이 없으면 책을 읽거나 3시간쯤 휴가를 내서 미술 전람회에 가기도 해요.”
-힘에 부치지는 않나요.
“너무 힘들어요(웃음). 사실 아나운서들은 거의 다 역류성 식도염이 있어요. 초창기에 아침 뉴스 앵커까지 맡았을 때는 녹음을 마치자마자 3층 스튜디오에서 2층 보도국으로 내려가서 뉴스 원고를 받아 다시 3층 끝 다른 스튜디오로 뛰어가서 방송해야 했어요. 생방송의 경우 1초라도 늦으면 대형 사고니까 알람을 맞춰놓고 다른 프로그램을 하면서도 수시로 시계를 보죠. 여기에 저는 1인 제작이다 보니 긴장감이 더 높을 수밖에 없어요.”
-직업병이랄까, 영화를 보면 음악에 더 귀를 기울일 것 같아요.
“그래서 스크리너를 보면서 좋은 음악이 귀에 꽂히면 바로바로 메모해둬요.”
-영화에서 음악의 비중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나요. 음악 없는 영화도 있는데.
“음악이 가미되지 않은 영화는 소금간 안 한 고기 같지 않을까요? 물론 질 좋은 신선한 고기는 간을 안 해도 맛있지만, 소금과 후추만 쳐도 맛이 더 살잖아요. 벨기에 출신의 다르덴 형제 감독은 의도적으로 영화음악을 거의 안 써요. 영화제작 현장에서 일상화된 특수효과 등을 모두 거부했던 ‘도그마 95’의 감독들도 음악은 장면이 촬영되는 곳에서 들리는 것만 쓴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고요. 하지만 대다수 영화에는 음악이 있어요. 제가 이 프로그램을 오래 진행하면서 나름 깨달은 건 영화음악은 단순히 BGM(배경음악)이 아니라는 거예요.”
-무슨 뜻인가요.
“영화는 내러티브가 중요하잖아요. 미장센을 중시했던 유럽영화도 요즘에는 내러티브에 더 강하게 방점을 두고 있고요. 그런데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데 있어 음악의 역할이 커요. 가령 카메라 속 배우가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슬픈 음악이 흐르면 저 사람은 지금 슬픈가 보다라고 생각하게 돼요. 반면 경쾌한 음악이 흐르면 엉뚱하거나 재미있는 캐릭터인가보다 하고 상상하게 되죠. 대사 없이 음악만으로도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영화음악을 제2의 내러티브라고 말해요.”
-영화음악 하면 엔니오 모리코네나 한스 짐머 같은 해외 영화음악 거장들이 먼저 떠올라요. 반면 국내에선 스타라 할 만한 영화음악가가 별로 없어요.
“그래서 한국의 영화음악 작곡가들을 알리는 일을 저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25주년을 앞두고 지난해 9월 마지막 주에 개편하면서 이건 꼭 해야겠다고 생각해 ‘이 사람을 소개합니다’라는 제목의 금요일 코너를 신설했어요. 한국 영화음악가를 소개하는 코너인데, 매회 한 명의 영화음악 감독이 직접 육성으로 자신의 대표작과 철학을 소개한 다음 그분들의 대표곡들을 듣는 시간이에요. 영화음악 감독들의 육성을 따 시리즈로 방송하는 것은 음악방송 사상 처음 시도한 일일 거예요. 물론 이 코너와 별개로 이재진, 조성우, 이병우, 최승현 감독님은 자주 저희 스튜디오에 직접 나오셨지만요.”
영화음악은 제2의 내러티브라 생각
한국 영화음악 작곡가들 알리기 위해
음악감독들 육성 따 시리즈로 방송도
-육성은 어떻게 따나요.
“제가 한분 한분 다 섭외해서 직접 녹음해 보내주신 음성을 받았어요. 너무 길면 지루할 수 있으니까 1분~1분 30초로 제가 편집해서 방송으로 내보내요.”
-청취자 반응은 좋습니까.
“이렇게 뜨거울 줄 몰랐어요. 이렇게 훌륭한 음악을 만드셨는데 그동안 감독님 이름도 모르고 있었으니 너무 죄송하다, 계속 응원하겠다, 앞으로 좋은 음악 더 많이 만들어달라는 리뷰가 엄청 쏟아져요. 저도 가슴이 뜨거워지더라고요. 감독님들도 행복해하시고요. 지금은 그래도 영화음악 감독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또 젊은 친구들도 굉장히 좋은 영화음악들을 만들고 있고요. 예를 들면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수리남>을 비롯해 영화 <헌트>, <헤어질 결심>의 영화음악 감독은 30대인 이명로 감독이에요.”
-오래 장수할 코너군요.
“그런데 국내는 신진 영화음악 감독까지 거의 다 소개했어요. 4월부터는 해외 영화음악 감독으로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웃음).”
-한국의 영화음악 수준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1997년 개봉된 영화 <접속>은 오리지널 스코어도 좋았지만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장면 장면에 맞는 음악도 잘 엄선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커요.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영화는 할리우드영화에 비해 경쟁력이 현격히 떨어진다는 인식이 있었어요. 그런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 변곡점은 <쉬리>(1999)였다고 생각해요. 이후 한국영화에 대한 기대감이 크게 높아졌고,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기 시작했어요. 덩달아 영화음악 수준도 상당히 높아졌죠. 조성우, 조영욱, 한재권, 이병우, 최승현, 이지수, 심현정, 이동욱 감독님이 활약하셨어요. 여기에 대중음악을 하시던 달파란, 장영규님도 영화음악 쪽으로 오셨고요. 그러면서 한국 영화음악 수준이 어마어마해진 거예요.”
-특별히 좋아하는 영화음악이 있습니까.
“반짝이는 수많은 별 중 하나만 꼽으라는 것 같아 답하기가 쉽진 않은데요. 특히 엔니오 모리코네가 작곡한 영화 OST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와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은 기가 막히게 빼어나잖아요. 또 반젤리스가 작곡한 <블레이드 러너>의 사운드트랙은 1번부터 마지막 번까지 다 좋아요. 최근으로 오면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음악이 굉장히 좋아요.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음악을 만들었는데 몹시 아름다워요.”
-한국영화 음악은 안 꼽습니까.
“좋아하는 곡이 아주 많은데, 한두 곡만 꼽으면 다른 감독님들이 서운해하실 테니까요. 하하하….”
한국영화는 부침이 많았다. 1988년 영화법 개정 요구와 외국영화 직배 반대시위가 격렬히 일어났다. 1988년 9월 직배사 UIP의 첫 배급영화 <위험한 정사>가 상영된 신촌 신영극장에서 일어난 ‘뱀 소동’은 직배에 반대하는 영화인들이 벌인 일이었다. ‘뱀 소동’은 1989년 UIP 배급영화 <레인맨>이 상영된 극장에서도 재현됐다. 1993년과 2006년에는 스크린쿼터(한국영화 의무상영일 수) 축소 반대시위가 있었다. 그만큼 한국영화의 위기로 받아들인 것이다. 스크린쿼터는 2006년 7월 1일부터 종전 146일에서 73일로 축소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엔니오 모리코네·반젤리스 OST 좋아해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곡들도 아름다워
한국 영화음악 수준도 어마어마해져
-많은 부침 속에서도 한국영화의 세계 속 위상은 크게 높아졌어요. 칸, 베를린, 베네치아 등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큰 상을 잇따라 수상했으니까요.
“내 친구가 너무 잘 됐을 때 느끼는 뿌듯함, 뭉클함을 느껴요. 초창기에 제가 새벽근무를 했을 시기에는 오전 5시 반에 출근해 오후 1시면 퇴근했어요. 그때는 교통이 지금처럼 막히지 않아 운전해서 오후 2시에 시작하는 시사회에도 빠짐없이 갈 수 있었어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매일 시사회장에서 영화를 봤어요. 그러다 보니 영화홍보사 직원들과도 굉장히 친해졌고요. 요즘 한국영화의 성과를 보면 내가 응원하고 싶은 친구가 대성해서 갈채받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 같아 큰 보람을 느껴요.”
-개인적으로 위기를 겪은 시기는 없었습니까.
“몸이 아팠어요. 특히 2007년에는 경추 3번과 4번, 6번과 7번이 완전히 눌려서 거북목이 된 데다 오른팔이 심하게 저렸어요.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요. 1인 제작하는 게 정말 만만치 않은 일이거든요. 펑크가 나면 안 되니까 너무 힘들었던 거죠. 그래서 그때 3개월 무급휴직을 했어요. 2014년에는 제가 아나운서부장이라는 보직까지 맡는 바람에 번아웃 상태가 됐어요. 오른팔을 아예 쓰지 못했고, 어디 부딪치거나 물건이 떨어져 맞은 것도 아닌데 가만히 서 있다가 발등의 인대가 터졌어요. 의사는 스트레스가 심하면 손등이나 발등의 인대가 터지는 경우가 있다고 해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아나운서부장 1년을 하고 6개월간 휴직을 했어요. 잠만 잤어요. 깨어 있는 시간에는 계속 울었고요. 심리적으로 너무 불안정했던 거예요.”
-휴직 기간 동안 <신영음>은 어떻게 운영됐나요.
“두 차례 모두 후배가 대신 맡아서 진행했어요. 그러다 약속한 6개월이 지나자 이제 그만 나오라는 연락이 왔어요. 다시 <신영음> 진행을 맡았어요. 이후 2년간은 제 마음이 처져 있으면서도 방송할 때는 일부러 밝은 척했어요. 그러다가 조금씩 마음이 진정되고 나아지니까 몸의 회복도 빨라지더라고요. 청취자들과 함께한 시간, <신영음>을 진행하는 시간이 결과적으로 치유에 도움이 됐어요.”
신 아나운서는 1969년 서울 태생이다. 시흥고(현 금천고)를 거쳐 1987년 숭실대 화학과에 입학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졸업하면 교사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 1학년 때 방송반에 들어가 기자로 활동하면서 방송에 큰 매력을 느꼈다. 언론사 입사를 위해 준비했지만 쉽지 않았다. 1991년 졸업 후 작은 출판사에서 9개월간 근무했고, 이후 극동방송 리포터로 활약했다. 중저음의 안정된 음색, 정확한 발성, 차분한 전달력으로 인정받았다. 1994년 CBS 아나운서 공채에 합격해 입사했다.
-기자가 아닌 아나운서 시험을 본 이유는 뭔가요.
“기자 일은 대학 때 해본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PD가 되고 싶었지만 제가 하고 싶은 일과 잘할 수 있는 일은 달라요. 저는 내향적 성격이거든요.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해 집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자리도 소파의 구석 자리예요(웃음). 제 목소리를 통해 청취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는 지금의 이 일이 저에게는 최적의 일이에요.”
2007년·2014년 두 차례 아파서 휴직
힘들어도 <신영음> 청취자와 함께 회복
훗날 몇 분이라도 ‘최고였다’ 기억해주길
-결혼은 언제 했습니까.
“2001년에 했어요. 남편은 CBS 3년 후배예요. 나이는 남편이 두 살 연하고요. 원래는 엔지니어여서 제가 뉴스 진행할 때 생방송 부스를 사이에 두고 같이 일하다가 이야기가 서로 잘 통해서 2년 연애 후 결혼했어요. 지금은 행정부서에서 근무해요.”
-자녀가 있나요? 일과 양육 병행은 어떻게 해결했나요.
“2003년생 딸이 있어요. 친정엄마가 같은 아파트단지에 사셨어요. 엄마가 많이 엄격하셔서 저희 부부 중 한 명은 반드시 오후 7시에 집에 정확히 도착해야 했어요. 10분이라도 늦으면 불호령이 떨어졌으니까요(웃음).”
그는 자신에게는 “굉장한 욕심이 있다”고 말했다.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언젠가는 제가 이 프로그램을 놓고 회사도 그만둘 때가 올 거잖아요. 한참 세월이 흐른 후 정말 몇 분만이라도 ‘그래도 영화음악은 신지혜가 최고였어’라고 생각해주시면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웃음).”
<박주연 선임기자 j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