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측우기 발명자는 장영실 아닌 문종···일본인도 ‘엄지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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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9일은 정부가 정한 ‘발명의 날’입니다. 왜 하필 이날일까요.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고안·실험한 날이 1441년(세종 23) 음력 4월 29일인데요. 이것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5월 19일’이라 이날을 ‘발명의 날’로 삼은 겁니다.

[이기환의 Hi-story](73)측우기 발명자는 장영실 아닌 문종···일본인도 ‘엄지 척’

이상하죠. 훈민정음, 거북선, 앙부일구, 자격루, 금속활자 등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최초·최고의 발명품이 많은데 왜 굳이 ‘측우기 고안·실험 일자’를 ‘발명의 날’로 삼았을까요. 이유가 있답니다. 1957년 ‘발명의 날’ 제정 때 이병도(1896~1989) 등 심의위원들이 “발명 날짜와 발명자(세자 이향·문종)가 분명히 기록된 측우기가 가장 적당하다”고 주장했다는 겁니다. 이상한 것은 지금도 포털사이트의 각종 지식백과에서 대부분이 ‘측우기 발명=장영실’로 검색됩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조선에 자랑할 것이 없는데…” 1917년 일본의 기상학자인 와다 유지(和田雄治·1859~1918)는 ‘조선 고대 관측기록 조사보고’(조선총독부)라는 논문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이 논문에 조선총독부 관측소장이었던 히라타 도쿠타로(平田德太郞)가 맹랑한 서문을 씁니다.

“조선이 자랑할 만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으나… 세종 때의 강우량 관측은… 유럽보다 200년 앞서고(1639년 이탈리아의 베네데토 카스텔리) 중국에서도 없었다…. 놀랍게도 조선인의 뇌리에서 솟아나온 독창적인 사업… 탁월함을 보여주기에 족하다.”

한국의 측우제도를 연구하고 국제적으로 알린 와다도 이 논문에서 ‘세종대왕=명군’으로 칭하며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460년 전에 측우제도를 구축해 지금까지 전국에 보급한 것은 일대 특필해야 하며… ‘명군’ 세종의 거룩한 뜻에 의한 것….”

대체 측우기가 뭐기에 조선문화를 깔본 일본인들까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을까요.

하나하나 따져보죠. 요즘도 일부 어른들은 ‘비가 내린다’고 하지 않고 ‘비가 오신다’는 존댓말을 쓰죠.

그 이유가 있습니다. 세종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먹는 것을 하늘처럼 우러러보는 사람들(民惟邦本 食爲民天)”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가뭄이 들면 어찌 되겠습니까. “제발 비 좀 내려달라”고 기우제를 지냈죠. 그때 비가 내려 보십시오.

“비가 오신다”고 했고, 그렇게 내리는 비를 ‘단비(甘雨)’라 했죠. 해마다 음력 5월 10일에 내리는 비를 ‘태종우’라 했는데요.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에 일화가 나와 있습니다. 태종(재위 1400~1418)이 승하하기 직전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는데요.

이때 죽음을 앞둔 태종이 “내가 하늘에 올라가(죽어) 천제에게 ‘즉시 단비를 내려달라’고 고하겠다”고 했습니다. 과연 다음날(1422년 5월 10일) 태종이 승하했고, 곧 하늘에서 단비가 내렸답니다.

이후 ‘해마다 5월 10일엔 단비가 내린다’는 ‘태종우’ 일화는 조선시대 내내 정설처럼 전해졌습니다.

이렇듯 ‘비에 왕조의 명운’을 거는 판국이었으니 체계적인 강우량 측정 또한 절실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어떻게 강우량을 측정했을까요. 비가 흠뻑 오면 눈대중으로도 파악할 수 있었죠. 하지만 가뭄 끝에 찔끔 와서 메마른 땅에 스며들었다면 어떨까요. 그때는 ‘물이 흙에 스며든 깊이(入土深)’로 측정했던 것 같아요.

<증보문헌비고>는 “‘쟁기가 들어갈 정도’(일리·一犁)와 ‘호미가 들어갈 정도’(일서·一鋤)라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측우기는 얼핏 단순한 도구로 보이지만, 그 원통 안에는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세종을 비롯한 조선 임금들의 노심초사가 담겨 있다. / 기상청·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측우기는 얼핏 단순한 도구로 보이지만, 그 원통 안에는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세종을 비롯한 조선 임금들의 노심초사가 담겨 있다. / 기상청·국립고궁박물관 제공

1441년 4월 29일 무슨 일이… 이렇게 주먹구구식이었습니다. 앞서 인용한 1441년(세종 23) 4월 29일자 <세종실록>에 심상치 않은 기록이 보입니다.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해 땅을 파서 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간 깊이를 재보았다. 그러나 적확하지 못해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어 궁중에 두어(鑄銅爲器 置於宮中) 그릇에 고인 정도를 실험했다(以驗雨水盛器分數)….”

가만, 여기서 한번 짚어봅시다. 세자는 다름 아닌 세종의 맏아들인 이향(문종·재위 1450~1452)을 가리키는데요.

그럼 어릴 적부터 눈과 귀가 닳도록 보고 들었던 ‘측우기=장영실 발명’ 이야기는 대체 뭔가요.

사실 <세종실록>뿐 아니라 어떤 사료에도 ‘측우기 발명자=장영실’이라는 이야기는 찾을 수 없습니다.

<연려실기술> ‘세종조 고사본말·찬술 및 제작’조는 “장영실이 1432년(세종 14)부터 간의대, 혼의혼상,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자격루 등의 제작을 주도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측우기는 쏙 빠져 있죠.

세자 이향(문종)의 창안으로 시험 제작·운용된 ‘구리제 우량계’는 4개월여 만인 1441년 8월 18일 정식으로 제작됩니다. 세종은 “쇠로 길이 2척, 지름 8촌의 우량계를 만들어 대(臺) 위에 올려놓고 강우량을 측정한다”는 호조의 구체안을 승인합니다.

‘측우기’라는 명칭은 1442년(세종 24) 5월 8일 <세종실록> 기사에 처음 등장합니다.

“쇠를 주조한 측우기를 제작… 서운관(기상청) 관원이 강우량을 측정 보고하고…. 각 지방에도 측우기를 보내….”

이 무렵 장영실은 곤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세종의 안여(임금이 타는 수레)가 부서지는 불상사의 책임을 지고 의금부로부터 국문을 받고 있었습니다. 결국 곤장형의 처벌을 받았는데요(1442년 5월 3일), 그런 장영실이 측우기를 발명할 여력이 있었을까요.

천문 기후 관측에 밝았던 세자 문종 그렇다면 세자 시절 문종(1414~1452)은 어떨까요.

“세자가 강우량을 재는 구리그릇을 만들어 시험 운영했다”는 기록은 <세종실록> 1441년 4월 29일자에 등장하죠.

세자가 ‘강우량 측정’을 고민했던 때가 ‘근년이래’, 즉 ‘요 몇 년 사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1441년보다 앞선 시기부터 측우기를 연구하고 실험한 이가 다름 아닌 세자(문종)였다는 겁니다.

1770년(영조 46) 측우기를 제작한 영조는 “측우기를 서운관과 각 지방에 비치해두고 강우량을 측정해서 보고하라”는 명을 내린다. / 한수당 연구원 블로그

1770년(영조 46) 측우기를 제작한 영조는 “측우기를 서운관과 각 지방에 비치해두고 강우량을 측정해서 보고하라”는 명을 내린다. / 한수당 연구원 블로그

<연려실기술>은 “문종이 천문을 잘 관측하고 기후(氣候)에 정교해 우레가 어느 때 치고 어느 방위에서 일어난다고 예언하면, 뒤에 반드시 맞았다”(‘문종조 고사본말’)고 했습니다.

정식 임금으로서 문종의 치세는 2년 3개월(1450년 2월~1452년 5월)에 불과합니다. 서른아홉 살 젊은 나이에 승하했죠.

본래 병약했던데다 아버지(세종·재위 1418~1450)와 어머니(소헌왕후·1395~1446)의 삼년상을 잇달아 치르는 바람에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됐습니다. 그러나 문종이 조선을 다스린 것은 사실상 10년에 달합니다. 1443년(세종 25) 4월 17일 세종이 대리청정을 명하는 교지를 내렸는데요. 1년 전인 1442년부터 이 ‘똘똘한 세자’가 조선의 국정을 실질적으로 이끌기 시작했습니다.

문종의 업적을 논해볼까요. 6품 이상까지 윤대(輪對·문무 관원이 교대로 임금의 질문에 응대)를 허락함으로써 언로를 열었다는 평을 받고 있어요. 이민족과의 전쟁사인 <동국병감>을 펴냈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또 태종 때 만들었던 화차를 새롭게 개발해 유사시에 대비했습니다. 만만치 않은 업적이 아닙니까.

측우기뿐 아니라 청계천과 한강의 수위를 재는 수표도 설치해두었다. 요즘의 풍항계인 풍기대도 임금의 집무실 지근거리에 배치해두었다. / 한수당 연구원 블로그

측우기뿐 아니라 청계천과 한강의 수위를 재는 수표도 설치해두었다. 요즘의 풍항계인 풍기대도 임금의 집무실 지근거리에 배치해두었다. / 한수당 연구원 블로그

영조가 깜짝 놀라 주저앉은 이유는? 그런 문종이 창안한 측우기는 서울과 지방 각지의 체계적인 강우량 측정에 활용됐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쓰이지 않다가 1770년(영조 46)이 돼서야 재등장합니다.

<증보문헌비고>는 “1770년 5월 영조가 <세종실록>에 측우기 관련 기사가 있다는 소식을 알고 본인도 모르게 엎어지듯 앉으시며…(기뻐했다)”고 소개했습니다. 영조는 창덕궁과 경희궁은 물론 8도와 양도 등 각 지방에 측우기를 설치·운용했습니다.

정조(재위 1776~1800) 역시 측우제도 발전에 공을 들입니다. 이후의 임금들은 영·정조 때 보급한 측우기로 강우량을 측정했습니다.

국왕의 업무일지인 <승정원일기>(영조~순종)에서 ‘측우기’ 단어가 무려 8129건이나 검색되더군요. ‘비가 내렸다. 몇 시에서 몇 시 사이에 내린 비로 측우기의 수심은 몇 푼이었다’는 측정기록을 계속 쌓아둔 겁니다.

궁금증이 생기죠. 강우량 측정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정조실록> 1799년(정조 23) 5월 22일자를 볼까요.

“1791년 이후 비의 많고 적음을 반드시 기록했다. 1년치의 통계를 보았더니…. 지난해 이달에는 측우기 물 깊이가 거의 1자 남짓인데… 이번 달은 겨우 2치… 백성의 실정이 딱하기만….”

장기 강우량의 측정으로 농사일을 살피고 미래에 대비한다는 의미죠. 실례로 정조는 “측우기 측정 등으로 비가 오고 안 오고를 잘 파악해 만약 가뭄이 심해지면 벼 대신 다른 작물을 심으라”(<정조실록> 1798년 6월 7일)고 당부했습니다.

측우기뿐이 아니죠. 세종 시대부터 청계천변과 한강변에 설치해놓은 것이 수표입니다(<세종실록> 1441년 8월 18일조). 하천의 수위를 측정해 홍수에 대비하고자 한 겁니다. 요즘의 풍향계라 할 수 있는 ‘풍기대’도 궁궐에 설치했습니다.

측우기의 채취오차는 0.51%로 국제기상기구(WMO)의 허용측정오차(1%)를 안정적으로 충족시켰다. 또 물의 깊이를 쉽게 측정하기 위해 3단 조립식으로 제작했다. / 이하상의 <기후에 대한 조선의 도전, 측우기> 소와당, 2012

측우기의 채취오차는 0.51%로 국제기상기구(WMO)의 허용측정오차(1%)를 안정적으로 충족시켰다. 또 물의 깊이를 쉽게 측정하기 위해 3단 조립식으로 제작했다. / 이하상의 <기후에 대한 조선의 도전, 측우기> 소와당, 2012

현대 측우기와 비교해도 손색없다 현재 남아 있는 측우기는 딱 1대입니다. 충청 감영(금영)에 있었던 ‘금영 측우기(1837년·헌종 3)’인데요.

기상학자 와다가 일본으로 가져가 일본 기상청에 보관돼 있었는데, 끈질긴 교섭 끝에 환수(1971년 4월)한 겁니다.

그동안 ‘진품’임을 주장하는 몇몇 측우기가 등장했지만 모두 가짜로 판명됐습니다. 1987년에는 시중에서 제작한 3만원짜리 우산꽂이가 ‘세계 최고의 측우기’로 둔갑한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습니다.

측우기를 설치했던 측우대는 5기 정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종 때 발명됐다는 측우기를 보면서 궁금한 점이 생겼습니다. 얼핏 보기에 간단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측우기가 어떤 과학성을 갖고 있다는 걸까요.

현전하는 금영 측우기의 지름은 140㎜ 정도인데요. 이것은 현재 세계 13개국의 우량계(127㎜)와 8개국 우량계(159㎜)의 중간 정도 됩니다. 580년 전에 제작한 측우기인데도 현대 측우기의 규격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측우기가 없었을 때는 ‘쟁기날이 들어갈 정도’와 ‘호미날이 들어갈 정도’ 등으로 강우량을 측정했다. / 국립민속박물관·국회도서관 소장

측우기가 없었을 때는 ‘쟁기날이 들어갈 정도’와 ‘호미날이 들어갈 정도’ 등으로 강우량을 측정했다. / 국립민속박물관·국회도서관 소장

3단 조립식 측우기의 비밀 측우기 모습이 간단하지만, 허투루 보면 안 됩니다. 빗물을 받는 면적이 너무 넓거나 좁으면 측정오차가 커집니다.

면적이 너무 넓으면 비가 적게 내릴 때 측정하기가 어렵고요. 반면 너무 좁으면 바람이 불 때 빗물을 받기 힘들게 되죠.

비의 평균 반지름이 1㎜이고, 단위 시간당 강우량 10㎜ 정도라는데요. 이 경우 지름이 140㎜인 금영 측우기의 채취 오차는 0.51%에 불과하답니다. 현재 세계기상기구(WMO)의 강우 채취 표본 오차범위는 1% 이내라는데요.

그렇다면 금영 측우기는 현대 우량계의 국제규격에도 합치되는 크기라 할 수 있죠.

또 금영 측우기(깊이 316㎜)는 세 부분으로 나눠 조립할 수 있게 만들었는데요. 여기에도 과학적인 고려가 담겨 있습니다.

원통이 너무 깊으면 밑바닥에 고인 물을 측정하기 힘들잖아요. 그럴 때는 윗부분의 한 토막이나 두 토막 용기를 떼어내고 빗물의 깊이를 잴 수 있잖습니까. 3단 조립으로 제작한 이유지요.

측우기에는 이렇게 강우량의 정밀 측정을 위한 역대 임금들의 노심초사가 담겨 있습니다.

일본 기상학자 와다는 1770(영조 46)~1907년(고종 광무 11)의 강우량을 월별로 정리하고, 1671(현종 12)~1907년의 237년간 강수·강설일수를 정리했는데요. 바로 이겁니다.

즉 조선은 측우기라는 우량계를 발명해 국가 주도로 연중 전국 단위로 정밀 측정했다, 그리고 그 측정값을 농사에 활용했다, 무엇보다 그 통계의 일부가 남아 있다, 뭐 이런 얘기죠. 기상과학 기술을 농사현장에 활용해 농업생산을 구현한 조선의 국가적 역량이 측우기를 통해 재현된 겁니다.

조선 후기 시인인 박윤묵(1771~1849)은 “어진 임금님의 하늘을 공경하는 뜻을 알고 싶다면 돌에 새긴 측우대의 명문을 살펴보시라”(<존재집>)고 했습니다. 그 명문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임금은 가뭄 때 백성과 더불어 근심하고, 비가 내릴 때 백성과 함께 기뻐한다. 측우기에 임금과 백성의 기쁨과 걱정이 매이었으니, 만세토록 알맞은 비가 내려주기를….”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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