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허보리 | 언제 가도 한가롭게 나를 충전하는 두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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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추오정 수서점’·제주 ‘제주개 생활연구소’

맛집 정보가 넘쳐나는데 믿고 갈 만한 식당은 찾기 어렵습니다. 낯선 지역이나 여행길에선 더 그렇지요. 그 지역에 아는 사람이 있다면 물어서라도 갈 텐데요. 열심히 검색을 해보지만 좀처럼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말 신뢰할 만한 맛집을 건져보기로 했습니다. 주간경향이 각계각층의 명사를 찾아 이름을 걸고 추천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누구나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는 ‘인생 맛집’ 공개, 지금 시작합니다.

카페 ‘제주개 생활연구소’에서 그의 반려견들과 한 컷 / 허보리 화가 제공

카페 ‘제주개 생활연구소’에서 그의 반려견들과 한 컷 / 허보리 화가 제공

원고 제안을 받고 두 가지 공간을 생각했다. 하나는 서울 작업실 근처에 있는 추어탕집이고, 다른 하나는 제주 작업실 근처에 있는 작은 카페다. 미술작가의 삶이란 생각보다 사람을 만나기 힘든 직업이다. 식구들과 먹는 일을 제외하면 많은 끼니를 ‘혼밥’으로 해결한다. 혼밥의 기원은 신혼 시절 친구도 없는 홍콩에 살기 시작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신으로 입덧이 심했을 때 먹은 IFC몰 어느 일식집의 뜨거운 우동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혼자 먹는 게 너무 부끄러워 굉장한 자신감으로 무장한 채 아침부터 그곳을 찾았다. 손님을 맞이하는 직원분에게 한명이라는 표시의 손가락을 올려 보이는 순간, 너무 쑥스러웠다. 그러나 곧 맞이한 뜨겁고 깨끗한 국물의 우동은 느끼한 입덧을 한방에 싹 가라앉혔다. 보약 같은 우동이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게 사실상 나의 첫 혼밥이었다. 그 뒤로는 혼밥전문가가 되어 지금 언급하고 있는 추어탕집에서 참 많이도 혼자 밥을 먹었다. 서울 작업실은 수서역 근처에 있다. 서울이 맞나 싶을 정도의 시골스러움을 자랑하는 곳이다. 작업실에서 나와 논과 밭을 제치고 오솔길을 따라가면 서너개의 음식점이 모여 있는 곳이 나온다. 그곳에 추어탕집이 있다. ‘추오정 남원추어탕 수서점’(서울 강남구 밤고개로14길 13)이다. 알고 보니 맛이 좋아 그 지역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나중에 친구가 말해줬다. 끼니가 불규칙한 내가 뜬금없이 배고파 가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브레이크 타임이 없기 때문이다. 음식도 빨리 나온다. 맛도 좋다. 그렇다고 기다리는 일도 별로 없다. 무엇보다 밥 한 공기 말아먹고 나오면 그 든든함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원래 초밥 1인분보다 이런 국밥류가 더 밀도 있는 포만감을 선사하게 마련이지만, 체력소모가 많은 그림 그리기를 업으로 삼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 밥을 먹는다는 건 전기자동차가 충전하는 상황이나 마찬가지다. 빨갛게 깜빡이던 휴대전화가 완충돼 건전지를 표시하는 곳에 검은 부분이 차오르듯, 나에게 밥 한 공기는 건전지 이상의 의미가 있다. 밥과 우거지에 국물까지 먹고 나오면 ‘이 배부름이 다할 때까지 그림을 또 그려보리라’는 생각으로 의욕도 충만해진다. 하루종일 캔버스와 씨름하는 뭔가 안쓰러운 내 몸뚱어리에 선물하고 싶은 마음일 때도 보신을 의미하는 미꾸라지는 늘 위로의 아이템이었다. 이 집과 연관되는 진짜 즐거운 순간은 작업실에서 나와 밥을 먹으러 걸어가는 길에 있다. 차가 다니는 길이 아닌 오솔길(이게 지름길이다) 말이다. 그 길이 너무 아름다워 그림으로도 그렸다. 더러운 작업복과 신발을 신고도 마음이 편안한, 짹짹거리는 새소리와 함께 허기진 발걸음을 이어가는 아기자기한 오솔길이다. 시끄러운 도심 속 그곳만 푸르렀다. 동동 떠 있는 비눗방울에 들어간 작은 엄지공주처럼 풀 속에서 보호받는 느낌은 배고픔이 곧 해소되리라는 기대감과 함께 따뜻한 위로의 시간이 돼준다.

두 번째 힐링 맛집은 제주시 한경면에 있는 ‘제주개 생활연구소’(제주시 한경면 녹차분재로 502)라는 카페다. 2년 전 제주 생활을 시작했다. 그 무렵부터 뚝딱뚝딱 공사를 시작했던 듯하다. 노포도 아니고 너무나 유명해 누구나 찾는 집도 아니었지만, 작업실로 가는 길에 있어 간판을 다는 첫날부터 궁금증이 일었다. 제주공항에서 종종 맞이하게 되는 눈 따가운 주황색 모자를 쓴 관광객처럼 그 집 간판이 딱 그 주황색이어서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제주개 생활연구소’라는 유머러스한 제목도 입가에 미소를 번지게 했다. 무엇보다 개를 두 마리나 데리고 육지와 섬을 왔다 갔다 하는 형편이어서 그곳은 더욱 초미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제주에서 나의 삶은 사실 집과 작업실만 오가는 단조로움의 연속이었다. 식사는 주로 집에서 싸온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밥집보다는 카페를 더 많이 다녔다. 제주에는 정말 너무 멋진 카페가 많다. 넘쳐나는 제주의 카페 중에 내가 특별히 이곳을 고른 이유는 정확히 나의 동선 안에 있기 때문이다. 커피와 디저트가 단연 훌륭하기도 하다. 무엇보다 나만의 개인적 서사가 담겨 있는 곳이다. 그림을 하나씩 완성했을 때, 그간 고생한 나 자신과 개들을 위해 선물하듯 그곳에 간다. 동틀 무렵 들어가 깜깜한 밤이 되도록 작업실에 있느라 햇빛을 제대로 못 보는 나 같은 사람에게 광합성을 하고 ‘개멍’(개가 아무 생각 없이 신나게 노는 걸 보며 머릿속을 비우는 일)하며 편안한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그림을 그릴 동안 한숨만 푹푹 쉬며 지루하게 날 기다려준 개는 그곳에 가면 사시사철 푸르른 귤밭 앞 작은 마당에서 목줄을 풀고 혀가 빠지도록 전력 질주한다. 나 또한 한 꼭지의 일을 마무리했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파란 하늘 진록빛의 반짝이는 귤나무를 보며 진한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홀짝인다. 머리가 그렇게 맑아질 수가 없다. 주인장이 센스 만점이다. 귤이 한창일 때면 평상 하나를 하얗고 톡톡한 천으로 깨끗이 마감을 해놓고 작은 교자상과 함께 귤밭 앞에 갖다 놓는다. 귤이 흐드러지게 핀(정말 꽃처럼 피는 시절) 귤나무에 초록 부분보다 주황색 부분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할 때쯤 반려견과 그 평상에 앉아 나는 커피 한 모금을, 개는 ‘멍푸치노’ 한 모금을 먹는다. 쏟아지는 햇볕에 등이 따뜻하고 바람은 알싸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 소곤대는 바람 소리에 개가 꾸벅꾸벅 존다. 나는 얼굴에 피어나는 기미마저 포기한 채 햇빛을 전면으로 만끽한다. 거의 시조 한 편이 튀어나올 지경이다. 귤밭을 보며 평상에 앉아 있는 그 시간이 좋아 제주에 들어오면 신고하듯이 항상 그곳에 들른다. 육지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도, 그러니까 집과 작업실을 살짝 정돈해 놓고 비행기를 타기 전에 ‘나 잠깐 서울 다녀올게’ 하는 마음으로 커피를 마시러 간다. 나의 배터리를 다시 충전한다. 이렇게 공간과 나의 유기적 관계가 이곳을 최고의 맛집으로 만드는 것 같다.

자신의 작품을 배경으로 강아지를 안고 서 있는 허보리 화가 / 허보리 화가 제공

자신의 작품을 배경으로 강아지를 안고 서 있는 허보리 화가 / 허보리 화가 제공

내게 맛집이란 좋은 재료를 사용하고 멋진 플레이트를 하는 등의 실질적인 요소보다는 내가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음식이 있는 공간이다. 누구나 다 가는 그런 유명한 음식점도 좋지만, 나만의 숨겨진 곳을 만들어가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잘 생긴 남자가 누구에게나 매력적일 수 없듯이, 평범한 내 남자친구에게 나만 아는 비밀스러운 매력이 존재하듯이 나만의 맛집은 길들이고 알아가며 추억을 쌓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곳에 갈 때마다 언제나 같은 강도의 행복으로 마무리됐던 좋은 기억 때문에 오늘의 만족을 또 기대할 수 있다면 거기가 바로 나만의 맛집이다. 가기 전부터 웨이팅 전략을 세우느라 힘을 다 빼버리는 식사를 할 것인지 아니면 언제 방문해도 늘 기다려주는 엄마처럼 편안하게 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는 곳에서 식사할 것인지 선택하라면 나는 후자에 손을 얹겠다. 이 맛집을 당당히 추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나의 절친을 너도 한번 친구라고 불러보라고 억지를 쓰는 듯한 느낌도 없지 않지만, 이런 식당과 카페가 내겐 작은 기쁨이 됐다 정도의 소박한 이야기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필자는 <식객> 허영만 화백의 딸이다. 서양화가로 살아가고 있다. 제주와 서울을 오가며 그림을 그린다. ‘웨이팅(waiting)’이라는 고난 뒤 맛보는 음식의 맛에 가치를 두기보다 그 식당의 위치와 분위기, 나에게 갖는 의미에 더 무게를 두는 편이다. 한두개의 밥집이나 카페를 정하면 다른 곳은 마음 깊숙이 접수되기 전까지는 잘 가지 않는다.

<허보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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