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코코아, 아동노동 그리고 ‘공급망 실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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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적인 ESG 담론계라는 것이 있다 치고, 2007년 그 세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완벽하게 순수한 동기가 있지는 않았겠지만, 특정 조직에 소속돼 있던 시기였다. 지금보다는 덜 순수하게 이 문제에 접근했다고 할 수 있다.

서아프리카 말리의 아동 노동자 출신 8명이 네슬레 등 글로벌 초콜릿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사진은 카카오 농장에서 일하는 서아프리카의 아동 노동자들./ 국제권리변호사들(IRA)

서아프리카 말리의 아동 노동자 출신 8명이 네슬레 등 글로벌 초콜릿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사진은 카카오 농장에서 일하는 서아프리카의 아동 노동자들./ 국제권리변호사들(IRA)

ESG 강의나 강연을 하면서 개론 성격일 때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의 최고경영자(CEO) 래리 핑크와 그의 2020년 초 연례서한을 빼놓지 않는다. 현상으로는 그 이후에 ESG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자산운용사가 ESG 투자를 하겠다고 나설 때 당연히 순수한 동기라는 건 있을 수 없다. ESG가 투자대상으로 돈이 된다거나, 아니면 투자에서 ESG를 고려하지 않으면 돈을 잃을 위험이 있다거나 하는 정도가 대충 논리상 예상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를 우리는 자본주의가 태동한 이래 처음 목격하고 있다. 기후위기를 후경으로 한 이 변화는 체감하는 정도보다 훨씬 심대하고 근본적이다.

카카오 산업의 악명 높은 아동노동

‘밸런타인데이’나 ‘빼빼로데이’가 되면 연상퀴즈처럼 세계 카카오 산업의 아동노동 문제가 제기된다. 서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를 중심으로 한 아동노동은 악명이 높아 국제사회가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지 오래다. 2001년 9월 19일에 카카오 산업의 아동노동을 철폐하기 위한 하킨-엥겔 협약이 체결된 게 가장 극적인 장면이겠다. 미국 민주당의 엘리엇 엥겔 하원의원과 톰 하킨 상원의원이 주도해 조약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앞서 1999년 국제노동기구(ILO)는 인신매매, 부채를 통한 속박 및 노예와 유사한 상태를 활용하는 것과 아동에게 건강·안전 또는 도덕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작업을 시키는 것 등을 최악의 아동노동이라 정의했다. 아동노동을 금지하는 협약을 세계 각국에서 비준했다. ILO 기준을 따르는 하킨-엥겔 협약에는 총 8개 대기업, 2명의 미국 상원의원, 1명의 미국 하원의원, 코트디부아르 대사, 소수의 NGO 및 산업 연합 대표가 서명했다.

2002년에는 협약에 따라 비영리단체인 국제코코아재단이 출범했다. 재단은 시민사회, 카카오 산업, 국제기구, 농업협동조합, 정부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아동노동과 강제노동을 방지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단체들로 꾸렸다.

20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결론적으로 협약은 공염불이 됐다. 핑크의 선언이 나온 2020년에 네슬레와 허쉬 등 초콜릿을 판매하는 글로벌 기업들이 아프리카 카카오농장에서 벌어진 아동노동 착취를 묵인한 혐의로 미국 워싱턴 연방법원에 집단소송을 당한 게 상징적 풍경이다.

집단소송에 참여한 8명의 원고는 모두 아동 노동자 출신으로 서아프리카의 말리 국적이다. 이들은 16세 미만의 어린 나이에 인신매매를 당해 코트디부아르의 카카오농장으로 끌려가 노예 노동에 시달렸다고 주장했다. 농장에서 일하는 동안 보호장구가 없어 살충제와 제초제에 노출된 채로 위험한 노동을 했다. 그 기간에 임금은 물론 충분한 식사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국제권리변호사회(IRA)가 소송을 대리한 이 8명만이 아동노동의 피해자가 아님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글로벌 기업에 값싸게 카카오를 공급하기 위해 2013~2017년 가나의 카카오농장에서 1만4000여명의 어린이를 강제노동에 투입한 게 확인됐다. 전 세계 카카오의 약 70%를 재배하는 서아프리카에서 최대 수출국은 코트디부아르이기에 실제 아동노동은 심각한 규모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통계를 잡는 게 현지 여건상 쉽지 않다.

국제 시민단체 워크프리(2022)는 카카오 강제노동에 종사하는 아동 중 90%에 해당하는 약 63만명이 위험한 작업을 수행 중이라고 추정했다. 이들은 하루에 최대 14시간까지 일하며 전기톱을 사용해 숲을 청소하거나, 카카오나무 위에 올라가 칼로 콩알을 깎는 등 위험한 노동을 한다. 국제노동기구의 2021년 6월 보고서에 따르면 아동 노동자는 2016~2020년 사이 840만명 증가한 1억6000만명으로 집계됐다. 그중 절반이 5~11세이며 큰 폭의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EU의 ‘공급망 실사법’에 수출기업들 긴장

아동노동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서아프리카의 영세한 다수의 카카오농장에 아동노동이 비용 측면에서 확실히 유리한 반면 모니터링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고, 아동노동 사용에 따른 특별한 불이익은 없기 때문이다. 네슬레와 허쉬 등 다국적 초콜릿 기업은 간접적인 아동노동이기에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회사 입장에서는 이익이기에 내용상 묵인한다.

자산운용업계와 초콜릿 업계의 상반된 모습은, 겉보기와 달리 본질은 같다. 도덕 동기보다는 자본 동기가 훨씬 더 강력하게 작동하게 마련인 세계화한 시장에 적응한 기업의 모습이다. 시장은 연륜이 쌓인다고 성숙하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시장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는 영역에 대해서는 북돋아 주되, 시장실패나 타락 혹은 부패가 예상될 때는 시장구조를 변경해야 한다.

지난 2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발표한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초안)’이 시장구조의 변경에 해당한다. 이 지침은 지침 명칭에 공급망이란 말이 들어 있지 않은데도 흔히 ‘공급망 실사법’으로 불린다.

인권, 환경 등 기업의 지속가능성 요소를 실사하는 지침이지만 EU의 기업이거나 EU에 물건을 파는 기업에 대해 그 기업뿐 아니라 연결된 납품·협력업체가 인권과 환경 등을 침해했는지를 조사해 문제가 발견되면 시정토록 하고, 그 내용을 공시하게 하는 전 공급망에 걸친 제도이기 때문이다. 2020년 4월 법안 도입 계획 발표 후 기업 등의 반발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번에 지침이 마련됐다. EU 의회와 이사회를 통과하면 2024년 발효된다.

비슷한 지침이 없었던 건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18년 발표한 ‘기업 책임경영을 위한 OECD 실사 지침’과 ILO의 ‘다국적 기업과 사회정책에 관한 삼자선언’, 유엔의 기업과 인권 이행 지침(UNGPs) 등이다. 하지만 기존 국제 원칙과 실사 지침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권고사항으로, 대체로 기업의 자발적 참여에 의존한다.

EU의 이번 지침은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려는 조치로, 기업이 자신뿐 아니라 공급망 전반에서 발생하는 인권 침해 또는 환경 훼손 사례를 조사하고 문제에 대해서 시정·공시하도록 의무화하는 전향적 내용을 담았다. 모든 기업이 적용 대상은 아니다. 일정한 기준을 뒀다. 국내 기업은 자동차 부품, 반도체, 제약·바이오 등의 산업이 영향권에 들어가고 110여개 수출기업이 실사의 대상기업이 될 것으로 무역보험공사가 분석했다.

EU의 이 지침이 실행력을 갖추게 된 결정적 요인은 EU 회원국이 자율적으로 결정하긴 하지만, 실사 의무를 위반한 기업에 금전적이고 행정적인 제재를 할 수 있게 한 것이 꼽힌다. 나아가 약간의 쟁점이 있긴 하지만 민사상 책임제도까지 도입했다.

한국의 EU 수출 기업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산업통상자원부를 중심으로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기는 하지만, 업계는 아직 갈피를 못 잡는 눈치다. 자사뿐 아니라 공급망의 ESG 문제를 책임지라는 게 과거 기준으론 상상도 할 수 없는 조치이니 말이다.

사실 ‘ESG 라운드’의 도래는 이미 예견된 내용이었다. 그렇게 보면 자산운용업계라는 데가 얼마나 기민하게 현실에 잘 적응하는 곳인지 새삼 놀라게 된다. 어두운 그늘을 길게 드리운 네슬레는 어쩔 것인가. 한국 기업들은 잘 적응할 것인가. 잘만 대응하면 공급망이 ‘어두운’ 기업들이 정리돼 한국 기업에 기회가 되리라는 낙관론이 있다. 글쎄, 한국 기업의 공급망이 모두 ‘밝다’ 혹은 ‘밝아질 것’이라고 기대하자니 조금 주저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좋기는 하겠다.

<안치용 ESG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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