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발가벗고 쟁기질 ‘청동기 노출남’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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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금석병용기(金石倂用期)만 거쳤다.’ 일제강점 즈음인 1907년부터 존재가 확인된 경남 김해 회현동 패총 유적을 조사하던 일본학자들이 눈을 번뜩였는데요. 이곳에서 석기와 철기가 동시에 나오자 ‘얼씨구나!’ 했던 건데요.

농경문 청동기에 새겨진 3명의 인물. 모두 농사와 관련된 작업을 하고 있다. 농경문 청동기는 좌우 12.8㎝, 높이 7.8㎝에 두께는 불과 1.5㎜ 정도 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청동유물이다. 1970년 말 골동품상이 “대전에서 출토된 유물”이라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찾아와 구입을 요청했다. 박물관 측은 비교적 싼 가격으로 이 유물을 사들였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농경문 청동기에 새겨진 3명의 인물. 모두 농사와 관련된 작업을 하고 있다. 농경문 청동기는 좌우 12.8㎝, 높이 7.8㎝에 두께는 불과 1.5㎜ 정도 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청동유물이다. 1970년 말 골동품상이 “대전에서 출토된 유물”이라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찾아와 구입을 요청했다. 박물관 측은 비교적 싼 가격으로 이 유물을 사들였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들은 ‘맞아, 한반도에는 독자적인 청동기시대가 없었어. 석기만 쓰고 있던 미개사회였는데, 중국(한나라)에서 철기로 무장한 선진문화가 밀려 들어와 석기-철기가 공존한 것일 뿐이야!’, 뭐 이렇게 단정한 겁니다.

일본학계는 한반도의 선사시대가 파행적이고 정체돼 있었음을 강조하는 식민사관의 하나로 이 ‘금석병용기’를 주장했는데요.

터무니없는 금석병용기설 1960년대 말부터 상서로운 조짐이 보입니다. 1967년 대전 괴정동에서 한 주민이 밭을 갈다가 심상치 않은 청동기 유물을 수습하는데요. 긴급조사 결과 돌널무덤에서 ‘칼손잡이 모양’ 및 ‘방패 모양’ 청동기와 ‘청동종방울’, ‘거친무늬청동거울’ 등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특히 이곳에서 한국식 동검이 출토됐는데요.

지금의 중국 동북방에서 유행한 ‘비파형동검’보다는 검의 폭이 좁아 ‘세형(細形)동검’으로 알려져 있죠. 청천강 이남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에 ‘한국식 동검’이라 합니다. “한반도에 청동기시대가 없다”던 일본 학계의 궤변이 무색해졌죠.

이렇게 한번 쏟아져나온 청동기 유물이 1960~1970년대 갑자기 붐을 이룹니다.

김양선 숭실대 교수(1907~1970)가 고운무늬거울(정문경 혹은 다뉴세문경·국보) 등을 숭실대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이 청동기 세트는 1960년대 충남 논산훈련소에서 참호를 파던 병사들이 발견한 건데, 중간상인을 거쳐 일부(청동거울)는 김양선 교수에게, 또 일부(청동방울 등)는 호암미술관(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으로 넘어갔습니다.

1971년에는 전남 화순 대곡리에서 한국식 동검 3자루와 고운무늬거울, 팔주령, 쌍두령 등 국보 청동기가 우르르 쏟아졌습니다. 1976년엔 충남 아산 남성리에서도 한국식 동검 9자루와 방패형·칼손잡이형 등 청동기 세트가 노출됐습니다.

녹슨 청동기에 새겨진 새 두마리 그즈음인 1970년 말, 국립중앙박물관에 한 골동품상이 찾아와 “대전 출토품”이라면서 녹슨 청동제품 1점을 내밉니다.

길이 12.8㎝, 폭 7.8㎝에, 두께는 1.5㎜에 불과한 손바닥만 한 청동기였습니다. 이 녹슨 유물이 바로 한국의 후기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농경문 청동기’입니다. 당시 한병삼 박물관 학예연구관(1935~2001)은 다소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외양은 괴정동에서 출토된 방패형 청동기와 유사했다. 그러나 밑부분이 부러져 나간 상태였고, 그나마 남아 있는 윗부분마저 둘로 절단돼 있었다. 녹까지 슬어 전체 문양은 보이지도 않았다.”

청동기에 잔뜩 묻은 녹을 제거하자 반전의 모양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Y자형의 나뭇가지 끝에 새 두마리(2쌍)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한병삼 연구관은 대번에 ‘솟대’를 떠올렸습니다.

솟대는 높은 장대 위에 가로목을 걸치고 그 위에 새 형상을 올려놓은 ‘신간(神竿)’입니다. 신간은 ‘하늘에서 신령이 하강하는 통로로 인식되는 나무’를 뜻합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한’조를 볼까요.

농경문 청동기 앞면(위)과 뒷면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농경문 청동기 앞면(위)과 뒷면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한의 사람들은 귀신을 믿었다. 백성이 뽑은 천군(天君)이 하늘 제사를 주관했다. 이들 나라에 소도(蘇塗)라는 별읍이 있었다. 이곳에서 ‘큰 나무를 세운 뒤(立大木)’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겼다….”

예부터 나무와 새는 천계와 현세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인식됐죠. 지금도 히말라야산맥 주변인 네팔이나 티베트 등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조장(鳥葬)을 한다죠. 시신을 뜯어먹은 새가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계로 운반하는 장례식이죠. 새는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고, 인간의 희망을 하늘에 알려주는 영물로 인식됐으니까요.

그렇다면 청동기 속 새와 나무는 제사 때마다 등장한 솟대의 원조일 수도 있잖습니까. 혹은 인간에게 풍요를 안겨주는 곡령신(穀靈神)을 나르는 매개자일 수도 있죠. 한병삼 연구관은 그래서 “하늘신의 가호 아래 풍년과 다복·다산의 꿈을 펼치려던 당대 청동기인들의 소박한 꿈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일 수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청동기에 새겨진 3명의 인물 여기까지는 그나마 해석이 쉬웠습니다. 다른 면에는 모두 3명의 인물이 보였습니다. 왼쪽에는 아가리가 좁은 토기 항아리에 추수한 곡물을 담고 있는 인물(여성 추정)이 있었습니다. 오른쪽 아래에는 상반신만 남은 인물이 괭이를 치켜들고 있었습니다. 문제적 인물은 오른쪽 위에 새겨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두 손으로 삽자루를 잡고 한쪽 발은 삽을 밟고 있었습니다. 삽날이 길고 끝이 둘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한 연구관은 ‘따비(논이나 발을 갈 때 쓰는 작은 쟁기)’를 떠올렸습니다. 또 그 사람의 뒷머리에는 아주 긴 무언가가 달려 있었습니다. 다리 사이에는 삼각형 형태의 돌출부가 보였습니다. 수상해 잘 살펴보았더니 아! 그것은 남성 성기였습니다.

요즘이면 ‘변태 아냐? 왜 실오라기 한올 걸치지 않은 발가벗은 몸으로 따비질(쟁기질)을 하는 거지’, 할 것입니다.

당시에는 왜 이 남성이 천연덕스럽게 성기를 노출한 채 밭을 갈고 있는지 깊게 검토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중간 정리를 해볼까요. 오른쪽 두 남자는 봄날 밭을 가는 ‘춘경(春耕)’을, 왼쪽 여자는 수확한 곡식을 저장하는 ‘추수’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농경사회의 ‘춘경(春耕) 추수(秋收)’ 장면을 묘사했다는 거죠.

이걸 다른 면에 나타난 ‘솟대’와 연결시켜 볼까요. <삼국지> ‘위서·동이전·한’조를 더 보죠.

“해마다 5월 파종을 마친 뒤와 10월 농사일을 끝낸 뒤 귀신에 제사를 지낸다. 함께 모여 밤새도록 노래 부르고, 춤추며, 술을 마신다. 춤은 수십명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고 땅을 밟고 몸을 굽혔다가 치켜들었다가 한다. 손과 발의 동작이 서로 조응한다.”

이 청동기 앞뒷면에 새겨진 것을 종합해 설명해볼까요. 청동기에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추수하는 농경생활을 상징하고, 파종 후와 수확 후에 하늘신과 조상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의식까지 새겨넣은 것이 아닐까요.

농경문 청동기는 바로 이런 제사를 지낼 때 큰 나무를 세우고 이 나무에 내걸었던 의기였을 가능성이 짙다는 겁니다. 혹은 작은 크기로 보아 제정일치의 지도자가 가슴팍에 걸었을 수도 있죠. 이후 30년 넘게 농경문 청동기는 “기원전 4세기 생산의 풍요를 비는 주술적인 의미가 있는 의기(儀器)로 판단된다”고만 해석했습니다.

울주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나체 남성상. 고래잡이의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장이라는 해석이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울주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나체 남성상. 고래잡이의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장이라는 해석이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벌거벗고 따비질하는 남성은 누구? 국립중앙박물관이 한가지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있었죠. 바로 ‘벌거벗고 밭을 가는 남성의 정체’였습니다.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용 청동기에 왜 굳이 나체 남성을 새겨넣었다는 겁니까.

2005년 청동기 전공자인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민속자료를 검토하다가 결정적인 실마리를 찾아냈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인·학자인 유희춘(1513~1577)의 문집(<미암집>)이었는데요.

유희춘은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윤원형 일파가 정적을 모함하려고 양재역에 대자보를 내건 사건)에 연루돼 제주도를 거쳐 함경도 종성에서 장장 19년간 유배생활을 했는데요. 유희춘은 이곳에서 독서와 저술 활동을 펼쳤답니다.

그런 유희춘이 개탄한 현지 풍습이 있었는데요. 바로 나체로 밭을 가는 ‘해괴한 세시풍습’, 즉 나경(裸耕)이었습니다.

“새해에 옷을 벗고 밭갈이하는 짓이 가장 해괴한 풍습이다. 해마다 입춘이면 도할사(함경도·평안도의 종 6품 관리)들이 관청의 문 길가에서 사람을 시켜 나무로 만든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며 농사짓는 형상을 짓게 한다. 이것은 한해의 농사를 점치고 풍작을 기원하는 행사이다.”

유희춘의 개탄, “벌거벗고 뭐하는…” 유희춘이 혀를 끌끌 차는 부분이 바로 ‘이 행사가 나체 퍼포먼스였다’는 것입니다.

“밭 갈고 씨 뿌린 사람은 반드시 나체여야 한다. 부들부들 추위를 무릅쓰게 하니 이 무슨 해괴한 작태인가.”

유희춘은 ‘옛 노인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추위를 견디는 씩씩함을 보여주고 그해 따뜻한 상서로움을 이루기 위해’ 옷을 벗고 밭을 가는 행사를 거르지 않는다고 전했습니다. 물론 유희춘은 이런 행사는 반드시 근절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데요.

“자연의 섭리를 아이들 장난으로 빼앗을 수 있는가. 얼고 추운 곳에서 손발을 드러내면 금방 얼어 터진다. 하물며 알몸으로 길거리에 서 있다면 오죽한가…. 이것은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청동기에 잔뜩 묻은 녹을 제거하자 모양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뭇가지 끝에 새가 두마리씩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청동기에 잔뜩 묻은 녹을 제거하자 모양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뭇가지 끝에 새가 두마리씩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애처롭게 생각한 유희춘이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현지 관원들과 백성들은 ‘핑퐁게임’으로 책임을 전가했다는데요. 관원들은 “이곳 백성들의 풍속”이라 하고, 백성들은 “아니다. 우리는 그저 관원들이 시켜서 하는 것”이라 떠넘겼답니다.

유희춘은 이 대목에서 “이런 악습을 지역 수령들이 없애야 하는데 대체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개탄합니다.

실은 함경도 지방뿐이 아닙니다. 전남 진도에서는 추석 전 어린이들이 벌거벗고 나이 수대로 밭고랑을 가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고요. 일본의 간사이(關西) 지방이나 인도네시아에서도 농부가 밭을 갈 때는 벌거벗은 상태로 괭이질을 하거나 씨앗을 뿌린 후 부부가 성관계를 갖는 풍습도 있었답니다.

어떻습니까. 농경문 청동기의 발견과 유희춘의 생생증언, 그리고 여러 민속학 자료 등을 토대로 이러한 나경(裸耕)의 풍속이 최소한 기원전 4~3세기부터 조선 중기까지 끈질기게 남아 있던 풍속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비와 남성 성기 재미있는 것은 원시사회부터 풍요(혹은 다산)의 상징은 여성이었다는 겁니다. 단적인 예로 3만5000~2만5000년 사이의 유물인 홀레펠스 비너스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등이 대표적인 예죠. 이것이 청동기와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남성으로 바뀝니다.

지모신을 숭상하던 모권사회에서 부권사회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수렵생활을 벗어난 인류가 정착해 가정을 꾸리고, 농사를 짓고, 마을을 지키는 공동체의 수호자로서 남성이 부각됐다는 겁니다. 한자인 ‘사내남(男)’ 자에 그러한 인식이 녹아 있답니다. ‘남(男)’ 자는 ‘밭전(田) 자 밑에 힘력(力) 자가 있잖습니까. 남자가 밭에서 따비질이나 쟁기질하는 형상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추운 날 발가벗고 따비질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 대목에서 민속학자이자 국문학자인 김열규 전 서강대 교수(1932~2013)는 매우 특색있는 주장을 폈는데요.

지금까지 출토됐거나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방패형 청동기는 3점이다. 모두 충남 대전지역에서만 나왔다. /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제공

지금까지 출토됐거나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방패형 청동기는 3점이다. 모두 충남 대전지역에서만 나왔다. /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제공

“(농경문 청동기의) 노출남을 보라. 성기가 따비와 나란히 아래를 향해 뻗어 있다. 따비에는 땅을 후벼 팔 수 있도록 날카롭고 뾰족하게 생긴 쇠붙이가 긴 자루 끝에 붙어 있다. 성기와 따비는 닮은꼴이다.”

나경, 즉 발가벗고 농사짓기 이벤트가 일종의 주술이라는 겁니다. 땅에 박히는 따비를 따라 사내의 성기, 즉 양물이 여성으로 간주된 땅에 영향을 끼친다는 거죠. 결국 나경은 ‘대지의 여신’과의 성관계를 상징한다는 겁니다. 이로써 대지가 더욱 생산성이 높아지고 그만큼 풍요로워지기를 바랐다는 얘기입니다. 그것도 한해 밭을 갈기에 앞선 입춘에 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농경문 청동기처럼 방패 모양의 청동기가 3점 출토됐다고 전해지는데요. 모두 대전(2점 추정), 충남(아산 1점) 지역에서 나왔습니다. 문양이나 제작기법상으로는 거친 느낌의 괴정동 방패가 기원전 5~4세기 정도로 보이고요. 새끼줄 모양의 고리 등 정교한 무늬 새기기가 돋보이는 농경문 및 아산 출토품은 그보다 약간 늦은 기원전 4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답니다. 2500~2400년 전 이들 방패를 매달고 각종 의식을 베풀었을 제정일치 사회의 지도자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3점의 방패 중 농경문 청동기가 가장 작고 앙증맞네요. ‘세분 중 가장 작고 앙증맞은 이 농경문 방패를 가슴에 매단 분의 신분이 높다’에 한표를 던집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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