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백제 무령왕 부부는 ‘24K 순금’을 온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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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발부는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건데… 훼손시키지 않는 게 효의 시초다. 그런데 요즘 양반이나 평민 남녀 할 것 없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아 중국 사람들의 조롱을 받는다…. 사헌부가 나서 엄벌하라.”(<선조실록> <임하필기>)

[이기환의 Hi-story](56)백제 무령왕 부부는 ‘24K 순금’을 온몸에

1572년(선조 5) 9월 28일 선조가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다는 풍습을 엄단한다’는 비망기(특별담화문)를 발표합니다. 선조는 “이것은 부끄러운 오랑캐의 풍습”이라고 개탄합니다.

삼국 명품 귀고리 총출동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백제 귀엣-고리,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특별전(~2023. 2. 26)을 보았는데요.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만약 선조가 이 특별전을 보았다면 어땠을까, 세상에 망조가 들었다고 한탄하지 않았을까, 뭐 이렇게요.

이 특별전은 백제 영역에서 출토된 백제산 귀고리 142건 216점을 한자리에 모은 최초의 전시라 하는데요. 비교 전시를 위해 신라 보문동 합장분 귀고리(국보)와 가야 합천 옥전 무덤(M4호와 28호) 출토 귀고리(보물) 등이 출품됐고요.

이밖에 고구려는 물론 조선시대 귀고리까지 국보 8점, 보물 26점을 포함해 모두 354건 1021점의 귀고리가 나왔답니다.

한마디로 우리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명품 귀고리가 총출동했다고 보면 됩니다.

백제·신라·고구려 귀고리의 특징이 구분되는데요. 백제 귀고리는 단아함이 기본입니다. 왕과 왕비의 귀고리에는 세련되고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담았고요. 고구려 귀고리는 선이 굵고 강건하며, 신라 귀고리는 정교하고 화려함의 극치를 보인답니다. 가야 귀고리는 백제의 영향을 받아 간결하지만 여러 줄의 장식을 연결하거나 독특한 끝장식을 매달았답니다.

눈으로 볼 때 백제와 신라 귀고리의 도드라진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신라에서는 주로 여성 무덤에서 출토되는 굵은고리 귀고리가 백제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백제에서는 남녀를 막론하고 가는고리 디자인을 선호했다는 뜻이죠.

공통점도 보입니다. 백제 귀고리는 고구려의 특징인 일체형 구조를 받아들였고요. 또 원통형 가운데 장식과 굽은 옥을 매다는 디자인은 신라 귀고리를 닮았습니다. 삼국이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이던 시기(6~7세기)인데도 미적 감각은 주고받았던 것 같아요. 패션의 유행은 나라 간, 백성 간 적대감마저 초월하는 것 같습니다.

무령왕릉 출토품 중 무령왕 부부가 직접 착장했을 것으로 보이는 장신구류의 금순도는 99.99%(24K)에 근접했다. 한성 함락과 웅진 천도(475) 이후 쪼그라들었던 국력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강국임을 선언한 이른바 ‘갱위강국(更爲强國)’을 외친 군주의 위상에 걸맞은 치장이라 할 만하다. /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무령왕릉 출토품 중 무령왕 부부가 직접 착장했을 것으로 보이는 장신구류의 금순도는 99.99%(24K)에 근접했다. 한성 함락과 웅진 천도(475) 이후 쪼그라들었던 국력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강국임을 선언한 이른바 ‘갱위강국(更爲强國)’을 외친 군주의 위상에 걸맞은 치장이라 할 만하다. /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4년 간격으로 묻힌 무령왕 부부 특별전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무령왕과 왕비가 직접 매달았던 명품 귀고리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조 선조가 봤다면 “아니 한나라를 다스린 임금이 무슨 귀고리를 저렇게 달았을까”라고 의아해했을 것 같아요.

아시다시피 무령왕과 왕비의 합장묘는 1971년 공주 송산로 고분군의 배수로 공사 도중 우연히 발견됐습니다.

고분 안에서 발견된 지석은 놀라움을 안겼죠. “백제 무령왕(재위 501~523)이 523년 5월 7일 서거(崩)했고 525년 8월 12일 안장됐다”는 명문이 나왔고요. 다른 1장의 지석에는 “무령왕비는 526년 12월 서거했고, 529년 2월 12일 다시 대묘로 옮겼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사상 처음으로 “우리가 무령왕 부부요!”라고 손들고 나선 고분이었습니다.

이렇게 4년 간격(525·529)으로 묻힌 부부의 곁에는 그분들의 금제 장신구가 착장한 그대로 모습을 드러냈는데요.

금제 관장식과 금귀고리, 금목걸이, 금동신발, 금은제 팔찌, 금반지, 금은제 허리띠 등이었습니다.

사실 발굴 때는 몰려드는 기자들을 통제하지 못해 하룻밤 사이에, 심지어 삽으로 훑어내 쌀자루에 쓸어 담았답니다.

24K 순금을 지향한 무령왕 부부 기막힌 일이죠. 훗날 그렇게 수습한 유물들을 하나하나 정리 분석했는데요.

그중 2007년 무령왕 부부의 장신구 가운데 29건 64점을 대상으로 한 비파괴 분석에서 주목할 만한 결과를 얻어냈습니다. 바로 상당수 금제 장신구의 금 순도가 24K, 즉 99.99%에 거의 근접한다는 사실입니다.

한번 구체적으로 알아볼까요. 우선 무령왕의 머리맡에서 확인된 금제 관장식은 어떨까요.

관장식의 세부 재료로 사용된 금판과 달개, 금세선의 금 함유량을 재보니 98~99.07%(23.5~23.8K)로 측정됐습니다. 무령왕의 귀고리는 어떨까요. 몸체에 2줄의 드리개 장식을 한 귀고리인데요. 분석결과 98~99.84%(23.5~24K)의 금 함유량을 보였습니다.

무령왕비의 금제 관장식은 어떨까요. 재료로 쓰인 금판의 금 함유량(99~ 99.22%)이 남편(무령왕·98~99%)과 비슷합니다. 관장식의 끝부분은 순금이 아니라 순동판에 수은을 이용해 도금한 금동제품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왕비의 귀고리를 볼까요. 왕비의 귀고리 1쌍은 몸체에 가는 고리 1개를 연결하고 이 가는 고리에 다시 2줄의 드리개를 연결한 형태인데요. 이 귀고리의 부위별 금 함유량은 98~99.8%(23.5~24K)에 이르렀습니다. 이 귀고리의 동쪽에서 나온 또 하나의 금제 귀고리 1쌍 역시도 97~99.83%(23.3~24K)로 측정됐습니다.

이와 함께 왕비의 목걸이는 98.9~ 99.1%(23.7~23.8K)의 순도를 보였습니다. 아홉마디로 제작한 목걸이는 98.2~98.8%(23.6~23.7K)였고요. 또 왕비의 머리 오른쪽과 가슴 부위에서 출토된 ‘금모자 굽은옥(금모 곡옥)’을 비롯한 금제 모자의 금 함유량은 99.87%, 즉 24K로 밝혀졌습니다.

사비백제 귀고리는 고구려의 특징인 일체형 구조를 받아들였다. 즉 고리 아래의 연결장식과 중간장식, 그리고 가장 밑부분인 드리개를 땜질로 이은 방식이 같다. /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사비백제 귀고리는 고구려의 특징인 일체형 구조를 받아들였다. 즉 고리 아래의 연결장식과 중간장식, 그리고 가장 밑부분인 드리개를 땜질로 이은 방식이 같다. /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착장품은 98~99.9%, 부장품은 91~95% 분석결과 재미있는 착안점이 있다고 합니다.

왕과 왕비의 장신구별 금 함유량은 모두 4개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왕과 왕비가 직접 착장한 것으로 보이는 관장식과 그 관장식을 꾸미려고 사용한 부품, 그리고 금귀고리, 금목걸이 등의 금 함유량이 순금(24K)에 근접했거나 24K에 도달했다는 겁니다.

왕이 머리 뒷부분에 꽂은 금뒤꽂이나 머리카락을 흐트러지지 않게 잡아묶는 데 사용한 각종 장식 등은 90.5~96.5% 정도로 제작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종합해보면 금제 관장식과 금귀고리, 금목걸이 등 왕과 왕비가 직접 착용한 물품은 이른바 ‘포 나인’, 즉 99.99% 순금제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반면 무령왕 부부의 몸에 착장하지 않고 그 부품으로 사용됐거나 단순한 부장품으로 넣은 물품은 상대적으로 금 순도가 낮은 재료(91~95% 내외)를 쓴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거나 순도 99.99%에 근접한 백제의 제련과 정련 공정이 구비돼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합금을 선호한 신라 임금들 그렇다면 비슷한 시기의 신라 고분은 어떨까요. 경주 보문리 합장묘 중 굴식돌방무덤에서 출토된 국보 순금제 귀고리 1쌍은 금 함유량이 92.3~97.76% 정도입니다. 무령왕릉의 순도보다는 약간 낮죠. 이외에 신라 고분에서 출토되는 장신구는 대부분 금·은 합금으로 이뤄졌습니다. 예컨대 보문리 합장묘 중 돌무지덧널무덤에서 나온 귀고리는 금은 합금(금 71%·은 28%)입니다.

신라의 대표 유물인 금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금관의 세움장식을 기준으로 보면 금관 6점의 금 함유량은 80~89% 선이었습니다. 교동(89.2%)-황남대총 북분(86.2%)-금관총(85.4%)-천마총(83.5%)-금령총(82.8%)-서봉총(80.3%) 순이었어요. 은 함유량은 10.9(교동)~18.8%(서봉총) 사이였죠. 관테(둥근 밑동)의 금 함유량 역시 88.1(교동)~81.4%(서봉총) 사이였습니다.

금관과 함께 출토된 관장식(새날개형)의 경우 82.9(천마총)~87.1%(금관총)였고요. 허리띠와 허리띠 장식의 경우 대략 75~85%의 금 함유량을 보였습니다. 목걸이 역시 71.4~98.3%까지 다양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백제 무령왕 부부는 24K를, 신라 왕들은 금은 합금을 선호했다는 겁니다.

1572년(선조 5) 조선조 선조 임금이 ‘귀 뚫고 귀고리 다는’ 풍습을 엄금하자 새로운 형태의 귀고리가 등장했다. 귀를 뚫지 않고 귓바퀴에 거는 귓바퀴 걸이, 즉 명실상부한 귀걸이가 등장한 것이다. / 아모레 퍼시픽 미술관 소장

1572년(선조 5) 조선조 선조 임금이 ‘귀 뚫고 귀고리 다는’ 풍습을 엄금하자 새로운 형태의 귀고리가 등장했다. 귀를 뚫지 않고 귓바퀴에 거는 귓바퀴 걸이, 즉 명실상부한 귀걸이가 등장한 것이다. / 아모레 퍼시픽 미술관 소장

순금의 합금의 차이는? 여기서 의문이 들죠. 신라 왕과 왕족은 왜 백제 무령왕 부부처럼 순금을 지향하지 않은 걸까요

물론 단순히 금의 함유량으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금은 부드러운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순금만 사용했을 경우 연성이 강해 굽어지거나 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금에 은을 섞으면 광택을 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라의 경우 더 강하고, 더 반짝거리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금관 등에 은을 적절하게 섞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00% 확언할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신라 금관의 경우 은을 적게 섞었든, 많이 섞었든 무척 약하거든요. 2개의 금못으로만 고정된 관테 역시 조금만 움직여도 세움장식이 꺾여 내려앉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강도를 높이려고 은을 섞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해석도 있어요. 5세기 초반~6세기 초반 황금 문화의 유행으로 금 소비량이 급증했는데요. 그에 따라 금 부족 현상을 빚게 돼 불가피하게 금은 합금 제품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백제의 명품 디자이너는 ‘다리’ 백제 역시도 황금 생산이 용이하지는 않았겠죠. 하지만 갱위강국(更爲强國), 즉 한성 함락과 웅진 천도(475) 이후 쪼그라든 국력을 추스르고 다시 강국이 됐음을 선언한 무령왕과 그 부인이 아니겠습니까.

생전에 당대 최고의 장인이 만든 명품으로 치장했을 것이고, 두분이 서거하자 그 유품을 그대로 묻어주었을 겁니다.

방증자료가 있습니다. 무령왕의 귀고리 한쌍 중 한점을 보면 끊어진 부위를 금실로 꿰맨 흔적이 있는데요. 이렇게 꿰매지 않으면 부품 자체를 완전히 교체해야 했거든요. 무령왕이 생전에 이 귀고리를 달고 다니다가 끊어지자 보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무령왕비가 찼던 용무늬 은팔찌’(국보)의 안쪽에 새겨진 명문은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팔찌에는 “다리라는 장인이 경자년 2월(520) 대부인(왕비)을 위해 230주이(主耳·단위)를 들여 만들었다”(庚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主耳)는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요.

520년이면 무령왕비가 서거하기 6년 전의 일이죠. 백제 최고의 장인이었을 ‘다리’가 왕비, 한 분을 위한 팔찌를 제작한 뒤 자신의 사인을 새겨넣은 게 아닐까요. 무령왕비를 위한 한정판 명품이었겠죠.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점이 있어요. 각 한쌍씩 출토된 무령왕과 왕비의 금제 관장식, 왕비의 은제 팔찌 등을 보면 한사람 작품이 아닌 것 같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한쌍이라도 조금씩 다른 개인 작가 양식을 보여주는 부분이 확인된다는 겁니다. 솔직히 말해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더 숙련된 장인이 만들었다는 느낌이라 할까요.

무령왕비가 찼던 용무늬 은팔찌(국보)의 안쪽에는 “다리라는 장인이 520년 대부인(왕비)에게 230주이(主耳·단위)를 들여 만들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520년은 무령왕비가 서거하기 6년 전이다.

무령왕비가 찼던 용무늬 은팔찌(국보)의 안쪽에는 “다리라는 장인이 520년 대부인(왕비)에게 230주이(主耳·단위)를 들여 만들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520년은 무령왕비가 서거하기 6년 전이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장인이 동시에 하나씩 만들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겁니다. 무령왕릉 왕비의 목제 두침(베개)에서 ‘갑’과 ‘을’의 명문이 확인됐는데요. 이것은 두 마리의 봉황을 각각 만들었다는 방증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무령왕과 왕비의 장신구를 제작한 것은 ‘다리’와 같은 장인을 책임자로 둔 명품 제조업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귀고리와 귀걸이의 차이 국립공주박물관 특별전의 전시설명을 들으면서 제가 평소 이해가 부족했던 부분을 찾아냈는데요. 바로 ‘귀고리’와 ‘귀걸이’ 용어였습니다. 우선 특별전 제목이 ‘귀엣-고리’잖아요. 이 ‘귀엣고리’가 ‘귀고리’의 옛말이랍니다. 제 기억으로는 얼마전까지 귀걸이가 아니라 귀고리가 표준어였다고 알고 있는데요. 요즘은 귀고리와 귀걸이 모두 표준어랍니다.

두 용어에 미묘한 차이가 있답니다. ‘귀고리’는 ‘귓불에 다는 장식품’의 의미로 더 오랫동안 사용해왔답니다.

예전부터 귀고리(귀걸이)는 둥근 고리 모양으로 만들어 착용했는데요. 귓불에 구멍을 뚫고 안정적으로 고정하려면 고리 모양이 가장 알맞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조선조 선조 임금은 바로 ‘남자들까지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다는 풍습’을 개탄했습니다.

선조 같은 군주가 귓불을 뚫는 것을 금하면서 고리 모양은 점차 사라지고 귓바퀴에 거는 걸이 모양으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귀고리’가 ‘귀걸이’로 바뀐 거죠. 그럼에도 최근까지 ‘귀고리’가 표준어였는데요. 그만큼 귓불을 뚫고 고리를 매다는 ‘귀고리’가 ‘귀걸이’보다 역사가 더 뿌리 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1500년 전의 명품 귀고리를 보고 싶으면 지금 공주로 ‘오픈런’ 해보면 어떨까요.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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