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국수 먹다 끌려간 삼청교육대···영겁 같은 ‘3년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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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임철원(가명)은 마산시외버스터미널 앞 포장마차에서 국수를 먹고 있었다. 터미널을 오가는 승객들에게 신문과 잡지를 파는 청년이었다. 그날도 포장마차에서 국수로 한끼 식사를 때우려는 그때, 갑자기 누군가 그의 팔을 낚아챘다. 경찰관들이었다.

조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두 팔로 통나무를 받쳐들고 훈련을 받고 있는 삼청교육대 피해자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조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두 팔로 통나무를 받쳐들고 훈련을 받고 있는 삼청교육대 피해자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는 마산경찰서로 연행됐다. 경찰관들은 ‘버스 승객들에게 껌을 강매했다’는 내용의 자술서를 쓰라고 강요했다. “그런 적 없다”며 저항하는 임철원에게 주먹이 연거푸 날아들었다. “4주만 갔다 오면 되는데 그거 하나 못 쓰나” 하고 회유하기도 했다.

어디로 왜 가야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매를 맞았다. 결국 거짓 자술서를 썼다. 그리고 다음 날로 어느 군부대로 끌려갔다. 그곳이 바로 ‘삼청교육대’. 1980년 8월의 일이었다.(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삼청교육 피해사건 조사보고서> 중 진술 일부 재구성)

흔히 연병장 가득 모인 사람들이 군복을 입고 목봉체조와 원산폭격을 하는 장면으로 기억되는 삼청교육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것처럼 ‘깡패 같은 사람들을 잡아다 힘든 군사훈련을 시켰다’는 것이 삼청교육대의 ‘진실’은 아니었다.

1980년 7월 29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입안한 삼청계획 제5호 및 계엄포고 제13호에 따라 계엄사령부 지휘 아래 군경은 8월부터 약 6만명의 대상자를 검거했다. 그 가운데 약 4만명을 1981년 12월까지 순차적으로 군부대에 설치된 삼청교육대에 수용했다.

순화교육, 근로봉사, 보호감호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구타 등 가혹행위가 발생했다. 교육 중 사망자 54명, 출소 후 후유증 사망자 최소 367명 등 확인된 사망자만 421명에 이른다.

삼청교육대 검거는 전국적인 ‘작전’이었다. 1980년 8월부터 약 6개월간 총 5회에 걸친 일제 검거에 군·경 약 80만명을 투입했다. 모두 6만755명을 법관의 영장 발부 없이 검거했다. ‘불량배 소탕’이라는 명분이 무색하게, 전체 피검자 중 35.9%가 전과 사실이 전혀 없었다.

검거된 사람들에게는 A-B-C-D 등급을 매겼다. B-C등급 약 3만9742명을 대상으로 26개 부대에서 모두 11차례의 순화교육을 실시했다. 새벽 6시부터 하루 16시간씩, 육체훈련과 자아반성 등 정신교육을 진행했다. 개선이 없는 자는 ‘특수교육대’에 입소시켜 더 심한 훈련을 받게 했다. 학생, 여성, 노동조합 간부 등에 대해서도 별도의 순화교육을 시행했다.

보통 삼청교육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장면이 바로 ‘순화교육’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순화교육이 끝난 뒤에 ‘미순화자’로 분류된 약 1만명은 전방 20개 사단에 수용돼 근로봉사를 해야 했다. 1980년 9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9차에 걸쳐 전술도로공사와 방어시설 보강공사에 투입했다. 3개월간 계속된 근로봉사 중에도 순화교육을 병행 실시했다.

근로봉사가 끝나면 또 보호감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국보위는 1980년 12월 사회보호법을 제정했다. 이듬해 1월 삼청교육생들이 이 법의 최초 피적용자가 됐다. 이른바 ‘미순화자’로 분류된 8000여명은 각각 1년에서 5년까지 보호감호 처분을 받았다. 이들은 재판도 없이 군부대나 감호소에 계속 수용돼 순화교육과 근로봉사를 또다시 겪어야 했다.

마산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국수를 먹다 끌려간 스무 살 임철원도 1980년 8월 4일부터 군부대로 끌려가 순화교육을 받았다. 이어 근로봉사와 보호감호도 피해가지 못한 그는 1983년 8월 22일 출소했다. 그가 사회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만 3년 하고도 18일이었다.

“4주만 갔다 오면 된다”던 경찰관의 말은 틀렸다. 3년 18일이면 ‘지옥’이 끝날 거라는 임철원의 생각도 틀렸다. 그 뒤로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삼청교육대라는 족쇄에 발목이 잡혀 있다. 이웃과 사회의 왜곡된 시선은 끝나지 않는 형벌이었다.

“삼청교육대를 다녀왔다는 사실을 (주변에서) 다들 어떻게든 알게 되니 아이들을 키우기가 힘들어 스물몇 번 이사를 했다. (…) 회사에 다니고 싶어 이력서도 많이 냈지만 중범죄자 취급을 받아 번번이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연합뉴스 <“40년 지났어도 도망가는 꿈”… 끝나지 않은 삼청교육대 악몽> 김치연 기자, 2022. 7. 24.)

지난 6월 7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삼청교육 피해사건’의 진실을 규명했다. 과거 정부는 삼청교육 피해자의 범위를 ‘상이·사망한 자’로 제한했지만,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번 결정을 통해 강제입소한 모든 사람을 피해자로 인정했다.

대법원은 2018년 삼청교육의 법적 근거였던 계엄포고 제13호가 해제 또는 실효되기 이전부터 위헌·무효라고 결정한 바 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계엄포고 제13호에 근거해 이뤄진 순화교육 및 근로봉사는 헌법상 보장된 신체의 자유를 침해했고, 국제·국내 규범이 금지하는 강제노역을 동반한 인권침해였다고 판단했다. 계엄포고 제13호 및 구 사회보호법에 의해 이뤄진 보호감호도 신체의 자유뿐 아니라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인권침해라고 봤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삼청교육대 입소자 전원에 대한 배상 방안 마련, 피해자 트라우마센터 설치, 계엄법·사회보호법 유죄 확정판결 피해자에 대한 재심 등을 정부에 권고했다.

계엄포고 제13호를 발령한 1980년 8월 4일, 임철원은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그들의 어긋난 인생을 바로잡으라는 권고는 그렇게 빨리 이행되지 않을 것이다. 4만명의 인생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데 주저함이 없던 국가는 ‘진실’ 앞에서는 법이니, 예산이니, 사회적 합의니 하는 말들을 앞세우며 무심히 시간을 흘려보낸다.

스무 살 신문팔이 청년 임철원에게 너무나 긴 ‘3년 18일’이 계속되고 있다.

※삼청교육 피해사건은 1980년 계엄사령부 지휘 아래 군경이 약 6만명의 대상자를 검거하고 그중 약 4만명을 순차적으로 군부대에 설치된 삼청교육대에 수용해 순화교육, 근로봉사, 보호감호를 시행했으며, 다수의 사망·부상자를 발생하게 한 대규모 인권침해 사건이다.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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