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나와선 안 될 천마가”…‘기린총’ 될 뻔한 천마총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7월 25일… 예상했지만, 곡옥이 달린 나뭇가지 형태의 세움장식이 확실한 금관 일부를 확인했다.”

1973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경주 155호분(천마총)의 발굴일지 7월 25일자 내용입니다. 어찌 좀 이상하죠. 명색이 신라 금관을 발견했는데, 흥분감과 짜릿함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습니다.

천마총에서 확인된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는 모두 3장이다.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말다래에 그린 2장 외에 대나무로 짠 삿자리에 덧씌운 금동판 말다래에 표현한 1장이 뒤늦게 확인됐다. / 국립경주박물관·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천마총에서 확인된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는 모두 3장이다.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말다래에 그린 2장 외에 대나무로 짠 삿자리에 덧씌운 금동판 말다래에 표현한 1장이 뒤늦게 확인됐다. / 국립경주박물관·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금관총(1921년)-금령총(1924년)-서봉총(1926년)에 이어 4번째이자 해방 후 첫 번째로 수확한 금관이잖아요.

발굴일지의 ‘예상했던 대로’ 표현이 눈길을 끕니다. 해방 후 첫 발굴한 왕릉급(높이 12.7m·밑지름 47m)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었으니까요. 그러니 내심 금관 출토는 시간문제로 여겼습니다.

그러던 차에 금관이 보이자 ‘짜릿한 흥분’보다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후 한 달 가까이 지난 8월 22일 무덤 부장품을 한곳에 담아놓은 상자 안에서 ‘말다래’ 3벌(6장)이 나왔는데요. 금관보다는 말안장의 부속구인 말다래에 그려진 천마가 155호분의 ‘시그니처’가 됐습니다. 그래서 이 고분에 ‘천마총’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시험발굴이 대박 발굴로 내년(2023)이면 천마총 발굴 50주년을 맞이하는데요. 며칠 전 문화재청이 발굴 50주년을 앞둔 ‘천마총의 우리말 의미와 상징, 표어를 공모한다’는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기회에 알아보려고요.

총 1만1526점의 유물이 쏟아진 천마총 발굴은 한국 고고학사에 어떤 자취를 남겼을까요.

사실 155호분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던 천마총은 시험용 발굴 대상이었습니다. 사연이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1970년 7월) 후 11개월 만인 1971년 6월 경주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경주 관광 개발계획을 마련하라”고 지시합니다. 이에 따라 마련된 개발계획 중에 눈에 띄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경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98호분(황남대총·높이 22~23m, 밑지름 80~120m)을 발굴조사한 뒤 그 내부를 관광자원으로 공개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고고학계로서는 그렇게 큰 신라 무덤을 발굴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98호분(황남대총)과 인접한 155호분을 시험 발굴해 경험을 축적한 뒤 98호분을 조사한다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1973년 4월 6일부터 시작된 ‘시험용 발굴’이었지만 학계의 기대는 컸습니다. 과연 기대한 대로 7월 25일부터 무덤 주인공이 착용한 금관과 금허리띠와 금귀고리, 금팔찌, 금반지 등이 보였습니다.

말 3마리분의 장신구 발굴은 8월 14일부터 주인공의 머리맡에 놓인 부장품 상자로 이어졌는데요. 상자 안에 뒤섞여 있던 천 조각과 나무 썩은 물질 등을 제거하자 뜻밖의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말 안장 위에 가지런히 놓은 2장의 말다래가 보인 겁니다. 대나무로 짠 삿자리에 덧씌운 금동판 말다래였습니다.

당시 발굴단은 이 ‘대나무제 금동판 말다래’에 ‘천마’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대나무 삿자리나 금동판 모두 심하게 부식돼 바삭바삭 부서져서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죠.

발굴단은 이렇게 부식된 ‘대나무제 금동판 말다래’를 원상태로 수습해야 했습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그 조치란 유물에 약품을 뿌려 굳게 만드는 경화 처리였습니다. 분무기와 이발소용 드라이기를 사용해 경화 처리용 약품을 ‘금동판 말다래’에 뿌리고 말리는 작업을 반복했습니다.

강렬한 색깔의 천마가! 돌발변수가 생겼습니다. 경화 처리를 끝낸 ‘대나무제 금동판 말다래’를 들어올리는 순간, 그 밑에서 또 하나의 심상치 않은 물체가 살짝 보였습니다. ‘자작나무 껍질(백화수피)’에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발굴단은 상상도 못 했답니다. 부식물질이 가득 차 있어 바로 그 아래의 유물도 보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8월 22일 ‘금동판 말다래’를 조심스레 들어올리자 ‘자작나무 껍질’의 전모가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2장이 겹쳐진 또 한벌의 말다래였습니다. 판 위의 부식물질을 제거해나가자 강렬한 채색 그림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뿔싸!’ 탄성이 터졌습니다. ‘자작나무 껍질 말다래’의 일부가 훼손돼 있었습니다. ‘금동판 말다래’의 경화 처리 때 뿌린 약물이 ‘자작나무 말다래’에까지 침투한 겁니다. 밑까지 스며든 약물이 자작나무판과 그 위의 부식물에 엉겨붙어 까맣게 변한 거죠. 훼손된 윗부분 말고는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1924년 금령총 출토품 중에 금동장식으로 분류된 유물 역시 말다래에 표현된 천마로 뒤늦게 확인됐다. /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1924년 금령총 출토품 중에 금동장식으로 분류된 유물 역시 말다래에 표현된 천마로 뒤늦게 확인됐다. /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그렇게 노출한 자작나무판 말다래 1벌은 길이 각 75㎝, 너비 각 56㎝, 두께 각 6㎜ 정도였는데요.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겹 겹쳐 바느질하고, 내부를 빗살무늬로 누볐습니다. 내부에는 하늘을 나는 백마를 화면 가득하게 그렸고요. 가장자리는 꽃그림을 배치했고, 가죽을 둘러 꿰매었습니다.

만지면 꺼질세라 불면 날아갈세라 김정기 발굴단장(1930~2015)의 낯빛이 달라졌습니다. 금관 출토 때에도 자못 ‘쿨’한 표정으로 작업을 지시했던 김 단장은 천마도 말다래가 출토되자 직접 붓과 솔을 잡았습니다. 당시 발굴단원은 “김 단장은 말다래의 부식물을 털어내면서 입을 앙다물었다 풀었다 하고, 끙끙 신음을 내기도 하고, ‘하~하~’ 하는 감탄사를 숨기지 않았다”고 회고했습니다.

신라의 회화 솜씨를 알 수 있는 그림이 처음 현현했으니 어찌 기쁘지 않았겠습니까. 천마총 후속발굴에서 상서로운 새를 그린 ‘서조도’와 말 탄 인물을 그린 ‘기마인물도’ 채색판이 나와 흥분은 더해졌습니다.

그런데 김정기 단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나와서는 안 될 게(천마도) 나왔어!” 하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합니다.

유물의 보존처리 기술이 일천했던 1970년대에 ‘천마도’ 같은 부식된 유기물이 출토됐으니까요.

발굴단장으로서 얼마나 긴장했으면 “나오지 말아야 할 게 나왔다”고 토로했을까요.

딴은 그렇습니다. 천마도 말다래는 자작나무 껍질을 누벼 만든 것이고요. 땅속에서 무려 1500년 가까이 묻혀 있었습니다.

그러니 출토 당시에는 나무껍질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모두 부식돼 있었거든요. 이런 상태에서 오래 공기에 노출되면 큰일이 납니다. 유물 틈에 녹아든 습기가 말라버리면 색깔도 금방 옅어지고, 갈라지고, 쪼그라들고 맙니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이 말다래를 어떻게 빨리 들어내 무사히 옮길 것인가, 발굴단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묘안을 짜냈습니다.

얇고 긴 대칼과 함석판, 켄트지(그림 그리기용 빳빳한 종이) 등을 이용해 2장이 겹쳐진 자작나무 말다래를 살짝 들어올린 뒤 조심스레 옮겼습니다. 한쪽에서는 6~7명이 빙 둘러서서 대칼에, 합판에, 함석판에, 켄트지까지 동원해 살살 들어올려 구령에 맞춰 옮겼습니다. ‘불면 날아갈세라 만지면 꺼질세라’라는 말이 꼭 맞았습니다.

15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천마도’ 2장은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보존 상자로 옮겼습니다.

정리하자면 천마총에서 ‘대나무 삿자리 금동판제’ 1벌(2장), ‘자작나무 껍질제’ 1벌(2장) 외에도 ‘옻칠판제’ 1벌(2장) 등의 말다래가 확인됐는데요. 모두 6장이니까 3마리분의 말다래가 세트로 나온 셈이죠.

‘말다래’는 말 안장 양쪽에서 배 아래로 늘어뜨린 부속구인데요. ‘말이 달릴 때 진흙(니·泥)이 기수의 가랑이에 튀는 것을 막아주는(장·障) 역할을 해준다’는 뜻에서 ‘장니(障泥)’라고도 합니다. 발굴 당시에는 말다래 3벌(6장) 가운데 ‘자작나무’ 2장에서만 ‘천마도’가 보였습니다.

전화국 교환수가 누설한 발굴기사 발굴 후일담도 기가 막힙니다. 1971년 공주 무령왕릉 발굴 때 몰려드는 기자들을 통제하지 못해 유물을 하룻밤 사이에 수습하는 불상사를 겪었죠. 그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천마총 발굴현장은 비공개로 했습니다. 하지만 기자들이 누구입니까.

망원경까지 동원해 발굴현장을 스캔한 것은 애교였고요. 낮은 포복으로 잠입해 발굴 사진을 찍어간 기자도 있었답니다. 기막힌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발굴단은 중요 조사 상황을 유선상으로 서울의 문화재관리국으로 보고했는데요.

어찌된 일인지 보고사항이 매일매일 현장중계하듯 특정신문에 보도되곤 했답니다. 자연히 발굴단 내부에 ‘기자 끄나풀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답니다. 나중에 진상이 밝혀졌습니다. 당시는 전화국의 교환수를 통해야만 통화가 가능했던 시절인데요.

알고 보니 그 전화국 교환수가 모 신문기자의 부인이었습니다. 그러니 보고내용이 고스란히 이 교환수를 통해 기자에게 알려졌던 겁니다.

시험발굴형식이었지만 천마총에서는 무덤 주인공이 착용한 금관과 금허리띠와 금귀고리, 금팔찌, 금반지 등 화려한 장신구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 고분의 시그니처 유물은 뭐니뭐니해도 천마도였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시험발굴형식이었지만 천마총에서는 무덤 주인공이 착용한 금관과 금허리띠와 금귀고리, 금팔찌, 금반지 등 화려한 장신구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 고분의 시그니처 유물은 뭐니뭐니해도 천마도였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천마총’과 ‘기린총’ 논쟁 훗날 ‘천마도’와 관련해 인구에 회자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말다래에 그려진 그림이 ‘천마’가 아니라 ‘기린’이라는 견해가 나온 겁니다. ‘기린’은 예부터 성인의 세상에서 출현한다는 상상의 동물인데요.

후한(25~220) 시대의 자전인 <설문해자>는 “기린은 어진 짐승이고, 말의 몸에 소의 꼬리를 갖고 있으며, 뿔이 하나 솟아 있다(麒麟仁獸也 馬身牛尾一角)”고 했습니다. 연구자는 “이른바 ‘천마도’의 동물을 자세히 보면 머리에 뿔이 표현돼 있고 입에서 신기를 내뿜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이 고화질로 찍은 ‘천마도’ 사진에는 ‘머리 위에 두꺼운 모양의 반달형 뿔(혹은 갈기)’이 보였는데요. 이것을 뿔로 확신하는 분위기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기린총’ 견해는 학계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고요. 명칭을 ‘천마총’에서 ‘기린총’으로 바꿔야 하지 않느냐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했습니다.

2014년 국립경주박물관이 ‘천마총 발굴 40주년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유의미한 분석결과를 밝혀냅니다. 1973년 발굴된 ‘대나무제 금동판 말다래’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다가 금동판을 오리고 붙여 만든 ‘천마’ 그림을 확인한 겁니다.

또 1924년 금령총 출토품 가운데 막연하게 ‘말모양 금동 장식’으로 명명했던 유물은 확인결과 천마총 출토 ‘대나무제 금동판’과 흡사한 ‘말다래’였습니다.

박물관의 분석결과를 종합하면 지금까지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는 천마총(3장)과 금령총(1장) 등 모두 4점인 셈이죠.

천마총 말다래 가운데 남아 있는 ‘대나무제 금동판제’ 1점과 ‘옻칠제’ 2점 등에서도 천마가 그려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워낙 부식이 심해 확인하지는 못했답니다.

국립경주박물관 측은 이런 분석결과를 토대로 천마총에서 확인되는 동물은 말이 분명하다고 단정했습니다. 즉 말 머리 위의 반달문양은 기린의 상징인 뿔이 아니라 말의 갈기 묶음(말상투)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습니다. 같은 천마총 출토품 가운데 역시 자작나무 껍질로 제작된 채색판에 그려진 ‘말을 탄 인물상’이 있는데요. 하늘을 나는 백마입니다.

자작나무판 말다래 1벌(2장)은 길이 각 75cm, 너비 각 56cm, 두께 각 6mm 정도였다.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겹 겹쳐서 바느질하고, 내부를 빗살무늬로 누볐다. 내부에는 하늘을 나는 백마를 화면 가득하게 그렸다. 가장자리는 꽃그림을 배치했고, 가죽을 둘러 꿰매었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자작나무판 말다래 1벌(2장)은 길이 각 75cm, 너비 각 56cm, 두께 각 6mm 정도였다.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겹 겹쳐서 바느질하고, 내부를 빗살무늬로 누볐다. 내부에는 하늘을 나는 백마를 화면 가득하게 그렸다. 가장자리는 꽃그림을 배치했고, 가죽을 둘러 꿰매었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무엇보다 천마총(5세기 말~6세기 초)보다 시기가 앞선 고구려 덕흥리 고분(408년 조성)에도 ‘천마지상(天馬之象)’이라는 명문과 함께 천마가 그려져 있는데요. 이것이 ‘천마도’의 천마와 다를 바 없다는 겁니다.

천마총 주인공은 지증왕인가 왜 천마일까요. <삼국유사> ‘박혁거세’조를 볼까요.

“나정 곁에… 백마 한마리가 꿇어앉아 절하고 있었다. 그곳에 알이 있었다. 말이…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에서 단정한 동자(박혁거세)가 나왔다.”

어떻습니까. 신라에서 말이 제왕의 등장을 알리는 신비로운 동물로 여겨졌다는 얘기죠. 따라서 왕이나 왕족의 무덤이 확실한 천마총 출토 말다래에 새겨진 동물은 ‘천마’라는 겁니다.

사실 저는 기린이냐, 천마냐를 구별할 필요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기린이든, 천마든 무덤 주인공을 영원한 사후세계로 인도하는 신령한 안내자나 조력자의 역할을 했을 테니까요. 어떻든 ‘천마총=기린총’설은 학계에 건전한 논쟁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문제 제기였던 것 같습니다.

천마총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5세기 말~6세기 초에 조성한 고분이라는 학설이 맞다면 지증왕(재위 500~514)이 해당하는데요. 백제 무령왕릉처럼 “내가 주인공이요!” 하고 손들고 나서지 않았으니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kh0745@naver.com>

이기환의 Hi-story바로가기

이미지